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사건은 수습됐다.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죽음을 맞았지만 그렇다고 애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번 습격으로 얻은 정보를 추려 범인의 진상에 다가가야 했다.
‘역시 눈을 둬야 할 건 내가 상대한 녀석이겠지.’
피해자 초상화에 없던, 가장 강력한 그림자 인간. 어쩌면 범인을 특정할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본 녀석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도시를 뒤져보면 아는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아마도 우리가 범인의 단서를 발견하기 전에 그렌 녀석이 범인을 찾아냈다고 할 가능성이 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지크가 고민을 하며 이런 저런 수를 짜내던 때였다.
“저, 지크 님.”
한스가 말을 걸어왔다.
“왜.”
“뭔가 조금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번에 마지막에 지크 님과 싸우던 그 괴물 말입니다.”
지크가 눈을 빛냈다. 조금 삐딱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고치고 어서 말해보라 턱짓을 한다.
“아무래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녀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런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본 적이 있는 건 맞아?”
“아무래도요.”
한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계속 헤집었다.
“이 도시에서 본 것 같냐?”
“아뇨. 잔말피는 아니고 여행을 떠난 후에 본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럼 스틸월 백작가에서 봤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스틸월 백작가라면 잔말피와 이웃이기는커녕 나라까지 다르다. 한데, 그곳에서 본 적이 있다니.
스틸월 백작가 때라면 지크가 도움을 주기도 힘들다. 시간상으로는 백작가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회귀를 해온 지크에게 스틸월 백작가에서의 기억은 굉장히 오래전의 기억이다.
‘설사 그때의 기억을 잘 떠올릴 수 있더라도 별로 도움은 되지 않을 거야.’
철저하게 백작가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지크는 자신의 공간에 처박혀 되도 않을 검술 수련만을 하며 지냈다. 사람을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일단 초상화를 완성하면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마. 얼굴을 다시 본다면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을 테니까.”
“…초상화?”
초상화란 단어에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한스가 생각에 빠졌다. 뭔가를 떠올리려는 것일까. 지크가 기대를 담아 한스를 쳐다봤다.
“아, 생각났습니다!”
한스가 외쳤다.
“분명 백작가에서 그 사람의 초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초상화? 직접 본 건 아니고?”
“네. 제가 백작가에서 교육을 받을 당시 여러 귀족분들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를 외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봤습니다.”
혹시라도 하인이 다른 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범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귀족가는 그들의 핵심 하인들에게 다른 귀족들 일가의 초상화를 모조리 외우게 한다.
‘이 녀석은 백작가에서 꽤 심혈을 기울여 교육을 시키던 놈이니 그 정도는 당연히 외웠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놈은 어떤 놈이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다.
“제가 본 초상화보다 조금 성숙해지긴 했습니다만, 시아 루브렌터 자작 영애 같습니다.”
“자작 영애라….”
옆 왕국의 귀족가의 영애가 어째서 잔말피에서 언급이 되는 것일까. 그것도 납치 사건의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로서 말이다.
“그 영애에 대해서 뭔가 더 알고 있는 건?”
“죄송합니다. 그 이외는 잘 모릅니다. 그냥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난다 하더라도 무례를 범하지 말라고 배운 게 전부여서….”
‘하긴, 녀석이 한창 일에 대해 배우는 와중에 끌고 왔으니.’
하지만 저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게다가 지금 그의 곁에는 시아 루브렌터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있지 않은가.
“잘 했다. 충분히 도움이 됐어.”
“네!”
도움이 된 것이 기쁜 것일까. 한스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 * *
습격 이후에도 회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 모두 습격 한번 받았다고 겁을 먹고 회의에 나오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범인을 기필코 잡자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때문에 회의의 열기는 훨씬 강렬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거 또 저러네.’
지크는 그렌이 라일라에게 말을 걸고 있는 상황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는 아니다. 그렌이라고 회의에 관한 일만을 말했던 건 아니었다. 간간이 사적인 잡담을 했다. 지크에게 말을 걸기도 했었다.
그러나 습격 이후로 라일라에게 말을 거는 빈도가, 미묘하지만 조금 더 많아졌다.
‘관심이 생겼나?’
라일라의 외모를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다. 그 어떤 남자라도 쉽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그녀의 외모였다.
‘하지만 질문이 무슨 호구조사 같단 말이야.’
은근슬쩍 라일라의 태어난 곳이라거나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고 있다. 보통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묻는 건 다른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라일라는 그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대답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렌은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요하임과 그렌이 숙소를 나갔다. 이블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지크의 방에 남아 있는 라일라에게 지크가 말했다.
“우리 천재 마도사께서 또 불쌍한 남자 하나를 낚았군그래?”
“헛소리하지 마.”
라일라의 반응에 지크가 낄낄댔다.
“하지만 은근슬쩍 그 녀석이 너한테 말을 거는 빈도가 는 것도 사실이지.”
라일라는 조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지크처럼 그렌을 심히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크와 같이 다니면서 지크의 부정적인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없어 그녀도 나름 그렌을 의심하곤 있었다. 게다가 논리를 떠나 지크가 싫어하는 자가 아니던가.
