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지크 씨. 혹시 데이트를 해 본 경험은 있으신가요?”
“그거야 당연히…!”
이블린의 말에 확신을 담아 대답하려던 지크가 말을 흐렸다.
회귀 전 가문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눈에 들려 수련을 하느라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가문을 나와서는 살아남기 바빴고 힘을 얻었을 때는 이미 세계와 한 판 뜨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연인과 하하호호 웃어가며 로맨틱하게 거리를 걷는 것 같은 건 해본 적은 분명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데이트는 해본 적이 없군요.”
피와 살이 난무하고 비명과 고함을 노래하며 생명을 낚아채는 데이트는 많이 해 봤지만.
“그래도 뭐, 데이트라야 별 거 있습니까? 연인이 재미있는 거 하면서 놀면 그만이죠.”
“지크 씨의 말이 맞아요. 그렇게 잘 아시는 분께서 왜 하루 종일 카지노에 틀어박혀 도박만 하셨을까요?”
“이 도시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도박 아닙니까. 연인과 함께 내가 즐거운 일을 한다. 캬~! 이것만큼 의미 있는 데이트가 어디 있겠습니까.”
뻔뻔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껴왔던 지크의 환장할 만한 행동 양식을 이블린도 서서히 느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크씨에게 데이트를 맡기기엔 부적합해 보이네요.”
“…그런 것 같군요.”
요하임도 이블린의 말에 동의했다. 받은 은혜가 은혜인지라 지크에게 퍽 커다란 호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이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혹평에 투덜거리는 지크를 외면하고 이블린이 라일라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라일라 씨가 리드를 해야 하실 것 같아요.”
그녀는 두 사람의 연인 흉내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저도 데이트 같은 건 못 해 봤는데요.”
“네, 알고 있어요.”
데이트는커녕 사랑이란 감정마저 잘 모르는 듯한 게 라일라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데이트 코스 같은 건 제가 알려드릴 게요. 라일라 씨는 그 코스대로 다니시면 돼요.”
“…알겠어요. 한 번 해볼게요.”
“지크 씨도 철저하게 라일라 씨에게 맞춰주세요.”
자신의 데이트 코스가 인정받지 못 한 것에 불만에 찬 지크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 비용은 이쪽에서 대겠습니다. 도시를 위한 임무이니 비용은 지원을 해야죠. 그래도 지크 님의 도박 비용을 지원하는 건 어렵겠습니다.”
요하임이 말하자 라일라가 지지했다.
“당연한 말을요. 카지노에서 잃어버린 돈을 지원해준다면 저 녀석, 도박판에서 신나게 써버릴 게 분명해요.”
“말을 심하게 하네.”
하지만 오늘도 돈을 거하게 잃은 지크로서 라일라의 말에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비용 지원은 됐습니다. 백작님 사정이 그리 좋은 건 아닐 테니까요.”
“귀가 아픈 말이군요. 하지만 그 정도의 지원은 충분히 해드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 상당한 돈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힘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돈은 꽤 많습니다. 거기에….”
지크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제가 잃은 것 이상을 라일라가 땄거든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라일라에게 쏠린다. 라일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마치 멸시하듯 내뱉었다.
“도박도 더럽게 못 하는 게 카지노는 왜 그렇게 다녀?”
“젠장.”
지크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 했다.
* * *
작전 결행 이틀째. 오늘은 이블린이 짜준 코스대로 데이트 흉내를 내는 날이다. 라일라의 손에는 이블린이 적어준 종이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코스를 간단하게 적어둔 거라고 생각하기에 종이의 두께가 제법이었다.
라일라가 그 종이를 심각하게 들여다봤다.
“일단 밥부터 먹자.”
“그거 좋지.”
안 그래도 슬슬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상당히 허기가 진 상황이다.
어디 근처에 밥을 먹을 곳이 없나 찾아보던 지크가 마침 가게 하나를 찾아냈다. 별다른 특색은 없는 가게였다.
