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지크는 현장을 쳐다봤다. 근처에 피해자가 앉아 병사와 뭐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듯 낮은 울음소리를 연신 흘려댔다. 그 소리는 지면을 음습하게 기어와 사람들의 귀에 정확하게 꽂혔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스칠 때마다 안쓰럽게 변한다.
물론 지크는 예외였다. 오히려 이제와 그가 여성 한 명이 우는 것에 동정을 느낀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범인을 잡는 것에 집중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시죠.”
“저 여성분이 애인분과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답니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잔말피는 도시 특성상 해가 져도 어느 정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들을 위해 적어도 대로변에는 많은 조명이 배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낮에 비하면 인적이 드문 것도 당연.
“그런데 갑자기 골목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덮쳐들었다고 합니다.”
“그림자요?”
“예. 여성분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자, 혹은 새까만 암흑이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자신들을 휩쓸어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새까만 암흑. 로브 놈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분명 마인 관련 일일 터.
‘그런 놈이 있었나?’
그러나 뚜렷이 생각나는 마인은 없다. 지크는 일단 설명을 계속 듣기로 했다.
“그림자는 그들을 골목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림자가 여성분 본인을 놓아줬다고 하더군요.”
“놓아줘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성분은 그저 일반인이니까요. 하지만 남성분은 놓아주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성분이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남성분의 소매를 움켜잡았지만 갑자기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크 님이 눈앞에 있었던 거죠.”
“그림자에 대한 건 물어봤습니까?”
“물어는 봤는데 자세한 건 알지 못 하는 모양입니다. 애초에 그림자라고 하는 것도 여성분이 표현하는 방식이니까요.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조사를 더 해봐야겠지요.”
지금 그녀는 무척 흥분을 한 상태다. 진정을 하면 뭔가 다른 기억을 더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거라고 지크도 요하임도 생각했다.
“범인의 모습이 드러난 건 처음이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정황만으로 연인들을 납치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 추측을 했을 뿐이죠.”
하지만 직접적으로 기묘한 범죄자가 나타난 지금, 요하임의 추측은 조금 더 생기를 얻었다. 정말로 이 도시에 로브 놈들이 관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하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들이 얻은 가능성의 증가는 다른 사람의 피해와 함께 나타난 것이었으니까.
여성의 울음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지크는 현장을 쳐다봤다. 치안대가 증거를 찾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마력의 잔향도 없고 특별한 흔적도 없어.’
아마도 저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지크는 현장을 요하임에게 맡기고 숙소로 돌아갔다.
* * *
그 후로 습격은 계속됐다. 드문드문 몰래 납치를 하던 것이 대체 언제 적 이야기냐고 주장이라도 하듯 납치 빈도는 잦아졌고 그 행태도 대담해졌다.
한 번은 두 연인을 동시에 덮치기도 했다. 거기서 범인은 남녀를 각각 한 명씩 납치해갔다. 물론 그 남녀는 서로 다른 사람의 연인이었다.
사정이 그렇게 되니 도시의 분위기가 슬슬 어두워졌다.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착실히 줄어갔다.
“한소리 듣고 오셨나 봅니다.”
방에 들어오는 요하임을 보고 지크가 말했다. 요하임의 얼굴에 묻은 곤혹스러움을 알아챈 것이다. 요하임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죠. 명예를 살리라고 믿고 맡겨주셨는데 사건은 해결이 안 되고 오히려 심해지고 있으니까요.”
요하임이 남은 의자를 빼 앉았다. 그를 이블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그래도 너무하시네요. 백작님도 노력하고 계시는데요.”
“감사합니다, 루즈 영애. 한소리 들었다고는 하지만 욕설이나 질책 같은 걸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따지자면 격려에 가깝죠. 그래도 영주의 심기가 불편해진 건 사실입니다. 어서 해결을 봐야죠.”
요하임의 목소리에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아무리 조금씩 해결되는 분위기라도 지금 요하임과 드라큘 백작가는 그 입지가 굉장히 좋지 않다.
따라서 그들을 두둔해주는 소수와의 인연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
한데 만약 이 일을 해결하지 못 해, 그나마 그를 지지해주고 있는 이 영지의 영주와의 관계마저 틀어져 버린다면 엄청난 타격이 된다.
요하임은 정말로 목숨 걸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결의만으로 일을 해결할 순 없다. 그게 요하임이 매일 지크가 머무는 숙소에 들르는 이유였다.
“뭔가 단서를 얻은 건 있습니까?”
기대를 담아 요하임이 방 안의 인원들을 바라본다.
언제나 모이는 네 명. 지크, 라일라, 이블린 그리고 요하임. 정말로 이색적인 조합이다.
그러나 이 조합에 요하임은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조합에는 지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찮았다.
“별로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지크의 대답에 요하임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조금 정도는 관광을 즐기려 한 지크 일행이었지만 눈앞에서 사건을 직접 본 후까지 그럴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아니, 지크는 상관없었지만 피해자 여성이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한스와 스녹, 그리고 그걸 전해들은 라일라, 엘레나, 이블린이 문제였다.
때문에 그들은 바로 사건 해결을 위해 뛰어들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요하임도 항상 이 시간대에 와 정보를 얻어가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뚜렷한 단서는 없었다.
