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스녹과 엘레나가 도시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을 때, 지크와 라일라는 둘이 노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지켜봤다. 만약 범인이 나타난다면 바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다만 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범인을 잡는 데 지크와 라일라 둘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라고 판단한 지크가 한스를 도시 조사로 돌린 것이다.
때문에 한스는 도시를 거닐며 혹시라도 수상한 것이 있는지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응?”
상업지구를 넘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작은 천으로 나온 한스가 의문성을 냈다.
돌을 잘 다져 정돈된 강변에는 역시 돌로 만들어진 다리 몇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중 하나에 한 명의 여성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저 여자는….’
다리 난간에 팔을 올리고 흐르는 천을 멍하게 쳐다보는 여성. 낯이 익은 여성이었다. 잘못 본 건 아니다. 마치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는 그녀의 명확한 특징이었다.
‘브라우닝 씨?’
분명 예전에 비올루윈에서 만났던 그녀가 분명했다.
지인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녀였지만 예전 대화가 제법 기억에 남아 있던 터라 한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력 있는 사람이었으니 혹시 도시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볍게 말을 걸려 할 때였다.
흠칫!
라라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몸을 휙 돌렸다. 한스는 한 발짝 물러난 채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스릉!
라라의 검이 반쯤 뽑혔다.
“누구지!”
전투 의지는 없어 보이지만 낯선 남자의 접근은 당연히 의심스럽다. 라라의 눈에 잔뜩 경계심이 서렸다.
“진정해요. 싸울 생각은 없어요. 예전에 한번 뵌 적이 있죠?”
라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스의 얼굴을 훑었다.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는 그녀가 혼자 걷고 있을 때 껄떡대는 남자들은 많았다.
어디서 한번 본 적이 있지 않냐고 물어보는 건 그저 그런 남자들이 내뱉는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라라의 경계 어린 시선은 곧 사라졌다.
“당신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라라도 한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대화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다행히 기억하는 모양이군요. 손은 내려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라라가 허겁지겁 검을 집어넣었다. 한스도 손을 내렸다.
“설마 이 도시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관광하러 오셨습니까?”
“일단은 그래요.”
하지만 라라의 표정이 묘했다.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관광을 하는 관광객의 표정은 아닌데.’
그러고 보니 그녀의 곁이 허전하다. 만난 건 몇 번 안 되지만 그녀와 만날 때마다 붙어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렌 제너드 씨라고 했죠? 그분은 같이 오시지 않았나요?”
라라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아졌다. 방금 전까지는 그나마 평온한 표정을 가장하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가장조차 깨졌다.
한눈에도 그녀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이 그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이 오긴 했어요. 지금은 조금 떨어져서 활동하고 있지만요.”
“그렇군요.”
한스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파고들지 않았다.
괜히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그녀와 대단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어색한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아직 검을 놓지 않으셨군요.”
분명 그녀는 검을 놓고 방패 위주로 전투 스타일을 다듬는 게 나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방패를 들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리 크지 않았고 검도 예전에 봤던 검인지라 그녀가 아직 전투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저 화제를 바꾸기 위한 말. 둘이 공유하는 몇 안 되는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라라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한스의 당혹감도 더욱 올라갔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변했다곤 하지만 그건 일신의 무력뿐. 아직 대인 관계나 사회생활 같은 것은 하인 한스에서 얼마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일단 칭찬을 하자!’
사람들은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검을 놓지 않았다면 실력이 더 좋아지셨겠네요. 제가 모시는 분도 브라우닝 씨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모시고 있는 분이라면, 그렌과 마찰이 있던 분을 말하는 겁니까? 그 명예 성기사라고 하셨던….”
“맞습니다!”
다행히 라라가 호기심을 보이며 우울감이 희미해지는 것 같자 한스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실력 하나는 대단한 분이시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던 저를 이 만큼이나 단련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검의 재능을 알아봐 줬다. 라라는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러면 뭘 해.’
그녀가 사랑하는 이는 계속 그녀의 무기를 바꾸길 종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권유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건 점점 강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라를 대하는 태도 또한 조금씩 변해갔다.
지금도 할 일이 있다고 자신을 떨쳐내지 않았는가.
‘이걸론 안 되겠군.’
다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느끼고 한스는 그녀를 달래길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지크 님한테 이런 건 안 배웠으니까.’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이라고 해 봐야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신경을 긁어 놓는 것만 배웠을 뿐.
결국 한스는 목적한 바만 이루고 떠나기로 했다. 이야기를 계속 하다간 라라의 심기만 더 안 좋게 만들 게 분명했다.
“저, 혹시 이 도시에서 수상한 사람이나 사건을 보지 못했습니까?”
“…수상한 사람이나 사건이요?”
“그렇습니다.”
“아뇨. 그런 건 보지 못했어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한스는 자신이 하는 일을 말하는 게 괜찮을까 생각했다.
‘괜찮겠지. 어차피 소문은 다 돌았고,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의 동료인 이 사람이 범인일 리도 없으니까.’
하지만 자세한 사항을 말해 줄 생각도 없었다. 간단하게만 요약해 설명했다.
“도시에 납치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서 그걸 조사 중이었습니다.”
“납치 사건이요?”
정말로 몰랐는지 라라가 놀란 눈을 치떴다.
“그렇습니다.”
라라가 모르는 듯하니 한스는 더 이상 그녀와 얘기를 나눌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애초에 별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피해를 내지 않으려면 더 조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스는 다시 조사를 진행하려 발을 돌리려고 했다.
“잠시만요!”
그를 라라가 불러 세웠다.
“그런 일이라면 저도 돕겠어요.”
“…브라우닝 씨가요?”
