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그렌과의 충돌 이후로 지크 일행은 계속해서 범인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꼬리가 밟힐 만한 실수는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항변이라도 하듯 범인은 지크 일행의 눈에 띄지 않았다. 스녹과 엘레나를 미끼로 던져놔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범인도 그 정도까지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피해가 멈춘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경각심이 들었는지 빈도가 줄어든 감은 있지만 사건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지크는 이른 아침부터 어딘가로 향했다.
“어딜 가는 거야?”
라일라가 조금 피곤한 목소리로 묻는다. 혼자 나가는 지크를 발견하고 산책 겸 해서 따라붙은 그녀다. 지크는 그녀를 막지 않았지만 목적지만큼은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었다.
라일라의 말에도 지크는 이렇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러.”
이 도시에 지크의 친구가 있었던가. 아니, 지크에게 친구라고 칭할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아한 일이다.
‘저 성격에 친구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라일라가 나쁜 건 아닐 것이다.
지크가 멈춰 선 건 어느 한 숙소였다. 지크 일행이 머무는 숙소보다 격은 조금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건물 크기, 인테리어, 입지 등등을 살펴보면 이곳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고급 숙소였다.
‘돈 많은 친구?’
지크의 친구라고 하기에 막연하게 건들거리는 양아치 같은 놈을 생각했지만 의외로 재산이 많은 친구인 모양이다.
‘아니면 돈 많은 양아치인가?’
라일라가 황금을 뿌리며 사람들을 핍박하고는 킬킬 웃는 사람을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구, 굳이 불러달라고 할 필요도 없네.”
숙소의 정문을 열고 나오는 누군가를 본 지크가 반가워했다.
지금 나오는 사람이 지크의 친구인 모양이다. 라일라는 호기심에 지크의 친구라고 하는 작자를 자세히 살폈다.
“…어?”
라일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의문성이 터졌다. 지크가 친구라고 하는 자는 라일라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 뜻밖이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지크와 친분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
상대의 심정도 라일라와 비슷한 모양이다. 숙소를 나서는 그의 눈이 지크에게 못 박혀 커졌다. 몸이 굳어버린 듯 입구를 딱 막고 섰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문을 막고 서면 안 되지.”
갑자기 입구가 막혀버리자 그를 따라 나오려던 여성, 라라가 문 앞에서 그를 앞으로 밀어냈다. 문 앞에서 굳어버린 그, 그렌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지크에게 못 박혀 있었다.
“대체 왜 그…!”
그렌에게 불만을 터뜨리려던 라라도 지크를 발견했다. 그녀도 놀랐다.
“어라? 분명 저번에 그….”
“네, 맞습니다. 자기소개는 예전에 했었죠? 기억하지 못하시면 다시 한번 해드리죠.”
“아, 아뇨. 기억해요. 지크 씨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라라 브라우닝 씨라고 하셨죠? 한스에게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대화를 나누고 있기는 하지만 라라는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몇 번 대화를 나눠본 한스와는 달리 지크를 대하는 건 꽤 어려웠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다지 좋은 만남이 아니었고 저번에는 아예 그렌과 한판 맞붙었다 하지 않는가. 그렌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두들겨 팬 사람을 어떻게 좋은 눈초리로 볼까.
하지만 그녀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지크의 표정 때문이었다.
너무도 해맑고 친근하다. 첫 만남 때부터 트러블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정말로 대놓고 한판 붙은 상대와 그 일행을 대하는 자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무슨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라일라가 지크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설마 친구라고 하는 게 이 사람들은 아니겠지?’
지크는 그렌과 라라, 특히 그렌과는 절대 좋은 사이가 아니다. 라일라는 뭔가 오해가 있거나 혹은 지크의 친구를 만나기 전의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일라의 인식과는 다르게 지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렌에게 다가갔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 네.”
그렌도 당황했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이야, 멀쩡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아무리 오해를 했다고 해도 저번에 너무했지 않나 죄책감이 들었거든요.”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투다. 라라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감이 서렸다. 하지만 그렌은 쓴웃음을 지을 뿐,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게도 제법 좋은 교훈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 숙소에 뭔가 볼일이 있으신가 보죠?”
“그렇죠. 정확히 말해서는 당신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제게요?”
혹시 저번의 다툼으로 뭔가 시비거리를 가져온 것일까. 그러나 지크의 태도나 지금의 언행을 보면 그런 것 같진 않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연쇄 납치 사건의 범인을 쫓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단서는 찾았습니까?”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렌이 의심스럽게 묻는다. 지크는 여전히 친근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당신에게 협력을 구하려고 해서 말이죠.”
“협력이요?”
그렌은 물론 라라와 라일라도 놀랐다. 특히 라일라의 그것은 놀람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혹시 지크가 요 근래 범인을 잡지 못해서 혹은 어떤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자기 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지크가 맞는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라일라가 알기로 지크가 현재 가장 싫어하고 꺼림칙해하는 상대가 바로 그렌 제너드다. 헌데, 그가 스스로 그렌에게 협력을 구하다니.
“…갑작스럽네요.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물론 그럴 겁니다. 우리가 사이 좋은 편도 아니고 말이죠. 엄밀히 말하면 껄끄러운 쪽에 가깝죠.”
“…….”
