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 가라앉지 않을까 생각했던 마탑의 혼란은 오히려 가면 갈수록 심해졌다.
윌위스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이다.
그것도 마탑 최고회의에 참가 권한이 있는 마법사 한 명과 그 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지만 명문가 출신에 충분히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마탑은 완전히 두 쪽으로 갈렸다. 아직 윌위스를 옹호하는 세력이 컸지만 반대 세력도 결코 무시하지 못 할 정도였다.
불어난 세력을 믿는 것인지 윌위스에 대한 공격은 점점 강해지고 과격해졌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최고회의에서도 고함이 오고 갔다.
“이게 지금의 상황이오.”
올랜드가 지크에게 말했다. 이마에 진 주름이 살짝 일그러진 모습이 그도 상당히 골치를 썩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듣는 지크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서로 짜고 치는 상황이라지만 마탑주에 대한 공격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서로 득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내 말이 그 말이다!’
올랜드가 속으로 고함을 빽 쳤다. 당장이라도 지크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이 상황을 만든 건 올랜드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지크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그가 얻은 증거에 따르면 미래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지크의 말을.
‘대체 무슨 증거냐고, 빌어먹을!’
이제는 정말로 그 증거란 것이 순수하게 궁금할 지경이었다.
로브라는 협력자들의 죽음과 지크의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란 신분만 아니었다면 당장 때려 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올랜드는 지크라는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크가 고민에 빠져 있는 게 보인다. 그의 입이 달싹이자 올랜드는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다시 억지로 되삼키는 마냥 이를 악물었다.
소리 내어 말하고 있진 않지만 지크의 입 모양은 분명 증거 운운하고 있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증거를 의심하게 둘 순 없어.’
“아마도….”
올랜드가 입을 열자 지크가 그를 쳐다봤다.
“혹시 저들의 의도를 아시는 겁니까?”
“그저 추측해봤을 뿐이오.”
지크에게 어떻게든 그럴 듯한 이유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려 만들어낸 의도다. 지크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마탑의 최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군요.”
무척이나 감탄하는 지크. 하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그래, 어디 한번 네 계획을 들어 보자.’
일단 생각해둔 건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크가 올랜드에게 알려준 미래란 건 막 던져둔 이야기에 불과했다.
무리수로 보일 정도의 이야기. 하지만 지크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야 이 녀석이 적당히 끼워 맞추겠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이유를 생각해내려 애쓰는 올랜드를 상상하며 지크는 낄낄거렸다.
지크의 속을 모르는 올랜드는 제법 기분이 풀렸다. 그래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자신을 높이 사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물론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올랜드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친위 쿠데타가 아닌가 생각되오.”
“친위 쿠데타 말입니까?”
“그렇소. 그걸 위해 지금 마탑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솎아내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되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마탑주에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동조를 표하는 사람들이 분명 나오고 있소.”
“마탑주와 손을 잡은 사람들이 아님에도 말이죠.”
“그렇소. 분명 아버지는 마탑주로서 상당히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감히 생각하오. 이번 사건 전에는 뚜렷하게 욕을 먹을 만한 일을 일으키지도 않으셨고. 하지만 원래 어디서나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지.”
“그런 사람들을 솎아낸다는 거군요.”
“그와 동시에 다른 세력 있는 가문과 마법사들을 음모에 엮을 생각일지도 모르오. 그들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마탑주의 권력과 권한은 강해지니까 말이요.”
“그리고 최종 단계가….”
“그렇소. 친위 쿠데타요.”
급하게 만들긴 했지만 올랜드는 계획을 짜놓고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후일 윌위스를 쫓아낼 계획 중 하나를 뽑아내 얼개를 잡고 이유를 붙이자 그럴 듯한 음모가 튀어나온 것이다.
“음, 확실히 가능성은 있군요.”
‘그럼 친위 쿠데타로 가자.’
마치 시장바닥에서 물건 고르듯 지크는 앞으로 일어날 음모의 방향을 정해버렸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올랜드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도 증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앞으로 마탑주와 협력하는 듯한 집안에 계속 침입해보겠습니다. 혹시 또 암호문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많이 보내라. 알았지?’
지크의 의도처럼 올랜드는 협력자들에게 보낼 암호문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자신이 말한 친위 쿠데타의 신뢰성을 높이려는 이유였다.
“이것도 드웨인 씨가 암호를 풀 수 있어서 가능한 거겠죠. 설마 드웨인 씨가 그 암호를 풀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설마 내가 아는 문자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소.”
올랜드는 결국 암호문을 지크에게 알렸다. 물론 전부 알려 준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해독할 수 있을 수준이라고 알린 정도다. 하지만 올랜드나 지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로 원하는 건 극명하게 달랐지만.
“고대 어떤 나라의 문자라고요?”
“그렇소. 내가 어학 쪽으로도 꽤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오. 취미로 하던 연구가 이런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소.”
로브들이 알려준 암호를 이렇게 알려줘도 되나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일에 실패하고 멋대로 죽어나자빠진 그놈들 책임이지.’
올랜드는 아주 깔끔하게 책임을 로브놈들에게 미뤘다.
“다만 나도 연구 중인 녀석인지라 모든 걸 알진 못 하오. 시간이 걸리는 거 어쩔 수 없지.”
지크에게 암호를 다 가르쳐줄 생각은 없다. 그럴 필요도 못 느꼈고 주도권을 잡고 있는 부분이 필요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지크도 암호에 크게 관심을 주진 않았다. 다만, 올랜드에게 전부 맡기지도 않았다.
