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이번 사건을 파헤쳐 혹시 로브 놈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모조리 섬멸하자고 기세 좋게 합의한 다음 날.
전 날의 합의가 무색하게도 지크 일행은 관광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다는 연극을 보고 좋은 가게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지금은 카지노에서 가볍게 놀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거야?”
라일라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평소의 편한 여행복을 벗고 가벼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카지노가 제법 고급스러운 곳이라 최소한의 옷차림은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 대단한 드레스도 아니다. 가격은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입는 옷에 비하면 분명 격이 떨어지는 옷이다.
하지만 패션의 절대불변의 원칙은 단 하나다.
얼굴.
아무렇게나 입어도 주변 시선을 흡수하는 그녀가 가볍다지만 제법 꾸미고 나타나자 말 그대로 주변의 시선을 독점했다.
괜히 그 지크가 자신이 본 사람들 중 가장 미인이라고 단언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접근을 쳐내고 있었다.
“응? 뭐라고 했어?”
칩을 테이블에 밀어 넣고있던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도박에 빠져 말을 안 들은 게 아니다.
격식 차린 옷차림을 한 건 지크도 마찬가지였다.
쫙 뺀 정장이 다부진 몸을 조이고 평소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머리도 지금은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러자 그의 가벼운 행동과 어조에 가려져 있던 귀족적 외모가 드러났다. 이래봬도 고위 귀족인 백작가의 장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라일라처럼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도 충분히 미남 축에 드는 자다.
적어도 라일라와 관계있는 남자로서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이래도 되는 거냐고.”
“조사 때문에 그래?”
“그게 아니면 뭐가 있겠어.”
지크가 자신의 앞에 놓인 카드를 깐다. 그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에잇!”
카드를 던지고 일어났다. 그가 건 칩들의 소유가 카지노 쪽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래, 조사에 대해서 물었었지?”
“한 번만 더 똑같은 말을 하게 한다면 각오해.”
“알았어, 알았어.”
항복을 한다는 듯 지크가 두 손을 올렸다.
“조사는 할 거야. 하지만 급할 건 없어. 정확히 말해서 당장은 할 게 없지.”
아직 로브 놈들이 있지 않을까 정도의 의심 단계다.
“어차피 이 도시에는 관광을 위해서 왔잖아. 다른 녀석들도 꽤 기대하고 있었고. 며칠 정도 머리 식히는 정도는 괜찮아. 무엇보다 이 도시로 오자고 한 건 너잖아.”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나도 넋 놓고 돌아다니는 건 아냐. 도시의 지리를 익히고 혹시 수상한 놈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있어. 무턱대고 놀아 제끼는 건 아니란 거지.”
“…그러기엔 도박에 너무 빠져있지 않았어?”
“아니, 정말로 한 끗 차이로 져버리지 않겠냐. 진짜 최후의 최후에 운이 안 붙는 느낌. 조금만 더 하면 본전 찾을 것 같으니 안 하고 배기냐.”
한숨을 한 번.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부여잡는 건 덤이다. 딱 철없는 남자친구에 고생하는 여자의 느낌이었다.
“어쨌든 정해둔 돈은 다 썼지?”
“그래. 저게 마지막이야.”
조금 더 도박을 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라일라의 걱정과는 달리 지크는 쿨하게 돌아섰다.
마력이나 검술도 수준급인 지크지만 그만큼 정신력도 굉장하다. 도박의 중독성에 빠질 리 없었다. 그에게 카지노는 말 그대로 잠깐 노는 곳일 뿐이었다.
“너는 안 하냐?”
“생각 없어.”
“그럼 다른 녀석들이나 찾아보자고.”
한스와 스녹, 엘레나에게 돈 좀 쥐어주고 마음껏 놀라고 풀어준 참이다. 둘은 어깨를 같이 하고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도박에 약하네? 능력은 안 쓰는 거야?”
“이런저런 확인 장치가 있으니까. 물론 나 정도라면 그런 것들 쯤 충분히 속일 수 있긴 한데, 그럴 거면 뭐 하러 도박을 해?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운만을 겨루는 게 바로 도박의 묘미야.”
“난 이해 못 하겠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적당히 다른 이들을 찾는다. 그러다 한 테이블이 웅성거리는 게 들렸다.
지크와 라일라가 그 쪽을 쳐다봤다.
“엘레나랑 스녹이네?”
지크 일행 중 라일라를 제외하면 엘레나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사람은 스녹이다.
아무래도 같은 또래에 노웸의 마력을 빌릴 때 같이 있었던 이유가 컸다. 그래서 라일라의 곁을 떠날 때면 엘레나는 스녹과 같이 움직이는 편이었다.
때문에 둘이 붙어있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진짜 놀랄 일은 그들의 앞에 산처럼 쌓인 코인들이었다.
“저거 저 녀석들이 전부 딴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스녹과 엘레나도 자신들의 앞에 산처럼 쌓인 코인들을 보고 굳어있다.
“혹시 능력으로 속임수를 쓰거나 한 건 아니겠지?”
“카지노의 탐지 능력을 얕보지 마. 나 정도나 속이는 게 가능하지 저 녀석들은 택도 없어.”
“그럼 정말로 실력으로 딴 건가?”
“초보자의 운이겠지.”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도 환성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둘의 시선이 이번엔 그 쪽으로 돌아갔다.
“한스네?”
“한스야.”
혼자 놀고 있던 듯한 한스의 앞에 코인이 수북이 쌓여 있다.
