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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93화 (293/628)

제293화

“왕국 상황이요?”

“네.”

“그러고 보니 지크 씨는 스틸월 백작가 출신이셨죠?”

“그런 적도 있었죠.”

농담이 아니라 지크는 백작가에 대한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다.

지크가 백작가와의 인연을 끊어버린 건 회귀 전의 일이다. 게다가 회귀 후에는 한번 뒤집어버리고 나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제 와 그리움을 안는다거나 새삼 분노를 불태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면 어머니의 빚을 생각해 한 번 정도 도움을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음.”

이블린이 지크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이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닌가보군.’

“말을 하기 힘들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더 이상 스틸월 백작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 그 곳이 어떤 상황이 되었든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지크의 말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괜찮겠네요.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에요. 제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후계자 문제로 약간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정도예요.”

‘그레이그 놈이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군.’

예전 혈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하여간 무능한 놈.’

자신을 깔보던 동생 놈의 불행에 지크는 낄낄댔다.

‘그래도 한번 도와주기는 한다고 마음먹었으니 도와주러 가야하나?’

그러나 지크는 곧 부정했다.

‘아직 내가 도움을 줄 필요까진 없을 거야. 도움을 준다고 찾아가도 받아주지도 않을 테고.’

정말로 백작가가 휘청이는 그 순간이 아니라면 스틸월 백작은 절대로 지크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때나 나서야지.’

물론 스틸윌 백작가가 위험하다는 정보를 제때에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니, 아마 얻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러나 지크는 그 이상 해줄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스틸월 백작가가 사라진다면 그저 그뿐인 것이다.

지크가 스틸월 백작가에 대한 상념은 딱 거기까지였다.

지크는 이블린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주고 말을 돌렸다. 애초에 스틸월 백작가의 상황 때문에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다.

이블린도 지크 앞에서 스틸월 백작가의 부정적인 말을 계속하는 게 꺼려졌는지 지크의 말에 쉽게 따라왔다.

그렇게 크로뇽 왕국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을 할 때였다.

지크가 슬쩍 왕국의 귀족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보면 스파이 같은 짓이라고 착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크의 질문은 철저하게 가십 같은, 정치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것들뿐이었고 그의 유려한 언변도 더해져 그저 친분 있는 자들끼리의 잡담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귀족들의 가십에 대한 얘기를 평민과 나누는 것은 귀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크의 출신은 스틸월 백작가이고 라일라는 어느 나라에 투신하기만 하면 당장 귀족 작위를 받을 만한 실력 있는 마법사다.

때문에 이블린은 둘을 반 쯤 귀족처럼 여기고 있어 별다른 고민 없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지크가 본격적인 질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루즈 영애는 루브렌터 자작가를 아십니까?”

“루브렌터 자작가요?”

갑자기 튀어나온 귀족가의 이름.

“아, 생각나네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이블린이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화제를 꺼낸 것 치고는 이블린이 기억해내는 게 너무 빨랐다.

가능성은 두 가지. 평소에 친분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문의 이름을 말한 것만으로도 화제가 튀어나올 만큼 어떤 사건이 있었거나.

“한때 귀족들 사이에 화제가 됐던 가문이죠.”

지크가 눈을 빛냈다. 정말로 정확하게 짚은지도 모르겠다.

“그거 흥미롭군요. 어떤 화제였죠?”

“어머, 모르시나요? 그건 지크 씨가 가문에 있었을 무렵에 터진 사건일 텐데요? 사교계에서도 꽤 유명했고요.”

“가문에 있을 때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해서 말이죠. 대부분은 자택에 틀어박혀 단련만 하며 지냈죠. 그래서 사교계의 소문 따위는 잘 모릅니다.

“아….”

이블린이 다시 한번 지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지크의 표정 변화가 없자 살짝 안도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하긴, 그러면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화제가 됐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관심 없는 사람마저 알 정도로 커다랗게 불탄 화제도 아니니까요. 제가 잘 기억하는 것도 관심 있는 가십이어서 그랬고요.”

사교계에 흘렀다 사라진 수많은 가십거리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그게 뭐죠?”

“루브렌터 자작님의 딸 중에 시아 루브렌터란 분이 계셨어요.”

정확히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블린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사전에 이미 시아 루브렌터의 존재에 대해 들은 라일라 또한 귀를 세웠다.

“직접 뵌 적은 없어요. 다만 이야기는 좀 들었죠. 이미 몇 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진 분이에요. 하지만 그 때 사교계에 묘한 소문이 돌았어요. 그 분은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고요.”

“그럼?”

“사랑의 도피를 했대요.”

또 굉장히 재미난 이야기가 나왔다.

“사랑의 도피요?”

“네!”

확실히 이블린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다. 그녀는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루브렌터 자작가는 부정했지만 그 소식은 알음알음 전해졌죠. 물론 사실 확인이 어려우니 소문은 오래 가진 않았어요.”

“소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요.”

“사교계의 가십거리가 그렇듯 정확한 정보는 없어요. 그저 시아 루브렌터 자작 영애가 하인 한 명과 사랑에 빠져 도망을 갔다는 정도죠. 물론 거기에 살이 붙어서 이런 저런 얘기가 퍼지긴 했지만 제가 알기로 그나마 정확한 정보는 제가 말한 것 정도예요.”

“마치 소설 같군요.”

“그렇죠. 하지만 소설처럼 해피엔딩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다들 수근거렸어요.”

“왜 그렇죠?”

“루브렌터 자작님은 상당히 집요하다는 소문이시거든요. 게다가 예전에 몇 번 뵈었을 때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한 분이셨어요. 그런 분이 사랑의 도피를 한 자신의 딸과 하인을 그냥 둘 리 없죠. 아마 어떻게든 추적을 하셨을 거예요.”

