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많군.’
지크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들의 숫자를 세었다. 보이는 것만 얼추 30 이상.
‘보이는 것만이 아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민간인을 제외하곤 깨끗했던 주변의 기척이 지금은 굉장히 많이 느껴지고 있었다.
불길하고 혼탁한 기척. 눈앞에 있는 그림자가 뿜어내는 기척과 같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 같다.
‘뭐, 됐어. 어차피 이 녀석들은 감지하기가 어렵다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고작해야 포위된 것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지만 지크에겐 회귀 전에 밥 먹듯 일어난 상황에 불과했다.
“지크! 이 녀석들 지붕에도 나타났어!”
라일라가 외쳤다.
“일단 엘레나도 데리고 내려와!”
“알았어!”
포위된 이상 지금은 뭉치는 게 낫다. 아무래도 전투를 하는 데 있어서 고지를 점거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
지크는 자신이 올라갈까도 생각했지만 선택은 라일라와 엘레나를 자신의 곁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발판이었다.
‘건물 위에서 싸우다가 괜히 무너지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져.’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집의 지붕이 격렬한 싸움을 견딜 리 만무하다.
이래 봬도 착한 일을 하려 하는 자신이다. 건물을 붕괴시키고 그 안의 일반인을 전투에 끌어들이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물론 전투가 거칠어지면 주변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그렌과 싸웠을 때처럼.
‘그럼 어쩔 수 없지.’
지크는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라일라가 엘레나를 안아 들고는 몸을 띄웠을 때였다.
그림자들의 습격이 시작됐다.
투웅! 투웅!
꾸물거리는 몸놀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림자들의 몸놀림은 날렵했다. 그것들은 몸을 날려 지크 일행을 습격했다.
지크, 한스, 스녹에게는 물론이고 허공에 떠올라 있는 라일라와 엘레나를 향해서도 마치 화살처럼 날아갔다.
후웅! 후웅!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빠르고 묵직한 검의 궤적이 허공에서 어지러이 얽혔다.
“꺄아악!”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그림자를 보며 엘레나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라일라는 그림자들을 흘끗 바라봤을 뿐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림자들이 그녀들을 덮치기 전, 지크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퍼엉! 퍼엉!
십수 개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튕겨나간다. 깨끗해진 하늘 위에서 라일라가 사뿐히 지크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어? 어어?”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주체 못 한 채 엘레나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스! 스녹! 너희는 거기서 협력해 싸워라!”
골목과 지붕이라는 고저 차가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가까이 있던 라일라, 엘레나와는 다르게 한스, 스녹과의 거리는 좀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지크는 둘에게는 그런 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의 훈련과 경험 덕에 둘은 자신과 떼어놔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내린 명령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포위되자마자 이미 등을 맞대고 그림자들을 상대하고 있던 둘이 크게 대답했다.
“라일라! 너는 멀리 있는 놈들을 잡아 죽여! 그리고 엘레나!”
“네, 네!”
“저기 있는 사람 좀 끌고 와라!”
지크가 가리킨 자는 그림자에게 습격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남자였다.
그는 지크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쓰러져 있었다.
보통 연인 중 한 명을 납치하면 다른 한 명은 고이 놓아두는 납치범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전투가 일어난 이상 범인의 자비에 기대 쓰러진 사람을 방치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범인이 그를 계속 방치한다 해도 전투의 여파에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엘레나가 당황했다. 사방에서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지크, 라일라와 떨어진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 엘레나를 향해 라일라가 말했다.
“우리를 믿으렴, 엘레나. 그리고 우리와 계속 같이 다니려면 이런 상황에도 적응해야 돼. 네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거야.”
엘레나가 라일라를 쳐다보다가 저 멀리 싸우고 있는 스녹을 쳐다봤다.
평소의 조금 어수룩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주변 대지와 꺼낸 미스릴을 사용해 능숙하게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엘레나가 지팡이를 꽉 쥐었다.
탓!
그녀가 뛰었다. 그림자들이 꾸물대며 다가온다. 당장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엘레나는 억눌렀다.
라일라에게 안겨 있던 때처럼 눈을 감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을 한껏 부릅뜨고 정면을 쳐다봤다.
투웅! 투웅!
그림자들이 엘레나 쪽으로 몸을 튕겼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후웅!
엘레나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뜀박질 때문은 아니다. 그녀의 곁으로 투명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쿠웅! 쿠웅!
라일라가 쏘아낸 압축 공기의 덩어리가 그림자들을 타격한다. 그림자들은 엘레나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갔다.
“후우! 후우!”
엘레나가 남자의 옆에 접근해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엘레나는 남성의 겨드랑이에 팔을 껴 들어 올렸다.
“이익!”
여성이, 그것도 항상 집에 처박혀 마법 공부만 한 그녀가 힘이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상대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당연히 엘레나로서 옮기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낑낑대면서도 남성을 질질 끌어 지크와 라일라가 있는 곳으로 오는 데 성공했다.
“헉! 헉!”
체력의 소모와 긴장감의 해소에 숨을 몰아쉬는 엘레나의 등을 라일라가 두드려줬다.
“잘했어.”
엘레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 지크가 한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너 체력이 너무 떨어진다. 나중에 나한테 체력 단련 좀 받자.”
잔말피까지의 여행길을 엘레나 때문에 쉬운 길로 왔다고는 하지만 한스와 스녹의 훈련은 꾸준히 계속됐다.