보통 자신과 친한 사람이 격렬히 싫어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그다지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라일라가 그렌을 보는 시선은 딱 그것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렌과 엮이길 상당히 꺼려했다.
‘설마 그놈, 라일라를 노리기 시작한 건가?’
라일라를 슬쩍슬쩍 놀려대면서도 지크는 생각했다.
‘녀석의 목표라고 의심된 엘레나가 이쪽으로 들어왔으니까. 만약 엘레나의 대체 동료를 찾겠다라고 생각하면 얼추 말이 되긴 하지.’
라일라의 미모와 실력을 생각하면 몇 번 찔러 보는 것쯤은 충분히 시도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럼 뭐 하러 과거를 묻는 거지? 무슨 회귀를 한 번 더 해서 초반부터 꼬시려는 것도 아니…!’
지크의 움직임이 멎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치며 방금 떠오른 상념을 되새겼다.
‘회귀를 한 번 더 해?’
그렌이 회귀를 했을 거라는 의심은 해 봤다. 아마도 지크와는 다른 시간대에서 회귀를 했을 거라고 짐작도 해 봤다.
‘그런데 내가 회귀를 한 번만 했다고 해서 그놈도 한 번만 했으리란 법도 없잖아.’
지크는 라일라를 쳐다봤다. 지금껏 라일라가 주장해 온 미래의 기억들이란 걸 떠올렸다. 지크는 그것이 일종의 가능성이라고 봤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들도 지크가 기억하지 못하는, 회귀 전에 실제 일어난 일들이라면?
게다가 그렇다면 지크 자신이 꾸는 꿈조차도 의심스러워진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 소리로군.’
하지만 그 비웃을 소리를 지크는 몸소 체험했다.
‘만약 그렇다면 녀석은 대체 몇 번이나 회귀를 한 거지?’
세 번? 네 번? 아니 열 번, 스무 번일 수도 있고, 세 자리 숫자를 넘겼으며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회귀는 녀석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일정 조건하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건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나 확실한 건, 확실히 알 때까지는 그렌 제너드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한 고문 같은 건 못 한다는 거군.’
만약 녀석이 회귀라는 힘을 마음대로 다룰 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바로 시간을 돌려버릴 게 뻔하다.
‘젠장, 만약 그렇다면 나도 답이 없는데.’
지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회귀의 사기성은 회귀를 경험해 본 지크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지금 나이대의 자신과 회귀 후의 자신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회귀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엄청난 우위를 점하는 거지.’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지크는 암담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기려 이런저런 수를 써 봐도 회귀를 해버리면 끝이지 않은가. 게다가 회귀를 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전부 알아 대책을 세우기도 쉽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대적하길 포기했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상상한 일이 현실이 아니길 빌며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지크는 아니었다.
‘뭐, 그건 최악의 상황이고.’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지크의 취향이 아니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지크의 의심이 맞는다면 그렌은 그의 인생을 가지고 논 자 혹은 단체에 소속된 놈일 가능성이 높다.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지!’
그러나 심각한 위협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크는 그 정보를 찾을 만한 단서를 하나 알고 있었다.
‘클로원.’
아무래도 그 고대 제국에 관한 조사를 조금 빨리 해야 할 것 같았다.
“생각은 끝났어?”
지크가 결론을 내렸을 때 라일라가 물었다.
“대충은. 티가 났나?”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야 알지. 그래, 무슨 생각을 했어?”
아직 라일라에게 회귀에 관한 건 숨기고 있었기에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꿈에서 언급된 마왕이 라일라라는 의심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렌 그놈과 클로원의 연관성에 대해서.”
때문에 사실의 일부만을 말했다. 라일라는 별 의문을 갖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크 씨, 저 이블린이에요.”
“들어오시죠!”
지크가 일어나 이블린을 맞았다. 라일라도 지크를 따라 일어섰다.
이블린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라일라 씨는 벌써 와 계셨군요. 아니, 아까 회의가 끝나고 계속 있으신 건가요?”
“이런저런 할 얘기가 있어서요.”
“역시나 서로 간에 무척 정이 많으시네요.”
묘한 웃음을 띠며 말하는 이블린. 라일라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머, 누가 뭐랬나요? 동료 간의 정이 보기 좋다는 뜻이었어요.”
이블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마 얘기가 시작되면 저 장난기가 계속해서 들이닥칠 것이기에 라일라는 골치가 좀 아팠다.
지크와 라일라도 자리에 앉고 본격적인 얘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절 왜 부르신 건가요, 지크 씨? 수다나 떨자는 얘기는 아닐 것 같고, 혹시 뭔가 단서라도 발견했나요?”
이블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뇨, 수다나 떨자는 게 맞습니다.”
이블린이 눈을 깜박였다.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이래저래 루즈 영애의 도움을 많이 받았잖습니까. 게다가 관광지에 와서 제대로 관광도 못 하고 계시니. 저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시니 간간이 이런 사담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좋아 보여 모시게 됐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이블린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제가 거절할 이유는 없죠.”
그리고 이블린이 활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의 수다가 시작됐다. 대화는 보통 지크와 이블린이 이끌어갔고 종종 라일라가 끼어드는 편이었다. 그녀는 라일라를 놀리고 한껏 웃거나 지크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 왕국 상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크가 슬며시 운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