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올랜드 드웨인은 자신의 저택에 귀환했다. 허리를 숙이는 사용인들에게 대충 대꾸를 해주고는 침실로 들어왔다. 그대로 로브를 벗어 침대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방 한켠에 있는 찬장으로 걸어갔다. 비싼 술이 찬장에 가득 쟁여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냈다. 잔도 하나 챙겨 들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호박색 술이 잔에 가득 따라졌다. 약간의 흔들림에도 술이 밖으로 넘쳐흐를 것 같다.
올랜드는 재주 좋게 잔 속 술이 흐르지 않도록 입가에 가져가 한 입에 넘겨버렸다.
“크으!”
목 안으로 화끈한 감각이 올라온다. 피곤함에 흐려졌던 정신이 번쩍 든다.
작게 숨을 내뿜어 입 안에 남아 있는 알코올 기운을 몰아냈다. 그리고 다시 술을 따랐다. 이번 술은 적당히 채웠다.
탁!
옆 테이블에 술병을 올려놨다. 그리고 창가로 움직였다.
벌컥!
커다란 창문을 열자 방에 딸린 조그마한 테라스가 나타났다. 올랜드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댔다.
어둠 속에 잠긴 도시가 보인다. 곳곳에 조명으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도시의 어둠을 몰아내기엔 한참 부족했다. 그새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몸이 바깥바람에 조금 식었다.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신다.
“빌어먹을!”
문득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뇌리로 조금 전의 일이 흘러갔다.
자신들의 대화를 몰래 훔쳐 듣던 침입자에게 퍼부어진 윌위스의 막강한 마법 폭격.
말석이라지만 마탑 최고회의에 얼굴을 내밀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우쭐해 있던 올랜드의 자부심을 아주 간단히 깨부숴 버리는 광경이었다.
물론 침입자를 놓치긴 했지만 올랜드는 결코 윌위스의 능력을 폄하하지 못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어떤 수를 쓰든 간에 난 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해.’
너무도 거대한 벽. 이제 그 등을 넘어 앞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 등은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컸다.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재능 없던 자신에게 향하던 서늘하고도 무관심한 눈.
언제나 자신의 양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던 그 시선이, 이제는 극복했다고 여겼던 그 시선이 다시 떠올랐다.
‘젠장!’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잔이 깔끔하게 비었다.
‘과연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약한 생각이 들었다. 윌위스가 만들어낸 거대한 불꽃이 자신을 향하는 상상에 진저리를 쳤다.
게다가 지금 그의 의지를 약하게 만드는 이유는 새삼 자각한 아버지의 거대함만이 아니었다.
‘그 멍청한 놈들은 왜 갑자기 죽어가지고!’
자신과 손을 잡은 정체불명의 집단을 생각하며 그는 이를 갈았다.
지금껏 그들과 손을 잡고 손해를 본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작전도 충분히 성공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설마 전부 죽어버릴 줄이야.’
심지어 생존자도 없어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한동안 알 방도도 없었다. 아직 계획의 성공까지 한참 남았는데 협력자들이 전부 죽어버리다니.
‘안 그래도 꼬인 판국에!’
계획을 진행하기엔 아직 시기가 일렀다. 애초에 몇 년 정도는 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생각이었는데 변수 하나가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
‘라일라.’
갑자기 엘레나의 마법을 가르치겠다고 나타난 여자. 실력은 좋았지만 올랜드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엘레나의 상태는 그 어떤 고명한 마법사가 나타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윌위스와 다퉈가면서까지 엘레나의 편을 들었다.
엘레나가 마법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이익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엘레나가 마법 공부를 포기하게 둘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올랜드는 가슴에 손을 대봤다. 언제나 자신의 통제를 충실히 따르는 마력.
그가 영창을 외며 마법을 사용하기 전까지 순수하게 존재해야 할 그것들에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한 힘.
‘이것 때문에 마법 구사가 힘들어졌어.’
라일라의 일행이 데리고 있는 환수의 마력을 잠깐 엘레나에게 빌려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이건 아마 그 때문일 터.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엘레나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는 것이 더 위험스러웠다.
‘아버지가 그걸 알아버렸어!’
일단 당장 깊게 파고드는 기색은 없었지만 언제까지 그러게 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들키진 않을 것이다. 그건 상당히 교묘한 조치였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믿고 마음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의 아버지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진실에 도달할지도 모르니까.
스누위크의 마탑주란 존재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서둘러 계획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대차게 꼬여버려, 엘레나가 납치당한다는 골 때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행히도 엘레나를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지크, 라일라 그 일행!’
지금도 계속해서 마력 속에 이질적인 힘이 섞이고 있다. 엘레나가 환수를 이용한 마법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걸로 그들을 몰아붙이기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이질적인 힘은 공개할 수 없다.
‘어떻게든 꼬리를 잡아야 해!’
그리고 엘레나를 찾아야 한다.
그의 딸의 존재는 무척 중요하다. 그녀는 정체불명의 무리와 연결되는 무척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녀석들이 전부 죽어나자빠졌지만 상관없어. 녀석들에게 엘레나가 무척 중요하다 했으니 다른 무리가 곧 찾아오겠지.’