그렌이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긍정의 의미란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굽니까.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아닙니까? 정의로운 카르위먼에게 선택받은 자들 말입니다. 그건 곧 우리가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되죠.”
라일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아가며,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지크의 뒤통수를 쳐서 정상으로 돌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크의 말은 계속됐다.
“서로 성향과 생각은 다르지만 적어도 더 이상 선량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과거의 원한은 잠시 내려놓고, 맞지 않는 성향도 잠시 미뤄둔 뒤 협력을 해서 당장 그 범인 놈을 잡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감동받아도 이상할 것 없는 아니, 지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해했다.
그러나 지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렌이 조금 망설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자 지크가 다시 말했다.
“뭘 망설입니까? 정의로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면 바로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만….”
“그럼 망설일 것 없죠.”
지크가 그렌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누가 보면 한 20년쯤은 친분이 있는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렌이 목을 옆으로 뺐다. 누가 봐도 지크를 껄끄러워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차마 지크를 밀치진 못했다.
“…협력이라면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저번에 말했다시피 저는 이 사건을 전담하는 분과 친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영주님과 시장님의 지원을 받고 있죠. 매일 저녁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 교환과 회의를 하는데 그곳에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분이라 함은….”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을 겁니다. 저와 같이 있던, 고급스러운 갑옷을 걸치고 있던 젊으신 분 말입니다. 그분이 드라큘 백작님이시죠.”
“백작님이요?”
그렌은 놀란 척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복잡하게 셈법을 굴렸다.
“그렇죠. 당연히 지원도 해드릴 겁니다. 혼자서 쫓는 것보다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협력을 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렌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입을 열었다.
“…지크 씨의 말이 분명 일리가 있군요.”
“그렇죠! 저는 헛소리는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무의식적으로 지크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싶었던 라일라지만 극한의 인내를 통해 다행히 입 밖으로 내뱉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서로 간에 어떤 일이 있었든 일단 피해가 퍼지는 것부터 막아야겠죠. 협력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너드 씨.”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얼핏 보면 서로 간의 신뢰를 나누는 것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속내가 어떤지는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알 것이었다.
* * *
“무슨 꿍꿍이야?”
그렌과 협력 확인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라일라가 지크의 팔을 잡고 물었다.
“뭐가?”
“방금 그렌 제너드와 나눈 대화 말이야.”
“아, 내 오랜 친구와 나눈 대화 말이지?”
“친구? 친구라고? 원수가 아니고?”
“뭘 그리 꽉 막히게 살아? 아무리 내가 개같이 싫어하는 놈이라고 해도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친구가 대수겠어? 하늘 같은 은인 대접도 해 줄 수 있지.”
지크가 낄낄댔다.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크의 행동이 기가 찼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했다. 지크의 모습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의 것이었으니까.
“좋아. 네가 그렌 제너드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란 건 알았어. 그럼 그 이용가치는 뭐야?”
지크의 표정이 변했다. 똑같이 웃음기는 띠고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의 질이 달랐다. 방금 전에는 개구쟁이같이 활발한 웃음이었지만 지금의 웃음은 날카롭고 냉정하며 무자비한, 그런 웃음이었다.
지크에게 익숙해진 라일라도 한순간 소름이 돋았을 정도다.
“나는 지금 저놈이 마인들을 만드는 흑막이자 선인의 껍질을 뒤집어쓴 위선자라고 의심하고 있어. 너도 알고 있지? 지금의 계획은 그 가설 위에서 세운 거야.”
지크가 음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음습하게 말했다.
“마인을 만들고 그 마인을 자신이 죽여 명성을 드높인다. 만약 그게 녀석의 행동양식이라면 이번에 범인을 찾는다고 하는 건 그 행위를 위해서겠지. 아니, 찾는다고 하는 것도 웃겨. 녀석이 범인을 모를 리 없으니까.”
“그럼 왜 당장 범인을 처리하지 않는 거야?”
“더욱 극적인 때를 노리는 거겠지. 피해가 누적되고 도시가 공포에 잠기면 잠길수록 그걸 해결했을 때 녀석의 이름값은 더욱 높이 올라갈 테니까.”
“그런….”
정말로 더러운 이야기라 라일라가 혀를 찼다.
“그래서 끌어들였어. 녀석이 정말로 범인을 알고 있다면 그 정보를 캐내려고 말이지.”
“만약 거절했으면?”
“그래서 내가 몰아갔잖아. 정의니 뭐니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단어들을 내뱉으며 말이야.”
라일라는 들으며 소름이 짜르르 돌았던 지크의 말들을 기억했다.
“녀석이 진짜 착한 놈인지 아니면 위선자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착한 놈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협력하잔 말을 거절할 순 없거든.”
그제야 라일라는 지크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흐흐흐! 녀석의 정보를 토대로 내가 먼저 범인을 쳐 죽인다면 녀석이 얼마나 분해할까!”
낮은 웃음을 흘리는 지크에게서 나오는 음울한 기운에 라일라는 한 발짝 거리를 뒀다. 역시 지크는 적으로 돌리면 엄청나게 골치 아픈 인물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렇네. 알았어, 나도 도울게.”
“좋아, 그럼 그렌 제너드의 정보를 한번 탈탈 털어보자고.”
그렇게 둘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앞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입니다.”
“그렌 제너드입니다. 미력한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회의에 그렌 제너드가 참가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