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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67화 (267/628)
  • 제267화

    지크는 부지런히 이번 혼란을 주도한 명문가들을 돌아다녔다.

    도시를 휘감는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가문의 경계는 꽤 심했지만 지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크가 가주의 집무실 같은 가문의 중요한 곳에는 별로 돌아다니지 않은 덕도 있었다.

    그가 노리는 곳은 전서구의 방, 혹은 가문으로 온 중요한 편지들이 잠시 모이는 집사의 방 정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암호문을 잔뜩 모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라일라의 작업도 많이 진척될 테지.’

    그녀에게 작은 성과가 있었다는 걸 들었다.

    지크도 라일라가 찾아낸 구절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어쨌든 그 이상한 문자인지 기호인지 모를 배열에서 의미 있는 구절을 뽑아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호평받을 성과였다.

    그렇게 지크가 발로 뛰고 라일라가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마탑을 휘감은 음모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결행일이 잡혔소.”

    올랜드가 지크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거친 필체로 흩날리듯 적혀 있는 글자가 보였다. 날짜였다.

    “3일 뒤군요.”

    “당신이 가져다준 암호문에 적혀 있던 걸 해석한 거요.”

    “결행일은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날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소. 무척이나 우연찮게도 정확히 3일 뒤에 마탑에서 전체 회의를 하기로 정해졌지.”

    “그것 참 굉장한 우연이군요.”

    “굉장한 우연이지.”

    지크와 올랜드는 서로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마치 더러운 음모를 꾸미는 작당모의 현장같이 보일 것 같았다.

    틀린 감상도 아니었다.

    “최고 회의와는 다른 건가보군요.”

    “말 그대로 마탑에서 어느 정도 명망이 있다 싶은 마법사들은 전부 모이는 회의요. 내일 모두의 의견을 묻고 듣고 절충해서 아예 이번 사태를 종결시킬 생각인 모양이오.”

    “물론 실제는 다르겠죠?”

    “얼마나 좋겠소. 거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억류한다면 도시의 고위층 대부분을 사로잡는 것인데 말이오.”

    “하지만 아무리 마탑주의 권한이 강하다고 해도 이 도시는 시장과 다른 관료들도 있지 않습니까.”

    “회의에 시장도 참석할 모양이오. 다른 고위관료도 함께.”

    “아주 먹음직한 사냥감들이 한곳에 가지런히 모이겠군요.”

    “진수성찬이 따로 없겠지.”

    “그래서 어떻게 한답니까. 거기에 마법적 함정을 깔아 폭파라도 시킨답니까?”

    “만약 그랬다간 쿠데타를 일으킨 놈들마저 모두 폭사하지 않겠소. 웨인 재위크를 포함해 음모를 꾸미는 마법사들도 일단은 참여를 할 테니 말이오.”

    “생각 같아서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음모를 꾸민 놈들만 딱 골라서 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도 동의하오.”

    지크의 말이 취향에 직격이라도 한 것일까. 올랜드가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런 정의롭고도 유쾌한 함정을 녀석들이 깔아줄 리 없소이다. 능력도 안 될 테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유폐시킬 모양이오.”

    “끝까지 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요.”

    ‘다행이군. 전부 폭사 운운했으면 손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라일라의 당부도 있었으니 정도 이상의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만약 올랜드가 그들을 바로 죽이는 음모를 짰다면 계획에 손을 댔겠지만 당분간은 올랜드의 쇼를 두 손 놓고 구경해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았다.

    “모르지. 유폐를 한다는 말은 상대의 목숨줄을 자기가 쥔다는 소리니까 말이오. 수틀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방해가 된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죽일 가능성도 있소.”

    “이자들 뒤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마탑과 도시의 실권을 쥔다고 해도 나라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스누위크는 도시국가도 아니며 다른 국가와의 접경지에 있는 곳도 아니다.

    이 쿠데타를 나라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장 토벌대가 올 것이다. 아무리 마탑의 전력이 강하다고 해도 국가의 전력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그때는 쿠데타로 인해 전력도 떨어져 있을 게 뻔하다.

    “뻔하지 않겠소. 명분을 만들겠지. 자신들이 이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명분을 말이오. 아니면….”

    올랜드가 마치 중대한 비밀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쪽에게 말 그대로 책임을 덮어씌우려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아마도 책임을 씌우려는 쪽은 마탑주겠죠.”

    올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소.”

    “물론이죠. 전 당신의 그 믿음에 대해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지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실 분이라는 건 알죠. 개인적인 정으로 계획을 일그러뜨리진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지금껏 지크와 쿵짝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준 올랜드는, 지금만큼은 무척이나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모를 막고 전후사정을 모조리 캐낸다면 아버지는 분명 무죄가 될 것이오. 나는 확신하오.”

    “부디 드웨인 씨의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물론 윌위스 드웨인은 무죄가 될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바는 절대 아니겠지만.’

    지크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올랜드는 지크의 속마음을 모른다.

    “고맙소.”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며, 올랜드는 그렇게 연기를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소.”

    “무슨 부탁입니까?”

    “엘레나를 지켜주지 않겠소?”

    “엘레나를요?”

    “전체 회의에는 엘레나도 올 것이오.”

    그녀는 명성 높은 마법사가 아니다.

    가문은 대대로 대단한 마법사를 배출해내고 현재에도 마탑주를 맡고 있는 윌위스 드웨인을 포함해 최고 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가진 마법사 둘을 배출해낸 명문 중의 명문이긴 하다.

