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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77화 (277/628)
  • 제277화

    그건 스누위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라일라의 조언과 응원에 따라 엘레나는 마력을 움직였다.

    올랜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엘레나는 마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지크만큼은 아니지만 엘레나의 마력도 충분히 거대하다. 때문에 그녀는 마력을 다루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라일라의 도움으로 스누위크를 떠나기 얼마 전 그녀는 약간의 마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노웸의 마력으로 마법 연습을 했던 경험도 도움이 됐다.

    그 이후로도 계속 마력 운용을 하길 얼마. 드디어 충분한 마력을 움직이게 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력을 사용한 마법을 시험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움직인 마력이 지팡이 끝으로 모인다. 엘레나가 떠나기 전, 윌위스가 준비해 준 최고급의 지팡이였다.

    처음이라 긴장한 탓일까. 그다지 난이도 있는 마법은 아니지만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하지만 그만큼 마법도 빈틈없이 완성됐다.

    “르! 윈! 온스! 쿠! 비욘!”

    엘레나가 영창을 시작했다. 마력이 지팡이 끝에서 짜임새 있게 배열된다. 그리고 잠시 후.

    퍼엉!

    엘레나의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아!”

    엘레나가 그걸 멍하니 지켜본다.

    라일라나 윌위스의 압도적이고도 공포스러운 마법에 비하면 무척이나 보잘 것 없는 마법이지만, 그래도 그건 엘레나에게 있어 그 어떤 마법보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선생님! 이거…!”

    “아주 잘 했어, 엘레나!”

    어딘가 현실미가 떨어지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엘레나에게 라일라가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리고 지크와 다른 이들을 휙휙 돌아봤다.

    날카로운 눈빛이 당장 엘레나를 칭찬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다.

    “축하한다. 드디어 첫 발자국을 뗐구나.”

    지크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다. 한스와 스녹도 축하에 동참했다. 힐끗힐끗 라일라의 눈치를 보는 것 같지만 분명 그건 눈의 착각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처음엔 기쁨에 차 말을 했지만 가면 갈수록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든다. 결국 그녀는 간신히 말을 끝내고 훌쩍거렸다.

    얼마나 얻고 싶었던 마법인가. 하지만 지금의 사정을 생각하면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났다.

    라일라가 엘레나를 끌어안았다. 마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엘레나의 울음소리가 주변에 흘렀다.

    다행히 엘레나의 울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멋쩍게 라일라의 품에서 떨어졌다.

    잠시 엘레나가 감정에 북받쳐 우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엘레나가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마력으로 마법을 발동한 건 사실인 터라 라일라의 주도 하에 작은 파티를 열기로 했다.

    노숙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화려하게 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모닥불에 둘러 앉아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는 건 가능했다.

    그렇게 그들이 때 아닌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나타난 게 바로 이블린의 마차였다.

    평소처럼 산속을 주파하는 이동경로였다면 만나지 못 했을 테지만 엘레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지크가 이번만큼은 가도를 이용하던 덕이었다.

    이블린이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일행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옆에 기사 한 명이 뒤따랐다. 이블린의 호위 기사인 브피오 리키였다.

    가도변에서 노숙을 하는 여행자에게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함부로 다가가는 모습은 호위 기사로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리키도 그다지 긴장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크와 라일라가 루즈 후작가에 입힌 은혜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당연히 리키도 지크 일행에게 강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지크는 연을 끊었다고 해도 스틸월 백작의 자제가 아니던가.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이런 길가에서 공녀님을 다시 뵙게 되다니. 여긴 크로뇽 왕국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크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실례지만 혹시 후작가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다른 나라 사람, 그것도 고위 귀족인 후작 영애가 다른 나라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당한 일도 있어 지크가 조금 심각하게 물었다.

    다행히 별 일은 아닌 듯 이블린이 손사레를 쳤다.

    “아니에요. 가문에는 별일 없어요. 왕국에도 마찬가지고요. 이번엔 그저 여행을 가는 것뿐이에요.”

    “여행말입니까?”

    “네! 잔말피로 가는 중이에요.”

    지크가 살짝 놀랐다.

    “이거 우연이군요. 저희도 잔말피로 가는 중이었거든요.”

    “어머, 그래요?”

    이블린이 눈을 반짝인다. 벌써 다음에 나올 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잘됐네요! 그럼 같이 가도록 해요!”

    한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블린의 말에 지크는 피식 웃었다.

    * * *

    잔말피. 오락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것들은 물론 술집이나 카지노 같은 것도 잔뜩 있다.

    말 그대로 먹고 놀기에는 최고의 도시. 그곳이 잔말피였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은 지크 일행의 사이로 이블린이 끼어들어 앉았다. 이블린의 일행도 이곳에서 밤을 새기 위해 근처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분이 있네요?”

    한스와 스녹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지만 엘레나는 처음 본다. 이블린이 그녀에게 호기심을 내보였다.

    “이번에 새로 파티에 들어 온 아이입니다. 라일라가 마법을 가르치고 있죠.”

    “그렇군요. 반가워요. 이블린 루즈라고 해요.”

    “엘레나 드웨인이에요.”

    이블린이 인사를 하자 엘레나도 예의바르게 답했다.

    이블린이 물었다.

    “여러분은 어째서 잔말피로 가는 건가요?”

    “오락의 도시잖습니까. 기분전환이나 할 겸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정확히는 라일라의 부탁이 있었다.

    그녀가 엘레나가 아직 우울해하는 걸 보고 무슨 방법이 없냐 지크에게 조언을 요청했고, 지크는 잔말피에 한번 데려가 보는 게 어떠냐는 대답을 했던 것이다.