그 장면을 직접 본 엘레나로서는 당연히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녹에게 과거에 받았던 훈련 얘기를 들었던 터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지크는 다시 전투에 집중한 뒤였다.
쿠웅! 쿠웅! 쿠웅!
사방에서 몰아치는 그림자들의 공격을 지크가 모조리 튕겨낸다.
일격들이 묵직묵직하지만 지크의 방어를 뚫을 순 없었다. 동시에 지크는 검기를 날리길 멈추지 않았다.
쿠웅!
멀리 있는 그림자가 움직이다 지크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작이 굼떠졌다. 여성을 삼킨 그림자였다.
다른 그림자들과는 달리 도망가려는 녀석을 지크는 끊임없이 견제하고 있었다.
서걱!
지크가 그림자 하나를 베어낸다. 비명도 없이 두 쪽이 난 그림자가 허공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하지만 고작 하나를 해치웠을 뿐이다. 다른 그림자가 바로 빈틈을 메웠다.
지크는 묵묵히 계속 검을 휘둘렀다. 처리되는 그림자가 곧 하나가 둘이 되고 곧 셋이 됐다.
퍼엉! 퍼엉!
라일라가 쏟아내는 마법들은 연속해서 멀리 있는 그림자들을 공격했다.
아무리 뒷골목이라지만 그래도 도시 안이다. 때문에 거대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그녀는 물량으로 밀어붙였다.
지크의 엄호 속에 수도 없이 뻗어나가는 마법들이 그림자를 공격하고 일부를 터뜨렸다.
그녀의 곁에서 엘레나가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마법으로 도왔다.
한스와 스녹도 잘 싸웠다.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그림자들을 훑고 지나가고 미스릴들이 그림자들을 옭아맨다. 둘이 해치운 그림자들도 제법 많았다.
지크 일행이 승리하는 건 시간문제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림자들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스윽!
그림자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도망가려던 하나의 그림자도 여성을 토해내고 다른 그림자들에 합류했다.
라일라가 그것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도망가려는 건가?”
“아니야.”
냉정하게 부정한 지크가 그림자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지크의 뒤를 이어 다른 일행도 공격을 계속했다.
그림자 일부가 튀어나와 지크 일행의 공격을 육탄 방어를 했다. 지크일행의 공격이 일순 주춤했다.
그 틈을 타고 그림자들이 몇몇 곳으로 모이더니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이 점점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마치 웅크린 사람이 서서히 일어서는 것처럼 길쭉해지더니 팔과 다리 같은 부분이 돋아났다.
검은색 일색이었던 그것들에 점점 다채로운 색이 출현했다.
“얼씨구?”
자신을 막아서는 그림자 하나를 베어낸 지크가 그 모습을 봤다.
어느새 그림자는 완연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하고 피부색이 조금 어두웠지만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원래의 모습이 설마 그림자 괴물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라?”
그것들의 얼굴을 확인한 지크가 놀랐다.
“저것들, 설마….”
그 순간, 그림자 인간들의 시선이 지크에게 향했다. 지크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어느새 접근한 그림자 인간의 주먹이 지크의 검과 충돌했다.
“큭!”
지크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충격이 지금까지와 달랐다.
‘강해졌어!’
그의 옆을 지나 라일라에게 향하려는 그림자 인간에게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그림자 인간이 몸을 숙여 피했다. 지크는 다리를 들어 녀석을 걷어찼다.
쿠웅!
지크의 정강이와 그림자 인간의 팔뚝이 충돌했다. 그림자 인간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들 강하다! 정신 바짝 차려!”
지크가 일행에게 외쳤다. 다행히 한스와 스녹은 갑작스러운 적의 강화에도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들이 강해졌다는 게 아니었다.
“지크! 이 녀석들 얼굴이!”
“나도 알아!”
라일라의 외침에 지크가 대답했다.
콰앙!
다시 한번 지크와 그림자 인간이 충돌한다. 지크는 그림자 인간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와 싸우고 있는 녀석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는 다른 그림자 인간들도 전부 그랬다.
만나 본 적은 없다. 그저 초상화로만 봤을 뿐.
‘이번 납치 사건의 피해자들!’
그림자 인간들은 그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피해자 본인이야?”
라일라가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피해자 본인이라면 공격하기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연관은 있겠지만 피해자 본인은 아닐 거다. 오히려 반대야. 이걸로 피해자들이 죽었을 확률이 훨씬 높아졌어.”
피해자의 가족과 연인들은 피해자들이 아직 살아 있길 간절히 원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희망 전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크도 그 희망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피해자들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지크의 경험상 아마도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콰앙! 콰앙!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하나하나는 감당할 만하다. 그러나 역시 무리로 모이니 조금 힘겨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까 그림자 형태 때보다 수는 줄었지만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지크는 감각을 펼쳤다. 대피를 끝냈는지 가까운 주변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어이!”
지크가 크게 일행을 불렀다.
“주변에 사람 없다! 주변 건물 부셔도 되니까 전력으로 조져!”
힘 조절을 하기엔 힘에 부친다. 게다가 녀석들의 능력 상승에 껄끄러운 걱정 하나가 떠올라 버렸다.
‘만약 범인이 우리가 자기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꼬워서 이 녀석들을 보낸 거라면, 이 녀석들과 같은 놈들이 요하임과 이블린에게 갔을 수도 있어.’
지크가 윈두르에 마력을 힘껏 실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도시 뒷골목에 거센 검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