그저 범인이 그림자나 어둠이라고 칭할 만한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뿐.
‘그런 마인은 기억이 안 나는데.’
라일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라일라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지크도 사소한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이 마인은 지크의 기억 한켠을 차지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한 놈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놈들이면 뭔가 뇌리 한 쪽이 간질간질하긴 할 텐데.’
연인 납치범. 그리고 그림자. 이 두 단서를 조합했을 때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뭐, 좋아. 내가 단순히 기억하지 못 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만난다면 기억날 수도 있다. 쳐 죽여 놓으면 기억날 수도 있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난다면 그뿐이다.
“그럼 일단 계속 수색을 해야겠군요.”
지금 할 수 있는 건 수색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이 피해자는 더 발생하겠군요.”
이블린이 한숨 쉬었다.
“단서는 더 없나요?”
“지금까지는요. 다만 갑자기 범인의 움직임이 변한 것이 눈에 띕니다.”
요하임의 말처럼 갑자기 범인의 수법이 바뀌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연인 중 한 사람을 납치하는 방법에서 연인이 같이 있을 때 대놓고 습격, 한 사람을 납치하는 방식으로.
지크가 말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그게 외부적인 원인이든 아니면 단순한 심리의 변화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도 뚜렷하게 예상가는 건 없었다.
그때 이블린이 말을 꺼냈다.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의 시선이 이블린에게 쏠렸다.
“범인을 유인하는 거예요.”
“어떻게 말입니까?”
요하임이 물었다.
“범인은 연인, 그것도 밤길에 걷고 있는 연인들을 급습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럼 이쪽도 연인들을 내세워 유인한다면 걸려들지 않을까요?”
일리 있는 말이다. 사건 때문에 도시에 인적도 드물어져 범인이 습격할 사람도 줄어들었다.
그 말은 즉, 범인이 습격을 계속한다면 함정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제법 좋은 생각 같군요. 도시의 시장에게 문의해 비밀리에 연인 역할을 할 실력자들을 뽑아야겠습니다.”
“동시에 우리 쪽에서도 사람을 투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쪽에서요?”
“역할에 딱 맞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블린이 지크와 라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네?”
라일라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지크도 눈을 꿈벅였다. 그러나 둘과 달리 요하임은 이블린의 의견에 썩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두 분이라면 실력도 있고, 함께 여행을 다니셨으니 충분히 연인 같은 분위기를 뽐낼 수 있으시겠죠.”
“…뭐요?”
마치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는 것 같은 지크의 말은, 그러나 요하임과 이블린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건 대체 뭔 상황이냐?”
“…….”
둘만 덩그러니 대로변에 놓이게 됐다. 범인을 유인하기 위한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 * *
잔말피는 기본적으로 화려한 관광도시다. 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다. 데이트를 하기에는 무척이나 이상적인 장소.
하지만 그것도 연인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지크와 라일라 사이에 연인이라는 달콤한 요소가 들어가기엔, 적어도 지금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단 하긴 해야지.”
반 쯤 포기한 투로 라일라가 말했다. 이블린의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지크와 데이트 흉내를 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라일라는 기억이 없다. 갖고 있는 지식에도 데이트 방법 같은 사소한 건 없다.
“맡길게, 지크.”
“어라? 내가 리드하라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그 때 네가 다 한다며.”
첫 만남이라면 드라큘 영지에서 라일라가 바곳 부인을 죽였을 때를 말함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아는 그녀에게 놀라 공격했을 때 데이트 권유를 했던 게 기억난다.
물론 진짜로 데이트 권유는 아니었다. 순순히 잡히라는 말을 비꼬아 돌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앞장을 서지! 생각해보니 네게 데이트 경험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내가 하는 게 맞겠어.”
지크는 자신감 있게 걸음을 내딛었다.
“걱정마, 라일라. 나만 믿어라! 네 첫 데이트 경험은 내가 확실하게 시켜주지!”
“그래, 믿고 있을게.”
그리고 잠시 후, 라일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무더기로 칩을 잃으며 카드를 내던지는 지크를 라일라는 차디찬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 젠장. 운 정말 더럽게 안 좋네.”
카지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꽤 거금을 날려버린 지크가 투덜대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게 데이트야?”
“응? 당연하지. 데이트가 뭐야. 연인끼리 서로 즐거운 걸 하며 노는 게 데이트잖아?”
그리고 방금 돈을 잃어버린 도박 테이블을 척 가리켰다.
“도박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래, 그렇겠지.”
라일라는 더 이상의 반박을 포기했다.
“자, 너도 한 번 즐겨 봐. 원래 도박만큼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게임도 별 거 없어. 종잣돈이야 내가 좀 내 주지.”
그가 라일라의 어깨를 잡고 도박판으로 이끈다. 어차피 여기서 할 거라곤 도박밖에 없다.
그녀는 순순히 지크의 의도대로 도박판에 끼어들었다.
* * *
“…그래서 하루 종일 도박만 하고 오신 건가요?”
자신에게 향하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시선을 지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데이트를 하는 데도 범인은 오지 않더군요. 역시 하루 만에 결과가 나오기란 쉽지가 않죠.”
지크의 말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감동을 받은 모습은 아니다.
라일라의 작은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