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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84화 (284/628)

제284화

누가 보면 방금 전투의 앙금이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었다. 둘이 갖고 있는 상념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지크가 골똘히 생각했다.

‘여기에 그렌 제너드가 왔단 말이지.’

그저 우연히 온 것일까. 그럴 확률도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뭔가 목적이 있어 온 것이라면.

‘저놈의 정체를 까발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녀석이 자유롭게 나돌아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용할 게 있으면 이용해야 한다.

지크가 화해 주선을 선뜻 받아들인 다른 이유였다.

지크는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라일라와 스녹, 엘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크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던 그렌.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려 지크 일행을 쳐다봤다. 순간 그의 눈이 한 명에게 못 박혔다.

그건 무척이나 짧은 순간이었다. 그렌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 계속 관찰하고 있던 사람이라도 감각이나 눈치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렌은 흥미 없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마음은 겉모습과는 달리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엘레나가 왜!’

자신을 위해 지금쯤 열심히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할 그녀가 지크의 곁에 떡하니 있었다.

잘못 본 것일까. 지크 일행을 살짝 다시 한번 살폈다. 분명 그녀였다.

활발하게 이야기를 섞고 있진 않지만 그녀가 지크의 일행 안에 들어 있단 건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젠장! 또 변수가!’

그렇게 그렌이 마음속으로 온갖 쌍욕과 함께 고함을 지를 때였다.

“지크 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누군가 지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는 목소리다. 아니, 적어도 ‘이번’엔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다.

에스텔레이드를 들고 있는 지크의 동료의 목소리였으니까. 그렌이 그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뭐!’

그렌은 다시 한번 인상이 일그러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에스텔레이드를 강탈해 간 빌어먹을 녀석의 옆에 라라 브라우닝이 떡 하니 붙어 있었다.

“이제 오냐?”

헐레벌떡 뛰어오는 한스에게 지크가 말했다.

“도시 한쪽에서 굉장한 소란이 나 급히 달려왔습니다만, 혹시 범인을 잡았습니까?”

“아니. 범인을 만나긴 했지만 놓쳤다. 방해가 들어와서 말이야.”

지크가 그렌이 있는 쪽을 흘겨봤다. 그때 그렌이 자신들이 있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아챘다.

‘저 자식, 왜 이쪽을 노려보고 있지?’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그렌!”

한스의 뒤에서 뒤따라오던 여자 한 명이 그렌을 부르며 달려갔다.

‘라라 브라우닝.’

그렌의 동료다. 그리고 회귀 전, 방패로 우직하게 지크의 공격을 차단하던 자이기도 하다.

지크가 눈으로 한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도시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납치범에 대한 조사를 돕고 싶다 하길래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묘한 인연이다.

그렌과 라라가 뭐라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둘은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기분 탓일까. 둘 사이의 기류는 뭔가 어색해 보였다.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렌이 고개를 한번 숙이고 지크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뒤를 라라가 따랐다.

라라도 지크 일행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스 앞을 지나칠 때,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대접은 다음에 받아야 할 것 같네요.”

“얼마든지요. 가격이 높아도 상관없습니다.”

“기대되네요. 하지만 제 입맛은 그리 고급은 아니니 비싼 걸 사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라라는 다시 그렌에게 달려갔다.

“…꽤 친해 보인다?”

지크가 한스의 목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마치 커플을 보고 건들거리며 시비를 거는 양아치로 보여, 라일라가 어이없어했다.

“도움을 받은 이유로 나중에 밥이나 술 한잔 산다고 했거든요. 그것뿐입니다.”

“이야, 우리 한스가 이제 여자를 꼬실 줄도 아네? 많이 컸어.”

“그저 도움을 받은 대가를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 전 지크 님이 주신 수련을 소화하기에도 벅차요.”

“음, 그 마음가짐은 훌륭하다.”

지크가 한스의 머리를 흩뜨린다.

