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이 자식이 왜 여기서 튀어나와?’
반가울 리 없다. 애초에 좋은 인상을 가진 놈도 아니거니와 그렌은 지금 지크가 열렬히 의심하고 있는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렌도 지크만큼이나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그걸 대변하고 있었다.
‘설마 이 자식,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합법적으로 이 녀석을 후려 팰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정당하게 고문을 해 정보까지 뱉어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일단은 그림자가 먼저다. 지크가 그림자를 추적하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딜!”
후웅!
자신에게 날아오는 토르니움에 지크가 급히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콰앙!
다시 한번 폭음이 울렸다. 지크가 스산하게 그렌을 노려봤다.
“…야. 이게 뭔 짓이냐.”
“너야말로 어딜 도망가려는 거냐!”
“도망?”
지크는 싸움을 앞두고 절대 도망가면 안 된다는 멍청한 생각을 갖고 있진 않다. 오히려 나중에 힘 키워서 몇 배로 앙갚음을 하면 되지 고작 자존심 하나 지키자고 나중에 복수할 기회마저 날려버리는 그런 짓을 혐오하는 편이었다. 전략상 후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 자신이 불리할 때나 할 말이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자식에게 들을 말은 아니지.’
그것도 회귀 전에도 온갖 천재란 천재들은 모두 끌어모아 겨우 자신을 이긴 놈이 말이다.
지크가 슬쩍 골목 안을 쳐다봤다. 이미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다. 기척을 감지하려 해도 뚜렷이 뭔가 감지되는 것은 없다.
지크가 위를 쳐다봤다. 라일라가 허공에 떠 있다. 그녀에게 고갯짓으로 추적을 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렌을 가리켰다.
‘라일라의 시선도 그렌에게 쏠렸었군.’
놓친 것이다.
보통 한 명이 방해를 받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목표의 추적을 단념하면 안 된다. 라일라의 실수다. 하지만 지크는 이해했다.
‘라일라도 경험이 적으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분명 그렌의 방해가 원인이긴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지크의 기척에서 사라진 걸 생각해보면 그림자 자체가 은신에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 김빠져라.’
한숨을 한 번 쉰다. 사건을 해결할 단서를 눈앞에서 놓쳤다. 그것도 갑자기 들어온 방해 때문에.
지크가 그렌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살벌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응, 좋아. 날 방해한 적합한 이유가 없다면 밟아버리자.’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적합한 이유는 무슨. 애초에 내가 공격을 받았잖아.’
지크가 윈두르를 고쳐 잡았다.
‘그냥 밟자. 애초에 선빵 맞았으니 이유는 그걸로 충분해.’
안 그래도 그렌 제너드에게는 쌓인 게 많다. 물론 그것들이 모두 지크의 오해일 수도 있다.
‘근데 그게 뭐? 오해하게 만든 놈 잘못이지.’
“응? 그러고 보니 그 칼. 혹시 당신은…!”
그렌이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지크는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대답은 지금부터 할 행동으로 충분했다.
후웅!
윈두르가 공간을 내달렸다.
“뭣…!”
쿠웅!
토르니움이 윈두르를 막아섰다.
‘흐음, 토르니움을 상대로 칼질이라.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군.’
하지만 그런 감상에 잠긴 건 찰나보다도 더 짧은 시간이다. 답지 않은 감상을 날려버리고 지크는 우직하게 움직였다.
오로지 그렌을 밟기 위하여.
채앵!
지크가 힘을 줘서 토르니움을 튕겨냈다. 그리고 바로 검을 옆으로 눕혀 휘둘렀다.
“크윽!”
그렌이 급히 몸을 빼냈다. 윈두르가 추격한다. 그렌이 급히 토르니움으로 막아섰다.
콰앙!
다시 한 번의 충돌.
‘예전에 봤을 때보다 실력이 훨씬 좋아졌어.’
열이 받은 건 받은 거고 상대를 살피는 건 살피는 거다.