“저기 가볼까?”
“안 돼.”
라일라가 반대했다.
“뭐야,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지크의 질문에 라일라는 다시 이블린이 준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종이와 주변 가게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기.”
라일라가 가게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가게는 제법 멋들어진 가게였다. 간판부터 제법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인테리어도 괜찮았다.
“저기로 가자.”
“종이에 저 가게로 가라고 적혀 있어?”
“저 가게의 이미지가 가장 가까워.”
“흐음.”
데이트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갈린다.
‘이건 이블린의 취향이로군.’
어디까지나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는 이블린의 취향이 듬뿍 담긴 가게다. 이곳에 처음 온 이블린이 이 가게를 직접 추천하지는 않았을 터.
라일라의 말처럼 이블린이 적어 놓은 조건대로 라일라가 찾아낸 것이 분명하다.
“좋아, 들어가자고.”
오늘은 이블린의 조언을 따르는 라일라에 맞춰주는 날이다. 게다가 가게 안에서 꽤 맛있는 냄새도 흘러나온다. 지크는 라일라의 의견을 따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가게 안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핑크빛이라고 해야 하나.
누가 봐도 도시에 놀러 온 연인들을 위한 가게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전부 커플처럼 보였다.
일단 가게는 제대로 고른 것 같았다.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시킨다. 가격은 제법 비쌌지만 관광지임을 생각하면 납득 가는 가격이었다.
지크와 라일라가 가볍게 잡담을 하고 있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따끈따끈한 김과 함께 퍼지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지크는 그대로 식기를 들어 음식을 먹으려 했다.
“잠깐만.”
라일라가 제지했다. 그녀가 이블린이 준 종이를 한 번 본다. 그리고 식기를 들었다. 나온 스튜를 듬뿍 떴다. 그리고 내밀었다.
“아.”
지크가 눈을 꿈벅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지크가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표정 변화 없는 라일라의 얼굴을 보고는 상황을 눈치 챘다.
“그것도 이블린의 지시냐?”
“응.”
역시였다. 지크는 피식 웃고는 스튜를 받아먹었다. 맛은 제법 있었다. 나름 재료도 괜찮은 것으로 사용한 모양이다.
라일라가 지크의 식기를 가리켰다.
“너도 해.”
지크도 스튜를 가득 떠 라일라의 앞에 갖다줬다. 라일라가 그것을 받아먹는다.
라일라와 여행을 같이 하게 된 지도 꽤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이건 또 색다른 경험이다. 지크는 라일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리 누가 시켜서 한 거라지만 상당히 남사스러운 행위다. 혹시나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있지 않을까. 라일라의 그런 표정은 한 번 볼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지크의 기대는 헛되이 부서져 내렸다.
‘변화가 없군.’
부끄러움이나 수줍음 같은 풋풋하고 달콤한 표정은커녕 당장이라도 커다란 전장을 앞에 둔 장군을 보는 것 같다. 그녀는 스튜를 열심히 씹으며 이블린이 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지크가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이블린, 네가 원하는 그림은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 거 같다.’
상황은 지크의 예상대로 흘렀다.
라일라는 제법 낯간지러운 행동을 계속했다. 그건 웬만한 커플들도 쑥스러움에, 적어도 바깥에서 대놓고 하기에는 꺼려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라일라의 표정에 연애에 관한 달콤함은 일절 없었다. 오히려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수도승 같다. 아니면 그런 류의 기계라든가.
지크와 라일라는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멋있고 예쁜 커플의 닭살 돋는 행위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몬스터를 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아무리 양보를 해도 연인을 보는 시선은 아니다.
지크는 나름 이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라일라는 아니었다. 자신의 임무에 빠져 자기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가자!”
라일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이블린이 준 종이가 마치 신이 내려준 성서라도 되는 양 꽉 붙들려 있었다. 지크도 라일라를 따라 일어났다.
가게를 나서며 힐끗 다른 사람들을 쳐다본다.