“그래도 한번 꼬셔 봐. 원래 그렇게 밥 한 번, 술 한 번으로 친분을 쌓아가다가 사랑이 싹트는 거야.”

“좋아하시는 분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게 뭔 상관이야. 막말로 결혼을 했어, 애가 있어. 좋아하는 사람? 그 대상을 너로 바꾸면 되지. 좋아! 이것도 교육이라고, 내가 네게 유의미한 조언을….”

“시끄러!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놈의 조언을 해주겠다는 거야!”

라일라가 타박하자 지크가 항변했다.

“그건 사람들이 단순히 내 데이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야! 원래 내가 하는 데이트란 건…!”

“됐고! 더 이상 할 일 없으면 어서 돌아가!”

라일라가 지크의 등을 밀어댔다. 지크는 투덜거리면서 발을 움직였다.

* * *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만났게 됐습니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그렌이 물어왔다. 라라가 되물었다.

“그 사람?”

“당신이랑 같이 다닌 사람 말입니다.”

에스텔레이드를 강탈한 빌어먹을 놈. 지금 그렌에게 있어 한스라는 존재는 지크보다 더욱 짜증 나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라라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도시에 연쇄 납치범이 돌아다니고 있다길래 협력했어.”

담담히 말하는 라라에게서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말 그대로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군요.”

그렌도 그 질문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는 태도로 넘겼다. 그러나 내심은 전혀 달랐다.

‘그놈이…!’

에스텔레이드를 앗아간 놈이다. 자신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를 빼앗아 간 놈. 그런 놈이 이제 라라에게까지 접근했다.

‘게다가 분명 녀석들의 집단에 엘레나가 있었어!’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농담이 아니고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대체 그녀가 왜 거기 있단 말인가.

오랜 세월 겪어 온 경험이 아니었다면 쓰고 있는 가면이 벗겨질 뻔했다.

‘지크 놈의 파티원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분명 지크 일원들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요하임 드라큘까지!’

변수. 그것도 정말로 지독한 변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을 가장 옥죄는 건 꼬일 대로 꼬인 변수가 아니었다.

‘에스텔레이드를 빼앗겼고 엘레나가 저 집단에 속해 있어. 그리고 레오나도 저 집단 안에 있었지. 거기에 비올루윈에서는 녀석들을 영웅으로 칭송까지 하고 있었어!’

다행히 레오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저 집단에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지금 같이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앞으로 가져야 할 ‘자신의 것’을 엄청나게 빼앗긴 것이 사실인 것을.

‘그것도 모자라 라라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건가!’

라라는 자신이 먼저 ‘선점’했지만 저 정도로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갔다면 또 모른다.

‘안 그래도 루벨라의 대체품도 성에 안 차는 판국에!’

엘레나와 레오나도 대체품으로 바꿔야 하다니!

“그런데 그렌, 어디 다쳤어? 몰골이 왜 그래?”

그렌의 엉망이 된 옷차림을 흘끗흘끗 보던 라라가 물었다.

“지크 씨와 잠시 다투게 됐어요. 서로 간의 오해가 생겨서요.”

“지크 씨와?”

지크라면 분명 한스가 모시던 사람이다.

라라가 그렌을 다시 한번 훑었다.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낭패를 본 기색은 역력했다. 그리고 아까 봤던 지크의 몸에는 별 싸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했다.

“네가 일방적으로 당한 거야?”

놀랍게 성장한 그렌의 실력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한데 그런 그렌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니.

“그렇게 됐네요. 역시 세상은 넓어요.”

표정을 씁쓸하게 웃는 낯으로 바꾼다. 그러나 역시 속내는 겉과는 딴판이었다.

‘개자식! 빌어먹을 지크 놈!’

옆의 라라만 아니라면 아주 박박 이를 갈았을 것이다.