    라일라가 지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일행의 목적지는 자연스레 잔말피로 정해졌다.

    “공녀님은 어째서 잔말피로 가시는 겁니까? 국경까지 넘어서 말이죠.”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에요. 오락의 도시라는 명성 때문에 예전부터 가고 싶었거든요.”

    “후작님이 용케 허락을 하셨군요.”

    “그 사건 이후 제 어리광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세요. 이번에도 기분을 좀 환기시키고 싶다고 하니 끙끙거리면서도 허락해주시던 걸요.”

    아무래도 루즈 후작은 딸의 어리광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난을 성공시킨 장난꾸러기같이 웃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서큐버스 이블린 루즈가 보이는 것 같아 지크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잔말피는 혼자 가면 재미가 좀 떨어질 텐데요.”

    “그게 걱정이었어요. 하지만 다행히 가는 도중에 친구들을 만났네요. 그 친구분들이 같이 놀아준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요.”

    싱글거리며 지크와 라일라를 번갈아 본다. 누가 봐도 ‘나랑 놀아줘’ 같은 모습이었다.

    지크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어차피 놀러 가는 것. 회귀 전의 부하랑 같이 가는 것에 지크는 별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라일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정말 고마워요!”

    라일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블린은 마치 어린애처럼 웃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엘레나가 옆에 있던 스녹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사람 후작 영애였어?”

    “응. 크로뇽 왕국 루즈 후작님의 따님이야.”

    엘레나는 정말로 놀랐다. 후작의 따님과 저렇게 친근하게 얘기를 하다니. 새삼 지크와 라일라가 대단해보였다.

    “사실 지크 님도 어느 백작가의 자제분이셔.”

    “진짜?”

    그렇게 엘레나가 새로운 정보를 계속해서 쌓아나가는 동안에도 얘기는 계속됐다.

    “그런데 가도에서 같이 놀 사람을 찾는 걸 보면 새로운 멋진 만남은 아직인 모양입니다.”

    라일라가 굳었다. 아무래도 이블린에게 알버스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외로 이블린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없었다.

    “그러게요. 아버지와 오빠가 여러 사람들의 초상화라든지를 보여주시긴 했지만 ‘이 사람이다!’하는 느낌은 없어서요. 그 작자 사건 이후로 제 연애나 약혼 문제에 대해선 두 분 다 조심스러워 하시는 편이니 서두르진 않으려고요.”

    그리고 이블린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혹시 아나요? 이 도시에서 멋진 만남이 있을지도요.”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크 씨가 많이 좀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럼 전 마차로 돌아갈게요.”

    “네, 내일 아침에 뵙죠.”

    각자 잘 준비를 시작한 지크 일행을 뒤로 하고 이블린도 자신의 마차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라일라를 데리고 일행과 조금 떨어졌다.

    “무슨 일이죠?”

    “지크 씨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가셨나요?”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나 살짝 긴장하고 있던 라일라의 기운이 쭉 빠진다.

    하지만 이블린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니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지크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네? 그때부터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은 건가요?”

    이블린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나가는 건 둘 째 치고 우리는 출발선에 설 생각도 없어요.”

    “그런가요.”

    실망하긴 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이블린이 뭐라 할 말도 없다.

    “그럼 혹시 다른 마음에 드는 남성분은 발견하셨나요?”

    “그런 것도 없어요.”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남성분은 지크 씨죠?”

    “따지자면 그렇죠.”

    “흐음.”

    이블린이 코를 울렸다.

    “일단 알았어요.”

    “…일단이라는 단어가 조금 걸리는데요.”

    “사소한 일엔 신경 쓰지 말자고요. 자, 가죠! 날도 늦었으니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죠.”

    이블린이 라일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민다. 일단 이야기는 끝났지만 이블린에게 밀려가면서 라일라는 못내 찝찝함을 느꼈다.

    * * *

    이블린의 일행과 합류한 지크 일행은 잔말피로의 여로를 계속했다.

    오랜만에 본 이블린은 무척이나 활기찼다. 예전에 봤던 남자에 대한 거리낌도 상당부분 사라진 듯 보였다.

    아직까지 낯선 남자들이 근처에 보이면 조금 움츠러들긴 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호전된 건 확실했다.

    분명 이블린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날개를 핀 채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그 기분 좋은 모습에 지크도 상당히 흡족해했다. 이 우연한 만남에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은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잔말피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육중한 성벽을 넘어 도시에 들어섰을 때 그 화려한 도시의 모습에 지크를 제외한 일행은 잠시 넋을 놨다. 그 정도로 잔말피는 화려함과 활기에 휩싸여 있었다.

    지크는 이미 회귀 전에 한번 봤기에 그렇게 커다란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도시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경비병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이곳은 오락의 도시의 명성만큼이나 범죄율도 상당히 높다.

    방심하고 있다가는 지갑을 하루에 세 번도 더 빼앗길 수 있는 곳이다. 그걸 생각하면 경비병들이 많은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도시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즐길 거리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단 숙소를 잡죠.”

    리키의 제안에 일행은 숙소를 찾아 도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지크는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의 눈이 대로변의 한 건물을 확인할 때였다.

    ‘응?’

    지크가 걸음을 멈췄다. 건물의 옆 쪽에 낯익은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사람도 지크를 발견한 모양이다.

    지크를 보고 크게 눈을 뜨는 게 보인다. 그것도 잠시. 그가 환한 미소와 함께 지크에게 다가왔다.

    “지크 님!”

    지크는 이 믿기지 않는 우연에 떨떠름해 하며 다가오는 자의 이름을 불렀다.

    “드라큘 백작님.”

    그는 회귀 전 지크의 또 다른 부하였던 요하임 드라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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