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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86화 (286/628)

제286화

회의에 참가자 중 그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크와 라일라뿐. 요하임과 이블린은 그렌을 처음 만나는 사이다.

요하임이 자리에서 일어서 그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요하임 드라큘 백작이오. 얼마 전에 한 번 뵀었지.”

지크에게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요하임은 그렌에게 반존대를 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는 엄연히 신분제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요하임이 지크에게 극존칭을 쓰는 건 어디까지나 지크가 그에게 엄청난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평민에게는 반존대도 필요 없지만 그렌은 평범한 평민이 아니었다.

“지크 님과 같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고 들었소.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부탁드리오.”

“저야말로 백작님께서 여러모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렌의 태도는 무척이나 예의 있었다. 자신을 낮춰 상대의 신분에 대한 존중을 보이되 과하지 않아 비굴해보이지 않는다.

그렌의 태도에 요하임이 가볍게 감탄했다.

“이블린 루즈에요. 모자란 힘이지만 다른 분들과 협력을 하고 있죠.”

“그렌 제너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참고로 루즈 영애는 옆 나라 루즈 후작가의 영애요.”

“그렇습니까?”

요하임의 설명에 그렌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이블린의 정체를 처음 알았다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지크는 묘한 감정을 안은 채 쳐다봤다.

‘저렇게 셋이서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회귀 전에 지크와 요하임, 이블린은 마왕과 그 부하로서, 그렌은 용사로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워댔다. 그리고 결국 요하임과 이블린 그리고 지크마저 그렌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한데 지금 그들은 협력을 하기 위해 손을 맞잡고 있다.

물론 지크 자신은 그렌을 의심스럽게 보고 있고 그렌도 지크의 의심처럼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의 장면의 특이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었다.

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서로의 자리에 앉았다.

“일단 제너드 씨에게 저희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죠.”

지크가 종이 몇 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사건의 발생 날짜와 사건이 발생한 장소, 피해자들의 정보, 그리고 그들이 알아낸 범인의 단서에 대해 쓰여 있었다.

그러나 범인의 단서에 대한 정보는 다른 정보들에 비해 무척이나 빈약했다.

그렌은 그 정보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밝혀진 정보는 얼마 없군요.”

“부끄럽게도 말이죠.”

요하임이 멋쩍어 했다.

“아뇨,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따지자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제 방해로 무산되지 않았습니까. 부끄러워하려면 제가 해야죠.”

그렌의 목소리에서 미안함과 죄책감이 극명히 드러났다.

‘지금까지 이상한 점은 없군.’

그렌은 선량하기 그지없는, 지크보다 훨씬 더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의 모습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지크의 의심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나 지크는 그 모습에 별 감흥이 없었다.

‘정말로 위선자라면 전세계를 속인 놈인데 고작 이 정도 일로 본모습을 드러내진 않겠지.’

오히려 여기서 기분나빠하며 날뛴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렌도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가 낸 정보는 지크 일행이 갖고 있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로 그렌을 욕하지 않았다.

도시의 지원을 받아 단체로 움직이는 지크 일행과 일개 개인인 그렌은 아무래도 정보를 얻는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면 그렌은 이 도시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라는 전력은 분명 도움이 될 터. 그 때문에 다른 이들도 그렌의 합류를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회의는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커다란 테이블에 사건이 일어난 곳이 표지된 도시 지도를 펴놓고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는다.

“사건 장소는 뒷골목이나 그 근처 같습니다만 지역에 대한 통일성은 없군요.”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하나하나 짚어보던 그렌이 말했다.

“그렇죠. 도시 전체를 제집인 양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짝이 없는 녀석이죠. 쓰잘데기 없이 말이죠.”

지크가 대꾸했다.

그렇게 몇 마디가 더 오갔다.

“제너드 씨는 이번 범인이 어떤 인물인 것 같습니까?”

지크가 물었다.

“아직 모인 정보가 얼마 되지 않아 확실히 말할 순 없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제너드 씨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부담갖지 말라는 듯 지크의 어조는 평온했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뿐이다. 지크는 그렌의 말을 주의 깊게 듣기 위해 귀를 세웠다.

“그럼 몇 가지.”

그렌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입을 뗐다.

“일단 이 도시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특히 뒷골목을요.”

그렌은 사건 현장이 표시된 곳을 툭툭 짚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뒷골목, 혹은 뒷골목 입구 어귀입니다. 아마도 납치한 사람을 눈에 띄지 않게 옮기기 위해서일 겁니다. 복잡한 뒷골목을 도주로로 사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거고요. 예전 범인을 봤을 때, 그림자 같던 범인의 모습을 보면 뭔가 특수한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들도 추측하던 바였다.

“그리고 뒷골목에서도 상당한 거물이거나 혹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건 현장이 도시 전체니까요. 아무리 뒷골목에 익숙한 사람이라지만 이렇게 도시 전체의 뒷골목에서 사건을 일으킬 만큼 익숙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개인의 범죄라면 힘들죠.”

“이 사건이 집단의 사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집단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집단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뒷골목을 이렇게 도시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거든요. 도시의 뒷골목은 도시에서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할 텐데요?”

그렌이 요하임을 향해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다면 집단이라도 뒷골목과 연관이 많은 범죄조직 같은 곳이 유력하겠군.”

“동의합니다.”