‘역시 후일 용사 칭호를 받은 녀석이긴 하군.’
다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녀석 마력이 왜 이 모양이야?’
검에 담긴 마력이 들쭉날쭉이다. 녀석의 마력 컨트롤은 절대 미숙하지 않다. 회귀 전은 물론이고 예전에 잠시 만났을 때도 분명 꽤 안정적이었다.
‘어디서 좋은 거 처먹었나?’
그래서 아직 그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거야 그렌의 사정이다.
콰앙! 콰앙!
지크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렌도 분전을 했지만 점점 그의 검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퍼억!
“커억!”
지크의 발이 그렌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렌이 신음을 흘렸다. 고통에 찌푸려진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어라?’
그 순간 지크는 선명한 고양감을 느꼈다.
‘왜 이리 기분이 좋지?’
방금 전까지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던 마음이 확 풀린다. 마치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진창길을 판석으로 예쁘게 포장하는 기분이랄까.
그렌이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두르는 게 보인다.
채앵!
지크가 윈두르의 나뭇가지 같은 검신으로 토르니움을 엮어 옆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렌의 팔도 같이 딸려 나가며 그의 상체가 환하게 드러났다.
지크가 주먹을 휘둘렀다. 목표는 그렌의 얼굴이다.
퍼억!
“크악!”
그렌의 얼굴이 뒤로 훅 젖혀졌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핫!’
지크가 속으로 폭소를 터뜨렸다. 살벌하게 검이 오가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바로 땅바닥에서 배를 잡고 굴렀을 것 같다. 그의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씰룩였다.
‘이야, 이거 재미있네!’
그러고 보니 회귀 전, 그렌에게 마지막 일격을 당하기 전에도 이 얼굴 한 번만 패봤으면 하고 이를 갈지 않았던가.
그 기회가 왔다.
이미 지크에게 놓친 그림자의 기억 따위는 날아가 있었다.
바로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그렌이 토르니움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직 윈두르의 날에 걸려 있다.
퍼억!
그렌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튀었다.
‘이가 튼튼하네.’
피 사이로 비춰지는 이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뭐, 못 봤으면 보면 되겠지.’
치아가 부러져 나올 때까지 얼굴을 후드려 패면 되는 쉬운 일이다. 지크가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역시 두 번은 몰라도 세 번까지 똑같은 공격을 허용할 그렌이 아니었다. 그가 토르니움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콰앙!
다시 한번 칼이 부딪친다. 그렌의 공격이 아까보다 살벌해졌다. 아무래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지크도 이 즐거운 기회를 쉽게 놓칠 생각이 없었다.
쾅! 쾅! 쾅!
두 개의 검이 계속 교차한다. 요소요소에 주먹과 발길질도 오고 간다.
하지만 분명 멍이 들고 피가 튀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으흐흐흐흐!’
다시 한번 그렌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지크가 속으로 옅은 웃음을 흘렸다. 묵직하게 꽂히는 감각이 너무 좋았다.
생각 같아서는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루 정도는 계속 팼으면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강대한 마력의 충돌로 이미 골목 주변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다. 벽면이 터지고 난간이 잘려나갔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게 느껴졌다. 그 만큼 두 사람의 힘은 강했다.
하지만 이곳은 도시, 그것도 한창 연쇄 납치 사건 때문에 경계도가 올라가 있는 곳이다. 당연히 그들이 일으킨 소란은 주변 치안대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멈춰라!”
병사들이 골목으로 들어가 지크와 그렌에게 창을 겨눈다.
지크가 검을 거뒀다. 그렌도 공격이 중단되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검은 여전히 지크를 향하고 있었다.
그렌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지크에게 군데군데 얻어터진 모습이 뚜렷했다. 잘생긴 얼굴은 여기저기 부어오르고 핏기까지 보인다. 뼈도 어디 상한 건지 걸음도 이상했다.
그 모습이 지크는 무척이나 후련했다. 아직까지 저 녀석을 후려친 주먹의 감촉이 짜릿했다.