한스는 잠시 고민했다.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라라 브라우닝의 실력은 제법이다. 무엇보다 지크가 보장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지크와 같은 명예 성기사 그렌 제너드의 동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인력이 부족하기도 하고.’
도시 전체를 순찰해야 하는 만큼 사람의 머릿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다만 인력과 예산이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일단 말씀드리지만 이 일을 도와주신다고 하셔도 대가 같은 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원하지 않아요. 그저 사람들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라라는 자신의 선의가 왜곡된 것 같아 조금 불쾌해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제가 거절할 이유는 없죠. 하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긴 했으니 나중에 밥이나 술 한 잔 정도는 사드리죠.”
“꼬시는 건가요?”
“그럴 여유 없습니다. 훈련을 소화하기에도 바빠서요.”
“그렇군요.”
한스의 훈련에 집중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라의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좋아요. 그럼 나중에 밥이나 술 한 잔으로 협력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하죠.”
그렇게 한스는 협력자 한 명을 대동한 채 다시 도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 * *
지크, 라일라의 데이트 흉내와는 달리 스녹과 엘레나는 제법 즐겁게 도시를 누볐다. 누가 보면 데이트를 하는 연인이라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어느 지붕 위에서 보고 있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저 봐. 역시 자기들이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니까. 그래야 저런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나오지.”
“그러네.”
“그러니까 내가 한 카지노 데이트도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야.”
“…….”
라일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지크의 우쭐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일단 말해두는데 그걸 내 첫 데이트로는 절대로 치지 않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어라? 역시 너한텐 조금 난이도 있는 데이트였으려나?”
이대로 걷어찬다면 이 녀석이 지붕 아래로 떨어질까. 라일라가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잡담을 하면서도 둘은 스녹과 엘레나의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고용한 자들이 대로변의 등불을 하나둘 켜기 시작했다.
하늘이 노랗게 물들더니 곧 새까만 암흑이 하늘을 덮었다.
“긴장해, 지크. 슬슬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야.”
“알고 있어.”
지크가 윈두르를 손에 쥐었고 라일라는 지팡이에 은은히 마력을 둘렀다.
“괜찮겠지? 엘레나는 아직 제대로 수련을 한 게 아니니까 걱정돼.”
“스녹 녀석도 꽤 강해. 내가 단련시켰잖냐. 적어도 우리가 갈 때까지 자기들을 보호할 수준은 되니까 걱정 마.”
둘은 낮보다 조금 더 스녹과 엘레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 * *
“아, 재밌었다!”
대로변을 걷던 엘레나가 팔을 쭈욱 뻗었다. 그녀의 팔에는 오늘 쇼핑한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우리도 재미있었지?”
쿠우!
스녹과 노웸도 오늘의 일을 잔뜩 만끽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돌아갈 거야?”
“몇 바퀴만 돌고 들어가자. 슬슬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시간이니까. 미끼로서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지.”
“…그러고 보니 그랬지.”
엘레나가 긴장감을 높였다. 그녀의 몸이 자연스레 딱딱해졌다.
지크를 따라 온갖 사건 사고를 맞닥트리며 헤쳐 온 스녹과는 다르게 그녀는 얼마 전에 일행에 합류했다.
실전 경험은커녕 이제야 조금씩 마법을 배우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그 속도는 경악스럽게 빨랐지만 아직은 시간이란 재료가 더 필요했다.
그런 그녀의 걱정을 안 것일까. 스녹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너무 긴장하진 마. 주변에 지크 님이나 라일라 님이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이 나타나는지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두 분에게 걸리면 범인이 어떤 놈이든 이거야.”
스녹이 섬뜩하게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그리고 그분들이 달려오시기 전까지는 내가 충분히 막을 수 있어. 그렇지, 노웸?”
쿠우!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상황이 많을 테니 연습한다 생각해.”
“…연습이라기엔 너무 실전적이지 않아?”
“그게 지크 님의 스타일이니까 포기해.”
스녹이 웃으며 말하자 엘레나도 포기한 듯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긴장감이 확 내려앉은 건 아니다.
스녹도 그녀가 바로 긴장감을 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금 더 세심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투확!
옆 골목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퍼엉!
하지만 그림자는 바로 앞에 돋아난 돌벽에 부딪쳐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 * *
“왔다!”
지크가 바로 지붕을 박찼다. 라일라는 몸을 띄우며 주문을 외웠다.
스녹이 만든 벽에 막힌 그림자가 잠시 꾸물거린다. 하지만 곧 벽을 부수고 스녹과 엘레나 쪽으로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지크가 그림자에 접근한 뒤였다.
“뒤져!”
호쾌한 기합음과 함께 지크가 윈두르를 휘두른다. 그림자가 급히 몸을 변형시켜 윈두르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림자의 변형보다 지크의 윈두르가 더 빨랐다. 윈두르의 끝 부분이 그림자를 스쳤다.
꿀렁!
그림자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더니 다시 골목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크도 따라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림자를 따라잡은 지크가 다시 윈두르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옆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건!’
상당한 마력이 느껴진다. 지크가 급히 윈두르의 궤도를 꺾어 상대를 공격했다.
콰아앙!
윈두르와 상대의 검이 부딪친다. 뒷골목에 난데없는 폭음이 들렸다. 지크는 윈두르와 맞대진 검을 눈을 찌푸리고 쳐다봤다.
‘응?’
검의 형태가 익숙하다. 검은 검신을 갖고 있는 검.
‘토르니움?’
회귀 전 지크의 애검. 그리고 지금은 다른 존재가 갖고 있는 검이다.
지크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렌 제너드!’
예기치 못한 인물이 튀어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