여전히 시선이 달라붙어 있다. 여전히 연인을 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 * *
“그래서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습니다.”
지크가 말하자 이블린이 머리를 잡았다. 그녀의 옆에서 라일라가 눈치를 본다. 종이에 적혀 있는 대로 열심히 따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단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연인 흉내가 실패였단 거죠?”
“그걸 연인으로 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정신 이상적인 면에서 말이다.
지크의 그 말은 쐐기였다.
“…아무래도 지크 님과 라일라 님에 이 임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이블린도 요하임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장도 루즈 영애의 계획을 나름 괜찮게 봤습니다. 도시에 투입할 위장 연인들을 몇 쌍 고르고 있다더군요. 그 사람들을 믿어 봅시다.”
“역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요.”
못내 아쉬운 투지만 이블린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크가 말했다.
“스녹과 엘레나를 투입해보죠.”
“그 둘을?”
라일라가 놀라 물었다.
“걔들이 친하긴 한데 연인은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도시의 지원에만 기대는 것도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걔네 둘이 괜찮을까?”
“우리처럼 꼭 연인 흉내를 내라고 할 필요는 없어. 녀석들도 엄청나게 어색해할 테고. 그냥 친구로서 둘이 관광이나 다니라고 하면 돼. 남자, 여자 둘이서 시시덕대면서 관광지를 도는 것만으로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연인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 정도는 쉬운 일 아니야?”
“그 쉬운 일을 왜 두 분은 하지 못하셨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공녀님. 저 정도면 충분히 좋은 데이트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범죄자의 기준이 참 까다로운 모양입니다. 카지노 데이트가 얼마나 낭만적인데.”
“저도 시킨 대로는 다 했어요.”
“…….”
“그냥 앞으로의 일만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루즈 영애.”
요하임의 말대로다. 자신은 이 둘을 당해낼 수 없다고 이블린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럼 내일은 스녹 씨와 드웨인 씨에게 맡겨보죠.”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 * *
다음 날. 스녹과 엘레나는 길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었다. 아침에 갑자기 받은 임무.
잔말피에서 놀아라. 최대한 살갑고 즐겁고 다정하게.
중요한 임무라고 하기에 바짝 긴장한 둘에게 내려진 임무가 그것이다. 그리고 둘은 지크와 라일라에게 바깥으로 내쫓겼다.
용돈이랍시고 상당히 많은 돈을 받고서 말이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노웸?”
쿠우?
노웸에게 물었지만 녀석도 이 상황에 대해 알진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 물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스녹이 엘레나를 쳐다봤다.
“선생님과 지크 씨가 연인 흉내를 실패했다고 했잖아. 그 역할을 우리가 떠맡은 것 같아.”
역시 마법사. 엘레나는 스녹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줬다.
“그럼 우리가 연인 흉내를 내야 한다고?”
“아마도.”
“…나 그런 건 못 할 것 같은데?”
“나도 마찬가지야.”
광산에서 곡괭이질만 죽어라 한 스녹과 어떻게든 마법 한 번 써보겠다고 죽어라 마법서만 판 두 사람이 능숙하게 데이트 흉내를 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선생님이 맡겼다는 건 뭔가 의미가 있을 텐데.”
라일라를 무척이나 존경하는 엘레나로선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연인 흉내를 내야 할까.
하지만 그녀의 상념을 스녹이 잘랐다.
“뭐, 깊이 생각해서 뭘 하겠어. 그 분들이 시키신 대로 해야지.”
“잠깐만 기다려 봐. 그래도 조금 더 생각을 하고 움직여야…!”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따로 언질을 주셨을 거야. 그러지 않았다는 건 말 그대로 그 분들의 말을 따르는 걸로 충분하다는 뜻이겠지.”
“…….”
눈을 껌벅이는 엘레나에게 스녹이 손을 내밀었다.
“움직이자. 이렇게 된 거 화려하게 놀아야지.”
엘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도시 즐기기가 시작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