“제 동료인 라일라도 그 암호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녀석도 드웨인 씨의 지식에는 감탄하고 있지요.”
“부끄럽군요. 재능 있는 후배에게 본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것 같은 대화. 하지만 그 본질은 많이 달랐다.
‘라일라도 암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암호를 가짜로 알려주는 것 같은 장난은 치지 마라.’
그것이 지크가 한 말의 의도였다. 물론 지크의 검은 속을 모르는 올랜드니 지크의 말의 숨은 뜻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각심은 충분히 가졌다.
‘서투르게 조작 같은 건 못 하겠군.’
그렇게 올랜드의 사고는 착실하게 지크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드웨인 씨에게 이 정도로 큰 도움을 받게 되다니. 사실 정말로 드웨인 씨가 마탑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협조해주실까에 대해서 상당히 의문을 품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되시니까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만, 하나 착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올랜드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직까지 아버지를 믿고 있고, 혹시나 있을 아버지의 죄가 확연하게 드러날 그 순간까지 아버지를 믿는 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주저하지도 않을 거고요.”
누가 보면 아버지에 대한 애틋하고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자식의 단호하지만 슬픈 믿음이라고 생각될 장면이다. 실제로 올랜드의 표정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지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하시겠어.’
그리고 속으로 빈정거렸다.
* * *
지크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온갖 문서와 책들로 가득 쌓인 테이블 위에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라일라에게 쪽지 몇 개를 건넸다.
“오늘자 암호다.”
“고마워.”
라일라는 쪽지를 받아 한창 무언가를 적고 있던 종이 옆에 놓았다.
“잘돼가?”
“적어도 얼마 전처럼 단서가 아무것도 없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
라일라가 펜을 놓고 기지개를 쭉 폈다. 조금 엉거주춤하던 몸을 바로 하고 의자를 돌렸다.
“쉬게?”
“조금. 오늘 하루 종일 펜대만 놀렸더니 몸이 굳었어. 눈도 좀 침침한 것 같고.”
과장스럽게 어깨를 돌린 후 눈 옆 부위를 꾹꾹 누른다.
“쉬엄쉬엄 해. 암호는 그리 급할 것 없어. 단서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단서도 나왔잖냐.”
“쉬엄쉬엄 하는 거야. 어차피 당분간은 할 일도 없는 걸, 뭐. 애초에 스누위크에 온 이유도 암호 해독에 도움 되는 게 있나 하는 이유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그랬나.’
애초에 스누위크에 온 이유는 고대 제국 클로원과 그 문자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였다.
‘너무 여러 일이 있다 보니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군.’
어떻게 보면 지금 이 도시에 온 목적에 충실한 사람은 라일라뿐인지도 몰랐다.
“계획은 잘되고 있어?”
라일라가 물었다.
“그래.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이맥스로 진행될 거야. 그 때 올랜드 녀석은 꼭대기까지 쭈욱 올라갔다가….”
지크가 자신의 말에 맞춰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훅 아래로 내렸다.
“쭈욱 떨어지겠지.”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줘.”
“걱정 마. 머리에 새겨두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크의 웃는 낯을 보고 있으면 그다지 믿음직하게 들리진 않는다.
“아, 나쁜 놈들은 당연히 제외겠지?”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라일라는 머리를 살짝 부여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은 그렇게 해도 정말로 죄 없는 인간들을 건드리진 않는 터라 신뢰는 하고 있었다. 물론 죄가 있어 지크의 목표가 된다면 얄짤 없겠지만.
쉴 만큼 쉰 건지 라일라는 다시 암호의 해독을 위해 의자를 돌렸다.
“성과는 있어?”
“어느 정도는. 그래도 단서가 더 많으면 작업 속도는 더 빨라질 거야.”
“그건 걱정 마. 앞으로도 계속 가져다 줄 테니까.”
올랜드가 계속 암호를 보내는 이상 단서는 꾸준하게 늘어날 것이다.
“그럼 됐어.”
라일라가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지만 지크는 오히려 고개를 쭉 빼 라일라가 하는 작업을 쳐다봤다. 라일라도 뭐라 하진 않았다.
“그게 비올루윈의 고대 유적에서 가져온 탁본이지?”
“응. 여기에 가장 쓸 만한 정보가 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진짜로 쓸 만한 정보가 있을 진 몰라. 운이 좋아야 돼. 종이가 모자라서 탁본을 전부 뜬 게 아니거든. 어느 부분이 중요한지 몰라서 드문드문 뜨기도 했고.”
하지만 라일라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전체적인 글자에 비해 뜬 탁본의 양이 너무 적었다.
‘나중에 꼭 더 가져오자.’
어떻게든 지크를 꼬셔 다시 한 번 그 곳에 가야 했다.
“그래, 수고해라.”
흥미가 사라졌는지 지크가 라일라의 방을 나갔다. 고개도 들리지 않고 대충 손을 위로 휘저어준 후 라일라는 다시 문자에 파고들었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얼마 안 돼 라일라는 구절 하나를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구절 하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잘못 해석했을 수도 있고.’
무언가 행사의 금기에 해당하는 구절일까. 하지만 라일라는 그 이상 생각을 멈췄다. 요새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와 꽤 무리를 했기 때문에 머리도 몸도 상당히 삐걱대고 있었다.
‘좀 쉴까.’
그녀는 작업을 중단했다. 켜 놓은 촛불을 불어 껐다.
불이 꺼지기 전, 촛불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녀가 해석해 놓은 구절을 살짝 비췄다.
[절대로 너무 많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