    하지만 마력조차 갖지 못한 그녀가 전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이번 사태의 참고인으로서군요.”

    “그렇소. 다른 이들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일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엘레나는 더욱 그럴 테지. 처음부터 지켜달란 소리는 아니오. 지금 수배를 받고 있는 당신이 그럴 수도 없을 테고. 한창 소란이 일 때, 본격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상황을 봐서 그 아이를 지켜주시오.”

    지크는 올랜드를 쳐다봤다. 과연 저게 진심일까? 딸아이를 향한 부정의 발로일까? 아니면….

    ‘아직 이용가치가 남은 엘레나 드웨인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왜 그렇게 보시오? 어렵소?”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 지크를 올랜드가 의문스럽게 쳐다봤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내 친우의 제자입니다. 비록 음모와 오해 때문에 지금은 관계가 이상해졌지만 저와 라일라는 아직 엘레나를 아낍니다. 당연히 보호해야죠. 게다가 마탑주가 당신과 엘레나를 노리고 있단 걸 말한 자는 접니다.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고맙소. 거기에 대해서 실례가 안 된다면 라일라 씨와 그대의 종도 엘레나의 보호에 동원해주면 안 되겠소?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내게 남은 가족은 엘레나 혼자가 되오. 커다란 사태를 앞에 두고 내 욕심만 채우는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내 일생의 부탁이오.”

    거기엔 윌위스를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그렇기에 딸만이라도 멀쩡하게 살리고 싶은 아버지의 고뇌의 표정이 있었다.

    여타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안타까움을 느낄 만한 표정이다.

    그러나 지크는 이미 올랜드의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올랜드의 말에 숨겨진 뜻을 분석할 뿐.

    ‘흐음. 날 작전에서 배제하고 싶어 하는군.’

    아무래도 지크의 근거 없는 증거에 의한 예측에 실컷 휘둘렸으니, 적어도 최후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막을 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뭐, 좋아. 어디까지 어떻게 춤출지 봐 볼까.’

    “좋습니다. 녀석들도 모두 동원하죠.”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오.”

    올랜드가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만약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참가할 수밖에 없단 걸 알아주십시오.”

    “물론이오.”

    올랜드도 그 이상 바라는 건 무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마탑에서의 전체 회의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 * *

    저 멀리 지평선 위로 태양이 얼굴을 내민다. 밤의 마력에 빠져 고요 속에 잠들어 있던 세상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과 생물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세상에 활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곳. 스누위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탑의 주변만은 그 싱그러운 기운이 감히 기를 펴지 못했다. 오히려 잔뜩 억눌린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도처에 깔렸다.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른 때보다 마탑의 주변은 더욱 북적거렸다. 그러나 마탑에 모인 사람들 모두 긴장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차들에서 하나하나 사람들이 내린다. 모두 마탑에서 이름깨나 떨치는 마법사들이다.

    대부분은 자기 연구실에 처박혀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대충대충하며 사는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집에 가서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밥도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꼬질꼬질하던 로브 대신 깨끗하게 관리된 로브를 입었고 지팡이도 깨끗하게 닦았으며 머리나 수염 같은 것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무리 평소 연구에만 관심 있는 마법사들이라도 지금 마탑이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대의 마차가 마탑 앞에 멈췄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마차의 문장을 확인하고 시선을 멈췄다.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내렸다. 그를 확인한 순간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 소란을 알아챘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새삼스럽게 마탑을 한번 훑었다.

    언제나처럼 위엄 있게 하늘로 뻗어 있는 커다란 탑. 철들기 전부터 그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탑이었지만 왜일까. 오늘만큼은 언제나의 마탑과 좀 다른 것 같았다.

    그, 웨인 재위크는 시선을 내려 마탑의 입구를 쳐다봤다.

    마탑의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쳐다본다. 시선들에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긍정, 부정, 질시, 혼란, 경멸, 공포까지.

    그건 지금 마탑을 혼란에 빠뜨리게 한 사람들 중 최선봉에 선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시선들을 감내했다.

    저벅!

    한 걸음을 걸었다. 동시에 그는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부여잡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오늘 거사는 일어난다.’

    그리고 그는 패배자가 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눈은 앞으로, 턱은 높이, 입은 굳게, 걸음은 자연스럽게.

    미래에 더 높은 권세를 얻기 위해, 그는 앞으로 펼쳐질 전장에 걸음을 들이밀었다.

    * * *

    그 장소는 꽤 넓었다. 최고 회의가 마탑의 가장 꼭대기 층, 마탑주의 공간에서 열린다면, 전체 회의는 마탑의 중앙에서 열린다.

    2, 3층의 공간을 통째로 확장해 만든 전체 회의장은 무척이나 커다랬다. 많은 인원이 모일 수밖에 없는 마탑의 각종 행사를 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마치 커다란 강의실, 혹은 무대 같았다. 한쪽 아래에 강연 공간 같은 곳을 만들어놓고 그 주위를 계단식 의자가 빼곡히 들어찬 형태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웨인 재위크 같은, 이번 반기의 주를 이루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은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불안한 눈빛의 엘레나도 있었다.

    회의실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들어찼다고 생각된 순간.

    윌위스 드웨인이 들어섰다. 일순간 회의장은 침묵에 빠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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