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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97화 (297/628)
  • 제297화

    그건 무척이나 잠깐이었다. 컨델의 표정은 순식간에 본래의 무뚝뚝하고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기엔 그 미묘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쎄요, 모르겠군요. 어디 사는 귀족님이신가 보죠?”

    컨델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하지만 약점을 보인 사냥감을 그냥 놓아둘 지크가 아니다. 사냥감의 약점은 베고 찢고 물어뜯어야 하는 법이다.

    “옆 나라 크로뇽 왕국에 있는 루브렌터 자작가의 영애입니다.”

    “그렇군요. 한데, 그분의 이름은 왜 꺼내신 겁니까?”

    “자자, 일단 들어보기나 해요.”

    지크가 서두르지 말라는 듯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를 말렸다.

    “놀랍게도 그분은 가문의 하인과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합니다. 그걸 듣고 정말로 놀랐죠. 그런 건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건 줄로만 알았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이시드 씨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군요.”

    “그렇죠? 정말로 그 하인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신분이 다른 사랑. 듣기에는 감미로운 말이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일이거든요.”

    철모르는 아이에 대해 한탄하는 부모처럼 지크가 한숨을 쉬었다.

    “성장 환경이 달라 행동 하나하나가 충돌하는 건 사소한 문제죠. 귀족가의 여식으로서 상류층의 생활을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밑바닥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찻잔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말이죠. 같이 도망친 자가 하인인 이상 절대로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할 순 없을 겁니다. 빈민으로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지크는 마치 연극 속 비련의 주인공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말했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그런 쓰레기통 같은 상황에 처박는 게 진정한 사랑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하인 놈은 쓰레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수구를 기어다니는 쥐새끼랑 비교해도, 오히려 쥐새끼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군요.”

    컨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표정 변화는 마치 신기루였던처럼,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치 얼굴도 모르는 완벽한 제삼자의 욕을 듣는 것과 같은 반응이다.

    ‘…반응이 없네?’

    라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크가 갑자기 하인에게 저런 비난을 퍼붓는 건, 컨델을 흥분하게 만들려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녀석의 용의를 더욱 강하게 하려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컨델의 반응은 담백한 걸 넘어 무미건조했다. 그 정도로 감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라일라는 지크를 보고는 혀를 찼다. 지크가 그녀의 앞에 서 있기에 그의 모든 표정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각선 방향에 서 있는지라 얼굴의 옆면은 조금 볼 수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네.’

    지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컨델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말이죠.”

    지크가 입을 열었다. 컨델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대체 무슨 영문 모를 소리만….”

    “그 시아 루브렌터란 영애도 참 웃기는 사람입니다.”

    컨델이 입을 닫았다.

    “그분은 무척 철없는 분이십니다.”

    지크의 입에서 갑자기 시아를 매도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자기 집에서 일을 하는 하인과 눈이 맞다니, 귀족의 품격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이에요.”

    “…….”

    “뭐, 그 정도야 귀족가의 철없는 영애들에게 종종 있는 일입니다만, 이 분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자그마치 하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지크는 웃는 낯을 하고 있었고 목소리도 상냥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전달하는 언어는 신랄했고 그의 눈은 컨델에게 또렷이 박혀 있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무슨, 자신을 소설에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이라고 생각이라도 한 걸까요? 루브렌터 자작가가 주변에 어떤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는 뭐, 안 봐도 뻔하군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의 은혜와 가문의 명예를 모조리 시궁창에 처박아 넣고 자신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자세는 삐딱하게. 턱은 들고 다리는 짝다리를 짚었으며 팔은 건들거린다.

    “제 딴에는 ‘나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 자유를 얻는 거야!’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분이 앞에 있다면 제발 철 좀 들라고 하고 싶네요.”

    “…그래도 귀족가의 영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말은 좀 위험해 보이는군요. 제가 알기로 당신은 귀족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컨델의 말에 지크는 피식 웃었다.

    “조사를 상당히 자세하게 하셨나 봅니다. 제 신분도 알다니요.”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괜히 덤터기를 쓰기 싫어서 그랬다고요. 제가 뒷골목 출신이라서요.”

    “뒷골목 출신이라….”

    의심스럽다는 어조가 노골적이다. 하지만 지크는 그쪽을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걱정은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저도 나름 귀족 가문 출신이거든요. 집은 나왔지만요. 그리고 시아 루브렌터 영애도 스스로 집을 뛰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평민이죠. 별 탈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네요.”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지도 않고요.”

    그 말을 듣고 요하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려고 다른 병사들을 문밖에 대기시키자고 하셨군.’

    한 명을 체포하는데 굳이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 필요는 없다는 지크의 조언에, 도시에서 지원해준 병사들은 전부 방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여기에 있는 건 요하임과 지크의 일행들뿐. 지크의 말이 문제가 되더라도 전부 지크의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다.

    ‘정말로 철저해.’

    요하임이 감탄하고 있을 때에도 지크는 말을 계속했다.

    “그녀를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요? 꿈속에 매몰된 아가씨? 현실 파악 못 하는 철부지? 그도 아니면 소설을 진짜로 아는 망상증 환자?”

    지크가 한 걸음을 뚜벅 내딛었다.

    “아니, 그런 완곡한 표현은 관두죠. 그러면 마치 제가 그 여자를 보호하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럴 생각은 없는데 말이죠. 제가 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멍청하고 무식하고 대가리에 철퇴라도 맞은 것 같은, 현실 파악 못 하는 여자의 편을 든다는 오해를 사야 한단 말입니까. 안 되죠. 암, 안 되고 말고요. 생각해 보면 하인보다도 그 골 빈 여자가 더더욱 욕을 퍼먹어도 싼데 말이죠.”

