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스누위크가 소란스럽다. 도시 안을 상당한 수의 병력이 누비는 모습이 보였다. 시민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최근 스누위크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에 시민들은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병사들이 갑자기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니 스트레스가 한층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가판대에 올려진 과일 하나를 사서 깨물었다. 그리고 도시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병력을 쳐다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민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난리야? 전쟁이라도 났어?”
“마탑주님의 손녀를 찾겠다고 저 난리란다.”
“손녀? 지금까지 계속 찾고 있었잖아.”
“성과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이젠 병력이란 병력은 다 동원해서 도시를 이 잡듯 들쑤시겠대.”
“병력을 동원할 거라니. 그럼 지금까지 돌아다니던 병사들은 뭐야?”
“말 그대로 총동원을 하겠다는 거야. 아무리 이 도시가 마탑 때문에 안전하다 해도 기본적으로 도시를 지키는 병력은 필요해. 병사들이 동원됐어도 적어도 도시를 지킬 기본적인 병력은 대기하고 있었어.”
“잠깐! 그럼 도시를 지킬 병사까지 전부 동원한다는 거야?”
“그러시겠단다. 이미 바깥에도 병력이 쫙 갈렸어. 도시 바깥까지 들쑤시겠단 거지.”
지크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귀를 뗐다. 다시 병력을 바라본다.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곱지 않은 게 느껴졌다.
과연 정말로 저 많은 병력을 동원한 이유가 사람들에게 퍼진 소문과 같을까. 시민들의 저런 곱지 않은 시선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일단 회의에서는 지금의 소문과 같은 이유로 병력을 동원한다고 했었다. 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윌위스가 정말로 억지로 밀어붙였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윌위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극소수지만 윌위스가 드디어 미쳤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휙!
과육이 사라지고 씨만이 남자 지크는 아무렇게나 던졌다. 입가를 쓸어 입술에 남은 과즙을 닦아 낸 후 지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앞으로 꽤 소란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틀 뒤. 지크는 회의에 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출근길 같기까지 하다. 며칠 전부터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병사들은 아직까지 거리를 서성거렸다.
벌컥!
여느 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지크를 제외한 전원이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지크가 늦게 온 건 아니다. 지크는 원래 중간 즈음에 오는 사람이었다.
“모두 일찍 오셨군요.”
지크는 태연하게 인사하곤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아직 회의 시간까지는 좀 남아 있긴 하지만, 사람들도 전부 모였으니 오늘은 일찍 시작하도록 합시다.”
윌위스의 제안에 사람들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일찍 모인 날은 종종 있었지만 그때는 회의 시간을 앞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별 불만 없이 윌위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회의는 내 손녀인 엘레나 드웨인을 찾는 것이오.”
윌위스가 뜬금없이 이 회의의 의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일. 하지만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 회의는 필요 없어졌소.”
윌위스가 지크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모두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분위기가 확연히 이상하다. 지크가 주변을 돌아본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뚜렷한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일부는 살기까지 머금고 있었다.
지크가 웃었다. 지금껏 그래도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던 지크다. 하지만 그가 취한 행동은 예의와는 먼 행동이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꼬았다. 누가 봐도 예의 있어 보인다고는 말하지 못할 그런 자세.
“들킨 모양이군요.”
자신에게 향하는 적대적인 시선 따위는 아랑곳않고 태연한 어조로 지크는 그렇게 지껄였다.
“네, 맞습니다. 엘레나는 제가 납치했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당황한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따로 연락을 받고 일찍 와 지크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엘레나를 납치한 작자가 회의에 참석까지 하며 자신들을 농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연히 분노를 했다.
윌위스의 말 한마디만 떨어지면 저 건방진 범죄자에게 단죄의 심판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상상한 지크는 자신들의 추궁에 추하게 발버둥치다 결국 도망치려 하는 모습이었지, 저렇게 별다른 추궁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죄를 냉큼 내뱉는 모습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런 태연한 모습으로.
윌위스도 지크의 그 모습이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납치했다? 지금 그리 말했나?”
윌위스의 말에서 존대가 사라졌다.
“이미 전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이 무대를 준비하신 것 같은데요.”
지크가 힐끔 문 쪽을 쳐다봤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 왔다. 반짝이는 창칼과 단단한 갑옷이 반짝였다.
그들이 지크를 포위하며 창칼을 들이댔다.
목 앞까지 날카로운 창날이 밀고 들어왔지만 지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부 인정한다면 이쪽도 편하군.”
윌위스가 일어났다. 차가운 그의 눈이 지크를 쏘아봤다.
“순순히 아는 걸 전부 내뱉는 게 좋을 거야. 조금의 고통이라도 줄이고 싶으면 말이야. 네놈의 동료들도 곧 네 옆에 전부 끌려올 거다. 그러니 도움 같은 걸 바라고 있다면 꿈도 꾸지 마라.”
“걱정 마십시오.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까.”
“…왜 그렇게 태연하지? 이 상황에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 성싶더냐!”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는 지크에게 윌위스가 일갈했다.
도망갈 틈은 없다. 주변에는 스누위크 최강의 마법사인 윌위스 자신을 포함해 마탑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법사들이 즐비했다.
게다가 지금 지크를 포위하고 있는 병력들도 스누위크에서 정예로 꼽히는 자들. 질로도 양으로도 지크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지크의 태도에 껄끄러운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윌위스가 눈짓을 했다. 지크를 끌고 가라는 신호였다.