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봐야합니다. 보통 사건은 해가 진 후부터 늦은 밤까지 일어납니다. 이 시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만약 집단이라면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만….”

“지크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집단을 이끄는 혹은 집단과 연관이 있는 개인의 범행이라면 또 모르죠.”

“그것도 그렇군요.”

“그리고 아마도 연인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역시 연인만을 표적으로 삼는다는 특징 때문입니까?”

“그렇죠. 뭔가 목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연인 중 한 명만을 납치한다는 게 너무도 의아합니다. 제 견문이 짧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을 가진 납치는 보통 아이들 같은 존재들이나 남성, 혹은 여성 같은 특정 성별을 노리는 데 무조건 연인 중 한 명을 납치한다? 아무래도 특별한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범인의 심리 때문이라고 보는 게 좋겠죠.”

“그래서 연인을 잃어버린 사람이 질투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질투가 납치의 원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납치 대상의 선정에 연인에 대한 질투가 연관됐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지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고 빙긋 웃었다.

“흥미로운 의견이었습니다. 저희가 나눴던 생각과 비슷한 면도 꽤 많군요.”

“아무래도 누구나 한 번 쯤은 할 법한 생각이니까요.”

“그래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의견에 대한 설득력은 높아지니까요. 아무튼, 오늘은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크씨.”

지크와 그렌이 악수를 나눈다. 그렌은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제너드씨의 생각은 저렇군요.”

“우리와 그다지 다를 게 없네요.”

요하임과 이블린이 대화를 나눈다. 이미 그렌이 내놓은 의견은 그들도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다.

“하지만 집단의 사건이라고 한 건 꽤 흥미로웠습니다. 그림자 같은 범인의 모습 때문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일단 서로 간에 겹치는 의견을 중점적으로 범인을 찾아보도록 하죠. 무턱대고 사람들을 조사하느니 그게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지크 씨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루즈 영애는 어떻습니까?”

“저도 이의는 없어요.”

그들은 범인에 대한 의견을 도시에 제출해 관련 사람들을 조사해달라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회의는 끝났다.

요하임과 이블린이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라일라는 지크의 곁에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숙소에 부탁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노곤함을 달래던 지크가 라일라를 향해 물었다.

“그렌 제너드에게서 좋은 의견은 빼냈어?”

“어느 정도는.”

“어? 정말로?”

라일라가 놀랐다. 그렌의 말을 들은 건 그녀나 지크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녀는 그렌에게서 뭔가 유의미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이다.

“어떤 정본데?”

“너도 들었잖아. 녀석이 했던 말. 도시의 뒷골목을 잘 알고, 단체이거나 단체를 이끄는 수장, 거기에 연인을 잃어버린 놈.”

분명 라일라도 들은 정보다. 그러나 라일라는 해답을 얻었다는 환희는커녕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정보라고?”

“그럼. 아주 훌륭한 정보지.”

“그저 누구나 알 정보를 읊은 게 전부잖아. 이미 대부분은 우리도 추측하던 정보였고.”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라일라. 정보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도 중요해.”

지크가 맥주잔을 빙글빙글 돌린다. 잔 안에서 맥주가 천천히 회전했다. 그 모습을 즐기더니 쭈욱 들이킨다.

“캬아~!”

탄성을 내뱉고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다.

“네 기억 속에 그렌 제너드란 녀석은 어떤 녀석이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일라가 조금 당황했다.

“그, 글쎄? 성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강대한 마왕과 마인들에 대적한 영웅?”

“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네.”

지크가 팔뚝을 벅벅 긁었다.

“아무튼 그 녀석이 마인 시대 때 마왕과 마인을 척살하는 놈으로서 유명하지만, 상황 판단과 추리 능력으로도 상당한 평가를 받았어. 특히 조그마한 단서만으로도 숨어있는 마인들을 찾아내는 분석 능력과 직감은 알아줬지. 녀석이 의심스러운 지금은 쇼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 그렌 제너드가 아까 내뱉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지크가 안주 하나를 집어먹으며 태연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라일라는 지크처럼 태연하게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들은 지금 범인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얻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자, 잠깐! 그래도 거기에 거짓말을 섞을 가능성이 있잖아!”

“물론이지. 하지만 그래도 많이 섞진 않았을 거야. 녀석이 거짓말을 했다면 범인에 대한 정보를 잘못 판단한 것이고, 그렇다면 뛰어난 상황판단과 분석능력, 직감이란 이미지는 반감될 테니까.”

“…너는 그렌 제너드가 그런 이미지까지 계산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라일라는 할 말을 잃었다. 너무 간 생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지크는 단호했다.

“내 의심이 맞다면 그 놈은 자신의 용사 이미지를 위해서 마인을 만들어내는, 나조차도 범접 못 할 골 때리는 미친놈이야. 그런 녀석이라면 그 정도 행동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그럼 그렌 제너드가 말한 정보 대다수가 사실이란 말이지?”

“그래.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번에 그렌 제너드의 정보는 다 사실이 아닐까도 의심 중이야.”

“그러면 그렌 제너드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잖아. 우리가 먼저 범인을 찾아내 버리면 그 녀석에게도 안 좋지 않아?”

“물론이지. 그러니까 아마 범인은 녀석이 말한 범인상에는 다 들어맞지만, 뭔가 특정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을 거야.”

지크는 싸늘하게 빈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걸 찾아야 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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