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지크는 스누위크 밖으로 나왔다. 도시에서 나온 적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멀리 나간 건 아니다. 고작해야 성문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나온 이유는 한스와 스녹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는 다 했지?”
“네!”
“확실히 했습니다!”
소리가 크진 않지만 기합은 확실하게 들어간 목소리로 둘이 대답했다.
“하긴, 준비할 것도 없었나.”
어차피 기본적인 것들은 마법 상자에 쟁여져 있으니 소모된 식재료를 채워 넣는 것 외에 그들이 준비할 건 없었다.
물론 준비란 게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한 말은 기억하지?”
이번에도 둘은 바로 대답했다. 지크가 한 말을 그들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잊어버리고 싶어도 지금까지 받아온 고된 훈련이 지크의 말을 본능적으로 머리에 새겨버렸다.
둘의 만족스러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지크가 둘의 어깨를 툭 짚었다. 그리고 얼굴을 한스와 스녹의 얼굴 사이로 들이밀었다.
“미행이 붙었다. 고개는 움직이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려던 한스와 스녹이 급히 목에 힘을 콱 줘 얼굴을 멈췄다.
“계획대로만 해. 그럼 괜찮을 거다. 알았지?”
한스와 스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라.”
지크가 둘의 몸을 돌리고는 등을 탁 쳤다. 한스와 스녹은 웅장한 성벽을 뒤로하고 앞으로 향했다.
잠시 한스와 스녹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지크도 몸을 돌렸다.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상당히 대단한 사람이 나왔군.’
지크는 눈동자만 움직여 살짝 성벽 위를 쳐다봤다. 그곳에서 약한 기척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 정확한 장소는 파악되지 않았다.
‘은폐 기술이 제법인데.’
기척 탐지에 상당한 재주를 지닌 지크가, 이번에 올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감각을 바짝 세우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탐지를 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마법인가?’
아무래도 마법으로 유명한 도시에다가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고급 전력인 마법사가 직접 나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내가 투명화 아티팩트를 사용한다는 걸 대놓고 보여줬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수준이 지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높은 것 같았다.
‘가만, 혹시 마탑주가 직접 나왔나?’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조금 위험하려나.’
그 순간 지크가 감지하고 있던 기척이 조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움직이는군.’
역시 한스와 스녹의 뒤를 밟아 엘레나가 있는 곳을 알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움직이는데도 기척은 여전히 극히 희미하다. 정말로 윌위스 드웨인 본인이 왔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크는 벌써 저만큼 가고 있는 한스와 스녹의 등을 쳐다봤다.
긴장은 하고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진 않다. 둘 다 적당히 좋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잘할 거야.’
대놓고 정면으로 붙으란 것도 아니고 윌위스가 바로 쳐들어갈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다고 지크는 생각했다.
‘그리고 녀석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고.’
지크는 몸을 돌려 다시 도시 안으로 향했다.
* * *
‘들어가는군.’
공중에서 윌위스는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지크를 조용히 지켜봤다. 수상한 낌새는 없다. 윌위스는 지크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는 재위크가에서 붙인 감시인들이 감시해주겠지.’
지금 중요한 건 지크가 아니다. 윌위스의 몸이 움직였다. 은밀하지만 굳건하게 흐르는 마력이 휘몰아치며 그의 몸을 이끌었다.
한스와 스녹은 성문에서 뻗어진 대로를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 옆으로 샜다.
잘 정비된 도로는커녕 자그마한 소로조차 나지 않은, 빽빽한 잡초들이 우거진 초원으로 둘은 발을 디뎠다.
윌위스는 집중했다. 대로에서 벗어난 이상 저들이 언제 시야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눈을 크게 뜨고 윌위스는 한스, 스녹과 조금 떨어진 공중에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둘은 초원을 지나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시야가 가려지는데.’
윌위스가 눈을 찌푸렸다. 고도를 낮출까. 하지만 윌위스는 오히려 고도를 높였다.
숲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본다면 숲의 모습이 전부 들어온다. 두 명이 숲의 어느 방향으로 나올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마법 감각도 날카롭게 벼렸다. 그들이 투명화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윌위스의 의심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우웅!일반인들은 느낄 수 없는 희미한 변화가 그의 감각에 걸렸다.
‘사용했군!’
윌위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법적 기운을 더욱 잘 느끼려 했다. 마법적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희미한 기운. 어중간한 마법사들은 눈앞에 있어도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다.
‘재위크가에서 느꼈던 기운과 비슷해.’
정말로 저들을 따라가면 손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마법적 기운이 숲을 나왔다. 눈으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가 확실히 있었다.
마법적 기운이 계속 느껴졌고, 집중해서 보면 공간에 약간의 어색함이 보이기도 했다.
마법적 기운은 계속 이동했다. 벌써 상당한 거리를 움직여 왔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아직 마력의 여유는 남아 있다. 마탑주란 지위를 운으로 딴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력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게 오래 이동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게다가 상대의 이동 속도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평범한 사람이 전력질주를 하는 속도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갑자기 마법적 기운이 흔들리더니 한스와 스녹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아티팩트의 시간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들은 곧 가까운 산을 타기 시작했다. 산 중턱까지 올라갔을 때 낡은 집 한 채가 보였다. 아마도 사냥꾼 같은 자들의 오두막인 듯싶었지만 버려졌는지 상당히 헐어 있었다.
단, 최근에 어느 정도 보강을 했는지 어떻게든 거주라는 목적에는 가까스로나마 부합되었다.