지크를 겨눈 창칼이 더 접근했다. 조금만 더 들이밀었다간 지크의 몸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몇몇 병사가 그렇게 지크를 견제하는 사이 쇠사슬을 든 병사들이 다가왔다.
미스릴 같은 희귀 금속이 합금되어 있어 평범한 쇠사슬보다 훨씬 더 단단한 것이었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지크가 물었다. 여전히 태연한 어조다.
“뭐냐.”
“엘레나를 납치하려던 다른 세력. 로브 놈들에 대해서는 알아봤습니까?”
“…아직은 알아보지 못했다. 너를 잡아 쳐넣은 다음에 생각해야지.”
“그놈들도 엘레나를 납치하려 한 놈들입니다. 그놈들이 납치해가던 엘레나를 제가 빼앗았으니 확실하죠.”
“네놈의 말을 믿을 이유도 없고 설령 네 놈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을 생각은 없다.”
“굳이 믿어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적에 대해 얘기하는 거죠.”
“진정한 적?”
“네, 진정한 적이요.”
주변 몇 명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인다. 하지만 윌위스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말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나중에 해라. 곧 말하고 싶은 건 물론이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말해야 할 테니까.”
윌위스가 손을 들자 병사들이 지크의 몸에 쇠사슬을 둘렀다. 주변 마법사들도 지크에게 지팡이를 들이댔다. 윌위스도 마찬가지. 혹시나 지크가 아티팩트로 수작을 부릴 위험도 있기에 윌위스의 지팡이에는 벌써부터 가볍게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마라! 병사들은 이곳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압니다. 여기는 물론 라일라가 있는 숙소와 한스, 스녹이 있는 도시 밖 오두막까지 병사들이 포위하고 있겠죠. 그걸 숨기려고 시민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요란스럽게 병력을 움직인 거 아닙니까?”
지크가 무슨 말을 하든 표정 변화가 없던 윌위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눈치는 빠르군.”
“제가 한 눈치 하죠. 그렇지 않으면 납치 같은 것도 제대로 못 하거든요.”
“하지만 이제 눈치채봤자 늦었다.”
“아뇨,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크가 진하게 미소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갈 수단은 없다. 하지만 윌위스는 지크의 미소에 불안을 느꼈다.
“빨리 묶어!”
쇠사슬을 묶던 병사들이 손놀림을 좀 더 빨리 했다.
하지만 그건 헛수고였다.
후웅!
마력이 움직였다. 아티팩트를 사용한 게 분명하다.
“막아!”
윌위스가 외쳤다.
이미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다른 이들에게는 대응 방법을 알려준 상태. 높은 실력의 노련한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마법사들의 움직임도 기민했다.
그가 예전처럼 투명화 마법을 사용하든 아니면 공격 마법을 사용하든 그들은 모두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크가 사용한 마법은 그런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지크의 몸이 사라졌다. 쇠사슬이 힘없이 떨어졌다.
“뭐야, 투명화인가!”
“막아! 일단 몸으로 둘러싸라!”
병사들이 급히 자신들의 몸을 물 샐 틈 없이 겹친다.
“젠장, 쇠사슬은 어떻게 푼 거야!”
“일단 녀석이 빠져나가는 걸 막는 게 먼저다!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 투명화라고 완벽하게 시야에서 사라질 순 없다! 왜곡된 공간을 찾아라!”
“아무리 수준 높은 투명화 아티팩트라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법사들도 외치며 여러 가지 마법을 동원해 지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윌위스를 포함한, 이곳에서도 최고위급 마법사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소용없네.”
웨인이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말렸다.
“소용없다니, 그 무슨 말입니까!”
“이미 그놈은 이곳에 없어.”
“네?”
이 물샐 틈 없는 포위를 어떻게 빠져나갔다는 걸까.
하지만 명문 재위크가 가주의 말이다. 허투로 들을 수 없다.
“건물을 빠져나갔다고 해도 아직 주변에 있을 겁니다! 당장 수색을 명령하겠습니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웨인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소용없다니까! 어차피 이 주변에도 없을 게야!”
“그 무슨…!”
지휘관의 의문을 더 이상 해결해줄 생각이 없는지 웨인이 윌위스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저희가 녀석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니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소.”
그들의 짐작이 맞다면 그 물건은 마탑주인 윌위스조차 감히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대국의 황제 정도나 가지고 있을까 의심되는 물건.
“대체 무슨 상황인 겁니까!”
지휘관이 물었다. 윌위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녀석이 순간이동의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오.”
“…네?”
“뭣!”
“말도 안 돼!”
당황성을 토해내는 지휘관과는 다르게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아티팩트는 그만큼 귀한 물건이다.
윌위스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걸 아티팩트에 부여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인 것이다.
“그럼 이 근처에는 이미 없겠군요.”
놀라 어버버거리는 마법사들과는 달리 지휘관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별다른 단서가 없다면 일단 그 자의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병력을 파견하겠습니다.”
“우리도 가겠네.”
윌위스가 움직이자 다른 마법사들도 따라 움직였다.
* * *
탓!
지크가 발을 디뎠다. 그가 도착한 곳은 라일라의 방이었다.
이미 외출 준비를 끝마친 라일라가 창밖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크는 그녀에게 말했다.
“가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