그럼 계속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계획이 완전히 무르익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엘레나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문득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목표를 위해서라지만 분명 그는 자신의 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잘 돼야 자식도 어깨를 피는 법이지. 그리고 영원히 이럴 것도 아니잖아.’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엘레나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엘레나를 위해서라도 이 계획은 성공해야해. 그리고….’
올랜드는 마력을 움직여봤다. 지금은 이물질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력. ‘나의’ 마력이다.
‘엘레나의 엄마를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평소에는 부드럽게 흐르는 마력이 오늘은 조금 거친 것 같았다.
* * *
전날에 재위크가의 마당이 초토화되는 소란이 일었지만 엘레나를 구출하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는 모임은 쉬지 않았다.
재위크가에 몰래 침입했던 침입자보다는 여전히 엘레나의 납치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혹시 그 침입자가 엘레나의 납치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기에 회의는 더더욱 열려야 했다.
하지만 한 명,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
“이 자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웨인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늦는 건 분명 불쾌해 할 만한 일이지만 그의 짜증은 조금 도를 지나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게, 늦는 자가 바로 지크였다. 평소에도 못마땅해 하는 자가 늦는 판국이니 그의 말투가 온화할 리 없었다.
“설마 이 자리에 꼈다고 자신이 뭔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러니까 떠돌이는!”
웨인의 목소리가 커져감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점점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남의 짜증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듣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웨인의 불쾌감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크 씨가 너무 늦는군요. 일단 사람을 보내보되, 오늘은 먼저 회의를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이의 충고에 윌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오늘도 그럴 듯한 소식은 없었다. 그저 전날 재위크 저택에 침입한 수상한 자에 대해 몇 얘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오늘의 회의도 성과는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지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윌위스, 올랜드, 웨인 세 사람만이 남았을 때, 지크에게 보냈던 사람이 돌아왔다.
“지크 씨는 오늘 아파서 오지 못하셨답니다.”
“아파?”
웨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프면 먼저 못 오겠다고 사람을 보내야지, 이쪽이 무작정 기다리게 만들다니.”
웨인은 윌위스에게 지크의 험담을 몇 마디 했다. 윌위스는 조용히 그 말을 들어줬다.
어제 그의 집의 마당을 초토화시키고 침입자도 붙잡지 못 한 만큼 윌위스는 당분간은 어느 정도 그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윌위스의 눈에 올랜드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올랜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뭐가 말이냐?”
“어제의 침입자말입니다.”
윌위스와 웨인의 표정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하지만 올랜드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분명 포션 같은 걸로 몸을 치료했습니다만, 아버지의 강력한 마법을 몇 방이고 얻어맞았습니다. 아무리 치료를 했다 해도 한계가 있겠죠. 특히 마력이나 정신은 큰 타격을 받았을 겁니다.”
올랜드는 두 사람과 눈을 맞췄다.
“후유증이 있을 수밖에 없겠죠. 한데, 바로 그 다음 날 지크 씨가 아프다라….”
“그놈이 침입자로군요!”
웨인이 손뼉을 짝 치며 벌떡 일어났다. 흥분했는지 그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올랜드가 말했지만 웨인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놈은 의심스럽다고요!”
이미 그 침입자가 지크라고 확신하듯 그가 빠른 속도로 말했다.
“마탑주님! 당장 그놈에게 들러 보죠! 병문안을 왔다는 핑계를 대면 그 녀석도 별말 못 할 겁니다. 그 때 한 번 떠보죠!”
“그러니까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올랜드가 조금 큰 소리로 말하자 웨인이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번에 녀석이 의심스럽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지 않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당장 그 놈을 끌고 오자는 게 아니오. 어제 어디 있었는지 한 번 떠보자는 거지요.”
여기에는 할 말이 없는지 올랜드도 입을 닫았다. 의기양양하게 올랜드를 한 번 쳐다본 웨인이 윌위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쩌시겠습니까, 마탑주님.”
* * *
윌위스가 올랜드와 웨인을 이끌고 지크를 방문한 건 그림자가 조금 늘어지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지크는 침대에 앉아 있고 그의 옆에 라일라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지크가 일어서려 하자 윌위스가 손을 내저었다.
“일어나지 마시오. 아프다면서. 편하게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호의를 받겠습니다.”
윌위스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올랜드와 웨인은 그의 뒤편에 섰다.
“두 분도 앉으시지요.”
“괜찮습니다. 아픈 분의 곁에 계속 머무르기도 좀 그렇죠. 금방 갈 테니 의자는 필요 없습니다.”
올랜드가 대답했다. 웨인은 대답하지 않고 지크를 요모조모 살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을 곳이 없나 보는 것이었다.
“어디가 아픈 것이오?”
윌위스가 물었다. 지크가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요새 좀 무리를 했더니 탈이 난 모양입니다. 몸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더군요.”
“무리를 시킨 사람으로서 사죄를 드리오.”
“아닙니다. 그제 제 수련이 모자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엘레나를 구하려 하는 건 전적으로 제 의지이니 마탑주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훈훈한 광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윌위스의 눈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지크의 상태를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