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회의가 시작됐다.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중앙의 강단으로 향했다.
간혹 힐끗힐끗 맨 앞자리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탑주와 최고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마법사들 그리고 엘레나가 앉아있는 곳이었다.
스누위크의 시장과 고위 관료단도 끼어 있었다.
강단엔 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이번 회의를 맡을 진행자였다.
그는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더니 큰 소리로 이번 회의가 열린 이유를 짤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바로 웨인 재위크를 불렀다.
지금 마탑을 휘감고 있는 혼란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주장하는 바를 먼저 듣고자 함이었다.
웨인은 뚜벅뚜벅 강단으로 걸어갔다. 이미 미혹이나 걱정은 마탑에 들어오기 전 전부 떨쳐버렸는지 그의 걸음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잔뜩 얼굴을 찌푸린 올랜드와 긴장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엘레나를 거쳐 자신을 무감정하게 쳐다보는 윌위스에게 머물렀다.
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하지만 웨인은 곧 시선을 뗐다. 그리고 정면을 똑바로 쳐다봐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많은 시선과 마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 *
그 시각. 지크와 일행은 도시로 들어와 있었다. 넷 다 수배가 된 상태지만 도시가 혼란하니 가벼운 변장으로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미모 때문에 변장이 힘든 라일라만이 가볍게 두건을 써 얼굴을 가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돌아다니는 건 분명 위험하기에 나머지 셋은 인적이 드문 곳에 대기했고 지크만이 홀로 마탑을 감시했다.
‘시작되는군.’
지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의 사람들이 마탑으로 들어가는 게 보인다. 모두 로브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었지만 지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분명 마법보다는 육체적 일에 더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게 무력이든 노동이든.
‘분명 저놈들은 재위크가를 포함해 쿠데타 세력이 동원한 자들일 텐데. 용병은 아닌 듯하고. 그냥 일을 하는 하인들이라기엔 몸의 균형이 제법이야.’
지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몰래 키우고 있었군.’
아마도 이 비슷한 일은 오래 전부터 계획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키우는 건 로브 놈들이 도와줬을 테고. 아마도 저 녀석들을 키운 증거는 올랜드 녀석이 쥐고 있겠지.’
확실히 지금까지 보아온 로브 놈들의 다른 계획보다는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미래의 마왕과 용사의 동료를 만들어야 하니 그런 건가.’
지크는 빙그레 웃었다. 저렇게 공을 들인 티가 나면 날수록 부수는 맛이 있는 것이다.
쿠데타 세력은 별 막힘없이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자들이 재위크가가 속해 있는 학파 소속의 마법사인 듯했다.
그들은 마탑의 로비에서 잠시 대기했다. 무리를 이끌고 온 마법사가 큰 소리로 뭐라 떠드는 게 보였다.
‘중요한 말은 아니군.’
귀를 기울여 보니 윌위스를 비판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가 하는 말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봤다. 그저 관심을 끄는 게 분명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로비에 있는 마법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와중, 쿠데타 세력 몇 명이 슬그머니 문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들이 마탑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아무리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다 하더라고 마탑의 커다란 정문이 닫히는 걸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명백히 반응은 늦었다.
사람들이 반응하는 순간, 마탑의 문이 닫혔다.
철컥!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됐다.’
지크가 마탑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겉으로는 언제나와 똑같이 위엄 있게 우뚝 서있는 마탑이었지만, 이제 그 안에 펼쳐지는 일은 언제나와 똑같지 않을 것이다.
* * *
처음의 적막한 분위기는 전부 어디 간 것일까. 회의의 열기는 점점 과열되어갔고 회의에 퍼지는 고성도 드높아졌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며 삿대질을 한다. 이번 사태를 완벽히 종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회의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본다면 절대 이번 회의로 종식될 것 같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마법으로 상대의 입을 닥치게 만들고 싶은 사람마저 있는 듯했다. 지팡이를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하지만 회의는 아슬아슬하게 이성적인 상황을 유지했다. 이미 고함과 욕설이 날아다니고 있는데 이성적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럼 당신들은 마탑주를 계속 신뢰하겠단 거요!”
“당연하지!”
웨인의 고함을 다른 마법사가 맞받아쳤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마탑주가 물러나야 한다는 거요!”
“지금까지 대체 뭘 들은 거요! 이유야 내가 몇 번이나 설명을 하지 않았소!”
“그딴 폭론과 궤변이 정말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대체 그 머리는 생각이란 걸 하기나 하는 거요!”
“그건 내가 묻고 싶소! 폭론과 궤변이라니! 이번에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정말로 부럽소이다! 그런 물렁한 생각을 할 수 있다니! 필시 평소 고민도 없이 살 테지!”
“뭐요!”
두 사람의 공방에 몇 사람이 끼어들더니 순식간에 시장바닥처럼 회의실이 시끄러워졌다.
회의의 진행자가 장내를 진정시키려했다. 바로 진정되진 않았다. 하지만 진행자가 큰 소리로 정숙을 요구하며 단상을 두드리자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소리가 잦아들자 진행자는 격한 발언을 삼가달라고 하고는 다시 회의를 진행시켰다.
“바로 마탑주에게 묻겠습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하지만 침착을 유지하려 하며 웨인이 말했다.
“마탑주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까?”
윌위스는 웨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여러 상념이 스쳤다. 이 혼란이 시작된 이래 그도 몇 번이나 생각을 했다.