    또 다시 한 걸음. 지크가 자신에게 점점 다가옴에도 컨델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렷이 지크의 눈을 쳐다봤다.

    “이시드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마 그 여자는 옛적에 죽어버렸을 겁니다. 내기해도 좋아요. 못 먹고 못 입고 이리저리 진창을 뒹굴다 풍족했던 옛집을 떠올리고는 비참하게 말이죠. 아마 죽기 직전의 생각은 이러지 않았을까요?”

    지크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컨델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아, 내가 멍청하게도 헛꿈을 꿨구나. 집안의 따스한 품이 그립다. 예전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도 생각하겠죠.”

    지크가 웃었다. 아주 환하게.

    “이런 하인 놈 따위 믿고 따라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콰드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스가 바로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스녹이 미스릴을 둘렀고 라일라와 엘레나가 지팡이를 들었다. 요하임도 혹시나 하는 상황에 바로 손목을 그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크가 살짝 눈동자만 아래로 내렸다. 컨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반쯤 오므려져 책상을 파고들어 있었다. 부스러진 나뭇조각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툭툭 튀어나온 게 보였다.

    지크는 다시 컨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컨델의 얼굴은 여전히 감정이 없어 보였다.

    “이런, 보기보다 힘이 강하시군요, 이시드 씨. 책상이 무척 비싸 보이는데 아깝게 됐습니다.”

    “…….”

    “그런데 왜 흥분하셨습니까? 혹시 루브렌터 양의 최후를 상상하니 슬품이라도 차오르셨나요? 에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지크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여자, 동정의 가치도 없잖습니까. 망가진 책상만 아깝게요.”

    “…….”

    컨델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손가락이 책상에 조금 더 파고들었을 뿐이다.

    그 모습을 지크는 흐뭇하게 지켜봤다. 조금씩 보이는 그의 옆얼굴로 그의 감정을 파악한 라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성격 더러워.’

    라일라는 지크가 하고 있는 일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심술이다.

    심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게 괜찮을까 싶기도 하지만, 일단 그것의 연장선인 건 분명하다.

    ‘요하임 드라큘과 이블린 루즈를 습격했다고 이를 박박 갈았었지.’

    그들의 의심이 맞는다면 컨델 이시드는 시아 루브렌터와 사랑의 도피를 한 그 하인이다.

    그리고 연인을 잃은 분풀이로 습격 대상을 연인으로 하고 있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한데 그의 앞에서 사랑스러운 연인에 대한 모욕이 퍼부어진다면.

    ‘일단 효과는 있어. 효과는’

    완벽한 타인이어야 할 시아 루브렌터의 모욕에 컨델은 분명 분을 참지 못 했다. 그걸로 그에 대한 의심은 거의 확신으로 변했다.

    ‘그런데 웬만한 사람은 저렇게 못 할 것 같은데.’

    라일라가 더욱 놀라운 점은, 아마도 지금 상황은 지크의 심술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조금 더 화가 나신 것 같군요.”

    지크는 컨델의, 책상에 파고든 손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겹쳤다.

    “안 되죠. 이렇게 흥분을 하시면.”

    능글맞은,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듣는 순간 살의가 들끓을 것 같은 그런 목소리다.

    “필사적으로 참았어야지. 여기서 이렇게 힘을 드러내면서 흥분을 하면 ‘내가 범인이다’라는 소리밖에 더 돼?”

    숨죽인 웃음소리가 컨델의 고막을 때린다.

    “자, 참아. 우리도 대단한 증거는 갖고 있지 않아. 네 말대로 죽은 네 여동생과 괴물의 모습이 닮은 것뿐이야. 충분히 우연일 수 있지. 너 아직 범인으로 확정된 건 아니라니까? 아직 여기 버티고 있다는 건 계획이 완성된 건 아니라는 거잖아. 벌써 들키면 안 되지.”

    사람들이 놀랐다. 설마 용의자에게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지금껏 지크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요하임이 뭐라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라일라가 그를 말렸다.

    ‘이럴 때 스트레스 풀게 둬야지.’

    지크가 마왕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를 돕겠다고 한 약속은 유효했다.

    ‘그리고 지크가 먹잇감을 놓치진 않을 테고.’

    그건 이미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었다.

    “여기 카지노에서 뚜렷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는 널 오래 체포해 둘 수가 없어요. 그리고 너도 이미 여기저기 돈 먹여가며 최소한의 네 편은 만들어뒀지? 널 무죄방면 시켜 줄 순 없지만, 적어도 증거가 없을 때 함부로 고문을 하거나 오래 잡아두지 못할 정도로 힘을 써줄 수 있는 정도는 말야. 내가 또 너희 같은 놈들의 수법은 기가 막히게 알거든.”

    지크는 컨델의 손등에서 손을 뗐다.

    “그러니까 버텨 봐. 내가 아무리 시아 루브렌터를 욕하고 헐뜯고 짓밟아도 너는 절대 화를 내면 안 돼. 어디까지나 너는 그녀와 관련 없는 사람일 테니까. 관련 없는 사람의 욕설에 필요 이상으로 흥분을 하면 의심스럽잖아?”

    지크는 두 검지로 자신의 입꼬리를 짚었다. 그리고 쭈욱 밀어 올렸다. 지크의 입가가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어색한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까 웃어. 의심 사지 않게. 지금 당장.”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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