“그것도 그렇군요.”

“게다가 현실적으로 하인과 귀족 영애가 도망쳐 제대로 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걸 생각하면, 안타깝긴 하지만 미래가 좋을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네요.”

그 후 지크는 이블린과 얼마 간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시간 좀 더 흐르자 이블린이 일어섰다.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인 것이다. 대화가 만족스러웠는지 그녀는 눈은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얼굴은 생생했다. 다음에도 이런 시간을 갖자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둘만이 남자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꽤 좋은 정보를 얻었네.”

“그래.”

지크의 대답처럼 이블린의 정보는 굉장히 유용했다.

“들키지 않도록 돌려서 떠보는 거라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은 정보가 들어왔어.”

“그거야 네가 돌려 말하는 게 무척 능숙했으니까.”

지식은 많지만 라일라는 지크처럼 능글맞게 원하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건 부족했다.

“부단한 노력과 재능의 산물이지.”

지크의 자화자찬을 라일라는 가볍게 무시했다.

“어쨌든 네 생각대로 이블린 루즈는 별 이상을 느끼지 못 한 것 같아. 네 계획대로 됐어.”

“이걸로 우리가 시아 루브렌터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는 걸 그렌 제너드는 모르겠지.”

이블린에게 대놓고 물어보면 될 것을 잡담을 하자며 빙빙 돌아간 이유가 이것이다. 요하임이나 이블린에게 시아 루브렌터란 존재에 대해 털어놓으면 바로 그렌에게 정보가 들어갈 것이고, 위협을 느낀 그가 선수를 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보를 빼낸다면 그렌은 지크가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 할 것이다.

‘요하임과 이블린을 속이는 게 되긴 하지만, 지금은 그렌 놈 뒤통수치는 게 우선이니까.’

지크는 예전에 얻은 정보와 이번에 얻은 정보를 나열해 봤다.

“사랑의 도피를 할 정도로 서로 사랑한 남녀. 범인은 아마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그리고 그림자 인간이 시아 루브렌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종합하자면 한 명의 범인이 나온다.

라일라가 말했다.

“시아 루브렌트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그 하인이 범인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거다. 하지만 지금 범인이 어떤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하긴, 지금 어디 있느냐가 중요하지. 출신이 출신인 만큼 신분을 속이고 있을 가능성도 높고. 생김새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 하지만 한 가지 가설이 세워지긴 했어.”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그렌 제너드가 준 단서는 확실하긴 할 테지만 분명 함정 같은 게 숨어 있을 거다.”

“네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래서 말이야, 라일라. 만약 네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쳐 봐. 그리고 널 쫓는 이가 자신의 사랑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 하고 집요하기까지 한 아버지야.”

라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상상이 안 가는데?”

“그래도 한 번 노력 해봐. 그 상황에선 당연히 신상을 숨겨야겠지.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 아버지도 당연히 예상을 할 거야. 신상을 숨기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해. 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떨어지진 않을 거야. 사랑의 도피씩이나 하는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을 순 없을 테니까.”

라일라는 생각에 빠졌다.

“사랑의 도피니까 둘은 같이 붙어 있어야 하겠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추적자에게 의심받지 않을 만한 일이라. 뒷골목에 숨어든다거나?”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변장 같은 것도 당연히 할 테고. 신분을 바꾸거나 하지는 못 하겠지. 도망친 하인과 귀족 영애가 평민 이상의 신분을 바로 취득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그 때 라일라도 뭔가 생각이 난 듯 지크를 쳐다봤다.

“…연인이 아닌 척을 한다거나?”

지크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둘이 떨어지진 않을 거야. 사랑의 도피까지 한 사이인걸. 그렇다고 부부라고 소개할 수도 없겠지. 그렇다면, 남매?”

지크가 정답이라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거기에 그게 여동생이 되었든 누나가 되었든 ‘병약한’이란 단어를 추가하면 더 좋지. 아무래도 귀족으로서의 행동거지가 베어버린 시아 루브렌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테니까. 최대한 외부와 단절을 시킬 거야.”

“만약 그 추측이 맞다면 연인이 있었던 사람을 조사하는 건 전혀 소용이 없었던 거네.”

“그래.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아닌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일 테니까.”

지크는 방 한쪽에서 서류더미를 가져왔다. 그건 예전에 살펴봤던 용의자, 하지만 최유력 용의자는 아닌 이들이 적힌 프로필이었다.

“용의자들을 조사할 때 간단한 가족 조사도 같이 했더라고.”

지크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그러더니 한 장을 툭 빼내 라일라의 앞으로 밀었다.

“이 사람은….”

“카지노의 주인이야.”

분명 삼백안에 날카로운 흉터가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가족 사항을 봐봐.”

라일라는 지크가 말한 부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족이 없었다. 하지만 과거에까지 가족이 없던 건 아니다.

“…여동생이 있었네?”

“그래. 그리고 그 여동생은 이미 죽었지.”

지크가 씨익 웃었다.

“이놈이 그 하인 놈이고 죽은 여동생이 시아 루브렌트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

“한 번도 애인을 사귄 적이 없다고 했지? 그건 애인을 사귀지 않은 게 아니라 여동생이 실제로는 연인이었기 때문에 외부에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도 있겠구나?”

“그렇지.”

지크는 손가락으로 카지노의 주인, 컨델 이시드의 얼굴을 쿡 찌르며 말했다.

“내일은 이 녀석과 이 녀석의 동생에 대해 조사해보자고. 녀석의 말대로 진짜 여자에는 관심이 없고 과거에 여동생을 잃은 사실이 있을 뿐인 카지노의 주인인지, 아니면 진짜로 연인들만을 콕 짚어 납치를 하고 있는 개자식인지. 윤곽이 나오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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