자신이 정말로 물러나야 할 것인가. 그 정도로 자신의 잘못이 큰 것일까. 몇 날 며칠을 뜬 눈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없소.”
단호한 말이 조용한 장내에 울렸다.
환호와 야유가 뒤섞였다. 그 사이에서 윌위스와 웨인의 눈길이 뒤섞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소. 휴식 후에 다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씩 일어섰다. 모두 거친 회의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더러는 회의장에 남아 서로 의견을 교환했고 더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회의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웨인은 천천히 지켜봤다. 그리고 나가지 않고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료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시작할 때였다.
그 모습을 올랜드가 조용히 지켜봤다.
* * *
빵을 먹고 후식을 먹고 음료수까지 마신 후 이를 쑤시며 마탑을 보고 있던 지크.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느긋한 라이프 생활을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 같다.
하지만 그런 여유 있는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이라도, 앞으로 지크가 할 일을 알게 된다면 이득이든 뭐든 내팽개치고 도망을 갈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은 무료한 시선으로 마탑을 올려다보던 지크의 눈이 변했다.
‘신호다.’
계속 보고 있던 마탑의 창문에서 로브로 추정되는 천이 살짝 나왔다가 들어간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됐다.
올랜드의 것이 분명하다. 곧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신호였다.
지크는 일어섰다.
‘녀석들을 불러야지.’
인적 없는 곳에 숨어있는 라일라와 한스, 스녹을 불러야했다.
지크는 천천히 마탑으로부터 멀어졌다.
* * *
지크가 동료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안의 상태는 어떨까?”
라일라가 마탑을 올려다봤다.
“적어도 평화와는 먼 상태겠지. 확신할 수 있어.”
“기분 좋아 보인다?”
“안 좋을 일도 없잖아.”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하려면 빨리 하자. 엘레나가 걱정돼.”
“엘레나는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너처럼 사람들이 전부 신경줄이 질길 거라고 생각하지 마. 몸은 멀쩡해도 마음이 다쳐.”
“너도 충분히 신경줄은 굵잖냐.”
하지만 지크도 그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저벅저벅 마탑 앞으로 걸어갔다.
마탑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네 명의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넷 다 로브를 입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마탑의 마법사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지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절대 아니겠지. 로브 안쪽에 무기를 숨기고 있어.’
숨긴다고 숨기고 있지만 지크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뒤에서 라일라가 물었다.
“어쩔 거야? 몰래 숨어들 거야?”
“아니. 뒤에서 깔짝거리는 건 지금까지 많이 했어. 이제는 이걸 쓸 차례야.”
지크가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마탑 앞으로 다가갔다.
“멈춰라!”
지크가 다가오자 문을 지키고 있던 자가 손을 들어 막았다.
“지금 마탑은 출입금지다! 어떤 용건이 있어도 지금은 들어갈 수 없…!”
덥석!
지크의 손이 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 했다. 지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시끄러.”
후웅!
지크의 팔이 움직였다. 그대로 손에 잡힌 적의 머리를 마탑 벽에 찍었다.
퍼억!
둔탁하고 강렬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명도 없다. 주저앉은 코를 감쌀 시도조차 못한 채, 적은 벽에 피를 묻히며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적이다!”
다른 세 명이 일제히 로브 안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너희 마법사 아니었어?”
지크가 이죽이며 윈두르를 꺼내들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윈두르로 쳐냈다.
카앙! 카앙! 카앙!
세 번의 쇳소리. 지크에게 향하던 검이 일제히 튕겨나갔다. 상대의 가슴이 훤하게 드러났다. 윈두르가 이빨을 드러냈다.
서걱! 서걱!
두 명의 가슴에서 새빨간 피가 튀어나왔다. 지크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피를 피했다.
털썩! 털썩!
두 개의 몸뚱이가 쓰러졌다.
“이 자식이이이!”
남은 한 명이 고함을 지르며 지크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지크는 상대하지 않았다. 아예 그에게서 등까지 돌렸다.
날카로운 검이 당장이라도 지크의 무방비한 등을 베어가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퍼엉!
“끄아아아악!”
불꽃이 그를 집어삼켰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기도 놓치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불을 끄기 위해 땅바닥을 뒹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곧 그는 새까맣게 탄 채 숨이 끊어졌다.
저벅!
불탄 시체 옆으로 누군가 스쳐지나간다. 방금 마법을 날렸던 라일라가 지팡이를 꽉 쥐고는 굳은 눈빛으로 지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뒤로 한스와 스녹이 따랐다.
“가자!”
라일라가 의지가 가득 느껴지는 느낌으로 말했다.
“의지 좋네. 그래, 한번 화려하게 날뛰어보자고.”
지크가 문에 손을 대 힘을 줬다. 덜컹거리는 게 안에서 문이 잠긴 것 같았다.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힘을 더 줬다.
콰지지직!
자신의 존재의의를 지키지 못 하고 잠금쇠는 너무도 쉽게 부서졌다.
끼이이익!
마탑의 문이 열렸다.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로비에 몇 명의 사람이 보였다. 누가 봐도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누구…!”
말을 끝낼 새도 없다. 갑자기 짓쳐든 지크의 검기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 한 채 로비에 대기하고 있던 적들이 갈려나갔다. 일체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
지크는 당당하게 마탑에 발을 디뎠다. 그의 걸음을 막을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일행도 지크의 뒤를 따랐다.
“먼저 어디로 갈 거야?”
라일라의 질문에 지크는 가볍게 대꾸했다
“지하 감옥.”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