“쟤도 땄나 봐.”
“그렇군.”
라일라가 지크의 팔꿈치를 툭 쳤다.
“실질적으로 돈을 잃은 건 너뿐이란 거네?
“으음….”
아까와는 달리 지크의 눈썹이 언짢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일라가 소리죽여 웃었다.
* * *
한스와 스녹, 엘레나가 딴 돈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코인이 현금으로 환전이 되자 한스와 스녹의 열기가 훅 가라앉았다.
코인으로 있을 때는 실감하지 못 했다. 그저 멋모를 둥근 칩들이 가득 싸이자 그게 뭔가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현금이 되자 그 가치가 확연하게 머리에 들어온 것이다.
분명 많은 돈이지만 지크가 필요할 때 쓰라고 그들에게 준 돈도 만만치 않다. 엘레나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던가.
“전부 도박장에서 돈 딴 사람 표정이 아닌데?”
“내비 둬. 본인들만의 감흥이 있나 보지.”
“그 감흥을 혼자 못 느끼는 분도 있고 말이죠?”
라일라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평소 당했던 울분을 풀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지크도 할 말이 없었다.
“모두 여기 계셨네요.”
모여 있던 일행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이블린이었다. 그녀도 지크 일행의 관광에 같이 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리키가 바짝 붙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재미있었습니까?”
지크가 물었다. 이블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글쎄요.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도박에 맛들이면 정말로 심각해지니까요. 잃으면 잃는 대로 툭 털고 나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아뇨, 따긴 땄는데요. 그래도 별 재미가 없어서….”
“…….”
지크는 입을 닫았다. 옆에서 라일라가 옆구리를 툭 쳤다.
* * *
그들이 카지노를 나왔을 때는 이미 별이 한가득인 시간이었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동 수단은 마차였다. 이블린의 마차가 상당히 커 지크 일행도 충분히 전부 앉을 수 있었다.
그들은 오늘의 관광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이야기는 이블린이 시작한다.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간간이 대꾸해주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끊기지 않고 제법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갑작스러운 비명이 들린 건 그때였다.
상당히 멀리서 들린 비명인 듯 그들에게 들린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아무런 훈련도 하지 않은 이블린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길게 째지는 울음 섞인 비명. 마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벌컥!
지크가 바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라일라, 엘레나. 너희는 공녀님을 보호하며 그대로 숙소로 가. 한스, 스녹. 너희는 따라 와라.”
지크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뒤로 한스와 스녹도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탓!
다리에 마력을 가득 품은 채로 도시를 내달린다. 지크와 한스는 도시의 지붕들을 밟고 마치 하늘을 날듯 움직였다.
그들의 뒤로 거대한 형체가 뒤따랐다. 몸을 거대하게 바꾼 노웸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섬뜩한 이빨이 위협스럽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집이 작았을 때의 귀여움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스녹은 노웸의 등에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쏜살같이 도시 위를 내달렸다. 목표는 비명소리가 들렸던 방향이었다.
‘더 이상 비명은 없는데.’
좋지 않다. 비명이 끝났다는 건 보통 두 개의 상황을 의미한다.
비명을 지를 상황이 해소되었거나, 아니면 더 이상 비명을 지를 수 없게 되었거나.
게다가 아무리 지크라도 비명 한 번으로 정확한 장소를 특정할 수는 없다.
일단 기감은 최대로 펼친 상태. 계속 움직이며 뭔가 특정한 상황이 걸리길 바랄 수밖에 없다.
‘이건가?’
기척 하나가 감지된다. 움직임이 없다.
‘죽은 건 아니야.’
그렇다고 크게 다친 것 같지도 않다.
‘단순히 정신을 잃은 건가?’
일단 그럴 듯한 인물을 찾았다. 지크는 그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뒷골목이었다. 대로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의외로 도시란 곳은 블록 몇 개만 넘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변하는 곳이 넘쳐흐른다.
사람이 한 명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여성이었다. 엎드려 있는 그녀를 지크가 돌려 눕혔다. 코에 손가락을 대본다.
‘호흡은 정상이고. 눈에 띄는 부상도 없어.’
아마도 어딘가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포션을 먹여둔다. 그리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한스와 스녹이 지크의 뒤에 내려섰다. 노웸이 바로 다시 작은 몸으로 변해 스녹의 어깨에 올라탔다.
“으음.”
여성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난다.
“정신이 듭니까?”
지크의 질문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 하던 여성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을 휙휙 보더니 지크를 보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끌었다.
지크는 그녀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뒀다.
“비명을 듣고 왔습니다만. 혹시 당신이 비명을 지른 사람이 맞습니까?”
“…아!”
그녀의 눈에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다.
“마, 맞아요.”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슨…일…?”
서서히 그녀에게 기절하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아까 물러날 때와는 전혀 다르게 그녀는 다급히 지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 그를…!”
그녀가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프랜을! 내 연인을 구해주세요!”
* * *
한 뒷골목에 난데없이 치안대가 나타났다. 횃불을 들고 뒷골목을 샅샅이 훑는다.
사소한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들의 움직임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뚜렷한 성과는 없어 보였다.
지크와 한스, 스녹은 그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었다. 치안대 사이에서도 한 명의 사람이 걸어 나온다. 그는 도시에서 재회한 요하임이었다.
딱딱한 얼굴이 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했다.
“어떻습니까, 백작님?”
지크의 물음에 요하임은 무겁게 대답했다.
“우리가 쫓고 있는 그 실종사건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