‘오늘은 손 씻지 말고 잘까?’
그런 헛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극히 온화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지크의 내면과는 달리 바깥 상황은 진지했다.
“사정을 설명해라! 아니, 일단 너희들을 체포하겠다! 당장 무기를 버려라!”
지크와 그렌이 자신들의 말을 따르는 것 같자 창을 한 걸음 더 밀어붙인 병사들. 지크는 그들에게 품에서 패 하나를 던졌다.
“…이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자 현재 드라큘 백작님과 시장님을 도와 이번 연쇄 납치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지크라고 하오.”
지크가 던진 건 드라큘 백작을 통해 건네받은, 도시 치안에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종의 신분패였다.
“범인을 추적하다가 저 작자한테 방해를 받았소. 그러니까 체포는 저 작자만 하면 될 거요.”
지크는 벙찐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그렌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뭐라고?”
그렌이 뭐라 중얼거리긴 했다. 지크는 조용하게 방금 말을 다시 해줬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렌에게 상냥해도 될 것 같았다.
* * *
도시에서 일어난 강렬한 싸움. 뒷골목 일부가 파손되는 일이 있었지만 맞붙은 두 사람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정도의 피해만으로 끝난 것이 기적이었다.
요하임을 포함해 현재 사건을 조사하는 주도 세력과 많은 병사들이 사건이 일어난 골목으로 모였다.
치안대의 대장이 지크와 그렌을 번갈아가며 사정청취를 했다. 범죄 용의자들을 앞에 두고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치안대장이지만 이번만큼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한 명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자 귀족과 친분이 있는 자였고 다른 한 명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였던 것이다.
지크는 치안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렌을 공격한 이유에는 거짓을 조금 섞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범인을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안면이 있긴 하지만 그의 행동 자체는 범인을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추가했다.
그리고 그렌의 변명도 비슷했다. 뒷골목에 순찰을 돌고 있었는데 요새 도시에 유명한 연쇄 납치 범인 같은 그림자가 보였다 한다. 녀석을 쫓으려는데 갑자기 지크가 나타나 그를 그림자의 동료로서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안면이 있는 터라 얼마 뒤 적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그 때에는 이미 지크가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둘 다 신분도 확실하고 나름 이유도 있다. 조금 허술해 변명같이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고작 그걸로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를 추궁할 용기 따위 그에게는 없었다.
그렌이 모든 피해보상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자 그는 이 사건을 웬만하면 좋게 좋게 해결하고 싶었다.
“단순한 오해로 인한 충돌 같습니다.”
치안대장이 지크에게 말했다.
“그러니 두 분이 화해를 하고 넘어가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치안대장이 지크의 눈치를 봤다.
“그자는 뭐라고 합니까?”
“아, 그분은 충분히 화해를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오해를 해 죄송하다고 하시더군요. 모든 일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단 말이지.’
그렌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가 겸허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모든 대가를 자신이 감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렌을 의심하고 있는 지크는 그게 자신에 선량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한 연극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한테 손해는 없으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그렇게 합시다.”
그림자를 놓치게 한 원한은 이미 충분히 풀고도 남았다.
‘그래도 좀 아쉽네. 몇 대 더 후려 팼어야 하는 건데.’
적어도 하루 종일 정도는 계속 말이다.
하지만 일단 지금 사건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다. 현실과 타협을 해야 할 때였다.
치안대장이 화해를 주선한다는 명목으로 두 사람을 모았다.
지크와 그렌이 마주 선다. 포션을 사용했는지 그렌의 신색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진 못해 낭패를 본 흔적은 여전히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지크의 기분은 한층 더 좋아졌다.
“서로 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여기서 풀고 넘어갑시다.”
지크가 상쾌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렌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죠. 제가 오해를 해서 먼저 칼을 휘두른 게 잘못이니까요.”
“잘 알고 계시군요.”
“…….”
지크와 그렌의 악수는 짧았다. 곧 둘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