그곳을 봤을 때 윌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레나가 저런 곳에 갇혀 있다고?’
누가 봐도 탈출하기 무척이나 쉬워 보이는 곳이다. 감금이라는 단어와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혹시 묵여 있기라도 한 건가.’
윌위스의 걱정이 더 솟았다. 한스와 스녹이 없을 때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못 먹고 꽁꽁 묵여 있을 손녀의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쿵! 쿵!
한스가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갑옷?’
문을 열어준 자를 보고 윌위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은빛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자였다.
‘공범이 있었나?’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었던가?’
저런 무장 병력이 동료로 있을 정도면 외부 세력의 개입이 당연히 의심된다. 하지만 갑옷의 움직임이 뭔가 어색해 보였다.
‘아니, 골렘인가.’
갑옷으로 만들어진 골렘. 저런 게 경비를 서고 있다면 엘레나가 탈출 시도를 못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윌위스는 조용히 오두막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나 싶어 가까이 접근하진 못했다.
창문 몇 개가 보였다. 다 헐은 집답지 않게 창문에는 굳게 창살이 쳐져 있었다. 엘레나가 감금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한층 깊어졌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의 손녀가 집 안에 있었다.
안도. 그리고 분노. 윌위스의 감정이 극한의 상하 움직임을 보였다. 자신과 엘레나를 속였다는 배신감이 쓰렸고 그로 인해 엘레나가 받았을 상처가 가여웠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것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도시로 날아가 지크와 라일라도 태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그 어느 때든 흥분이 상황을 좋게 만드는 적은 별로 없다. 특히 지금은 그의 손녀가 적의 손에 납치되어 있는 상황.
윌위스는 올라오는 열 이상으로 내려앉은 눈빛을 오두막 안으로 향했다.
집 안에 엘레나를 제외한 사람은 한스와 스녹 둘뿐이었다. 움직임은 더 있었지만 전부 골렘인 듯한 갑옷들뿐이었다.
엘레나는 다행히 행색은 멀쩡한 것이 고문 같은 걸 당한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침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언뜻 보면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갑옷을 입은 골렘들이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걸 보면 겉보기처럼 자유로운 건 절대 아니리라.
확인할 건 전부 끝났다. 윌위스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이 엘레나를 향했다.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엘레나. 반드시 구해주마!’
손녀를 적의 손에 두고 떠나야 하는 게 무척이나 가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누위크의 마탑주로서 그리고 엘레나를 위해서라도 적의 뿌리 그 자체를 뽑아버려야 했다.
‘단 하나도 놓칠 수 없지!’
손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떨어지지 않을 발을 움직여 그는 오두막 앞을 떠났다.
* * *
윌위스가 오두막을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이미 하늘은 어두컴컴해져 달과 별만이 필사적으로 어둠의 침략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두막에도 촛불이 피어낸 불꽃이 은은하게 안을 비추고 있었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엘레나가 뚱하게 말했다.
“저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죽이던 한스와 스녹이 엘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서로를 마주 봤다.
“슬슬 괜찮을까요?”
“그러지 않을까.”
스녹의 질문에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는 거야!”
엘레나가 짜증을 냈다. 한스와 스녹이 엘레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이고 대화를 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스녹은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노웸을 툭툭 쳤다. 노웸이 어깨에서 툭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엘레나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엘레나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며칠 동안 오두막을 비운 스녹 때문에 마법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노웸을 빌려주지 않은 것이다.
감금당한 상태에서 마법 공부만이 낙이었던 엘레나로서는 엄청나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마법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마음이 살짝 풀렸다.
그녀가 노웸을 껴안고 스녹을 쳐다봤다.
“어디 갔다 왔어?”
종종 얼굴을 비추는 게 전부인 한스와는 다르게 스녹은 항상 그녀의 곁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는 두 사람 모두 자리를 비웠다. 대신 갑옷 형태의 골렘만이 남겨졌다.
“말 못 해.”
예상했던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안 나쁜 건 아니었다.
“흥!”
엘레나는 아니꼬워 콧소리를 냈다. 다시 마법의 연습을 하려다 문득 그녀의 눈에 골렘이 들어왔다.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스녹이 풀어둔 골렘. 짜증 나는 것들이지만 마법사의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선생… 라일라 씨가 만드셨다고 했지?”
나쁜 의도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처지도 일반적인 인질과 다른 건 안다지만 그래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라일라라 일단 엘레나는 선생님 소리를 접고 있었다.
“맞아.”
“엄청난 고성능은 아니라지만 완성도는 괜찮네. 꽤 고생하셨겠어.”
“그래? 금방금방 만드시던데?”
주변에서 캔 뿌리식물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스녹이 대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몰라 태연한 스녹과는 달리 엘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걸 금방금방 만들어?”
그녀가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정말로 마법 재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엘레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녹과 엘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걸 조용히 지켜보던 한스는 창가를 쳐다봤다.
‘지크 님이 습격이 있을 거라면 우리가 오두막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작될 거라고 하셨었지.’
하지만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말은 곧 지크가 예상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는 뜻.
‘여기가 들킨 건 확실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별일 없겠군.’
지크에게 신호를 줄 필요는 없어졌다. 아마도 사건의 시작은 지크가 있는 곳부터 시작될 테니까.
한스는 에스텔레이드를 옆에 세워 두고 뒷머리에 깍지를 낀 후 가볍게 투닥대고 있는 스녹과 엘레나를 지켜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