치안대장에게 했던 변명과는 다르게 그는 분명 지크를 인식하고 공격을 가했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지크가 그림자를 쫓는 걸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때문에 지크가 덤벼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렌은 지금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그 지크인 만큼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도시의 치안대가 달려올 때까지는 충분히 방어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가 알던 지크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 실력이 무르익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를 받았으니만큼 도시의 치안대가 끼어들면 지크도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렌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그의 생각대로 지크는 도시의 치안대가 오자 순순히 물러섰다. 하지만 지크의 실력에 대해서는 완전히 오판했다.

‘아무리 변수가 있긴 했다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정도까지 실력 차이가 난다고?’

그렌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지크는 누가 봐도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렌에게 주먹과 발만으로 공격한 것이 그 여유의 증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검이 날아왔을 터.

그렌을 포로로 잡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나마 안면이 있다고 봐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렌에게는 지크와의 실력 차이가 중요했다.

‘영약을 먹었는데! 그 때문에 마력 컨트롤이 좀 힘들어졌다 해도 그걸 덮을 만큼 마력은 강해졌어! 게다가 녀석의 검은 에스텔레이드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토르니움을 든 내가 밀리다니!’

윈두르의 특별함을 모르는 그렌으로서는 무기의 성능도 자신이 압도적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아는 이맘때의 지크를 훨씬 초월한 실력.

그 잘못된 인식은 그렌 자신이 엉망으로 얻어맞는다는 결과로 나왔다.

거기에 화해의 표시로 악수를 나눌 때 자신에게 보내지던 지크의 거만한 시선.

그렌의 눈에 한순간 깊은 살의가 돋았다.

‘좋아, 지금은 넘어가자고.’

생각해보면 지크에게 당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고 그 더러운 기분이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새삼 발작할 것도 아니다.

‘녀석은 지금 이 도시에서 납치범을 찾고 있다고 했지.’

그건 그렌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변수 때문에 어그러진 계획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생각보다 뻗어나가지 못했다. 때문에 이곳으로 찾아왔다.

그 범인을 죽이기 위해서.

‘어차피 그놈의 성공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 마인 시대까지 살아남은 적이 거의 없어.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죽여서 내 명성을 높이는 데 사용해야지.’

익숙한 일이다. 게다가 마인 시대까지 살아남는다고 해도 어차피 자신의 제물이 될 놈이 아니던가. 조금 일찍 수확하는 것뿐이다.

다만, 여기에 지크가 끼어든 것이 의외일 뿐.

‘당장 지크 놈에게 복수할 순 없겠지.’

자신의 힘도 무르익지 않았고 준비도 안 됐으면 무엇보다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가볍게 엿을 먹여주는 건 괜찮아.’

그 거만한 시선을 다시 떠올린다.

‘이번 범인은 내가 죽인다!’

도시의 지원까지 받으면서도 자신보다 뒤처질 때 녀석이 어떤 심정을 가질까. 그렌이 속으로 음습하게 웃었다.

* * *

“꽤 즐거웠나 보네? 아주 즐겁게 패던데?”

“이야, 즐거웠지. 아주 환상적인 순간이었어.”

지크가 낄낄거리며 라일라의 말을 긍정했다.

“도와줄까 하다가 즐기는 것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 뒀는데. 괜찮지?”

“물론이지!”

그 판단 하나만으로 지크는 라일라가 그림자를 쫓지 않았던 걸 완전히 용서했다. 물론 한마디는 해둬야겠지만 그건 그저 조언일 뿐이었다.

“그래도 아쉽네. 범인을 잡았어야 했는데.”

자신의 실태도 있어 라일라는 퍽 아쉬워했다.

“뭐, 방해도 있었으니 이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해야지. 기회야 다시 한번 잡으면 되고.”

그리고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도 나타났지 않은가.

‘로브 놈들이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도시에 그렌이 나타난 상황이다. 당연히 조사를 해 봐야지.’

이번에 놈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크는 조용히 열의를 불태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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