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라일라는 얼음송곳을 거칠게 테이블에 내려놨다. 올랜드에 대한 분을 그것에 대고 푸는 모습이다.
“협력자가 올랜드 드웨인이라면, 자기 아버지를 마왕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거네?”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래서 결국 엘레나가 자기 할아버지를 죽이게 만들었고.”
“그래.”
“대체 얼마나 쓰레기인 거야!”
“하나 더 추가해줄까? 정말로 올랜드가 엘레나의 재능 같은 것을 빼앗고 있었다면 그가 윌위스 드웨인과 갈등을 빚어가면서까지 엘레나의 마법 공부를 지지한 이유가 완전히 달라져.”
“…엘레나의 공부가 고스란히 자기의 힘이 되니까?”
“정확히 엘레나의 뭘 빼앗는지를 모르니 확답은 못 하지만 가능성은 차고 넘치지.”
라일라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가족, 그것도 자기 자식을 이렇게 철저하게 이용하는 비정한 아버지가 있을 줄이야.
“얘, 지크.”
라일라가 정말로 스산하고 냉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작자, 언제 조질 거야?”
“이야, 우리 라일라 화났네.”
“나 장난할 기분 아니야.”
눈앞에 올랜드가 있으면 당장 자기가 가진 최강 마법을 때려 박아 세상에서 지워버릴 기세다.
“아쉽게도 당장은 못 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
이제 막 원흉의 정체를 깨달았을 뿐이다. 준비도 뭣도 되지 않은 상황.
“이런 건 차츰차츰 해결해야 하는 법이야. 증거를 찾든 함정을 파든 천천히 몰아가야지. 뭐, 걱정은 하지 마. 너도 알다시피 이런 건 내가 전문이잖냐.”
지크는 웃었다. 지금껏 지크에게 당했던 작자들이 본다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돌릴 그런 웃음이었다.
“하긴, 네 타깃이 된 이상 그 작자도 곱게 죽진 못하겠지.”
“물론이지.”
평소에는 마왕이 될까 봐 지크가 필요 이상으로 손을 쓰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꼈던 라일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크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아,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있어.”
지크는 마법 상자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라일라에게 건넸다.
“재위크가에서 주운 거야.”
그건 전서구의 발에 묶여 있던 암호를 베낀 것이었다.
“해석 좀 해줘.”
라일라가 인상을 팍 썼다.
“고대 제국의 문자를 해석하는 것조차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인데 또 다른 일거리를 떠넘기는 거야?”
“어려워?”
“당연히 어렵지! 뭔가 단서 같은 거라도 있다면 모를까 막무가내로 해석해 달라고 해서 해석이 되면 암호를 뭐 하러 쓰겠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지크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다른 단서가 없었다면 그 암호를 토대로 어떻게든 실마리를 잡아갔겠지만 이미 윌위스와 거하게 붙은 후 흑막을 알아낸 이후인 것이다. 이미 암호는 해석하면 좋고 해석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하여간.”
지크에게 가볍게 눈을 흘기고 라일라는 지크가 건네준 쪽지를 봤다.
“어?”
“왜?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어?”
라일라가 급히 자신의 마법 상자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지크는 그 책의 정체를 알아봤다.
그건 아드로원 대수림에서 가져온 고대 제국의 책이었다. 라일라가 책을 폈다. 지크도 호기심이 솟아 고개를 빼고 책을 쳐다봤다.
“봐봐.”
라일라가 지크의 앞으로 펼쳐진 책을 밀었다. 그리고 지크가 가져온 쪽지를 책 옆에 두었다.
지크는 책과 쪽지를 번갈아봤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비슷하지?”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의 말처럼 지크가 가져온 쪽지와 고대 제국의 책의 글자가 너무도 비슷했다.
“설마 고대제국의 글자를 암호로 쓰고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두 글자가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잖아.”
“그렇다면 웨인 재위크가 어떤 식으로든 고대 제국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린데.”
지크는 자기가 베껴 온 쪽지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라일라가 물었다.
“웨인 재위크가 수상하다고 했지? 우리가 엘레나를 납치한 걸 알아챈 것 같다고도 했고. 그럼 올랜드의 동료인가?”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 둘 사이는 결코 좋은 게 아닌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게 연극일 가능성도 있지만….”
지크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윌위스에게 기습을 받기 전, 그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웨인 재위크는 윌위스 드웨인에게 뭔가 떠보는 것 같은 질문을 했었어.’
순간 지크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웨인 재위크는 자기가 누구와 손을 잡고 있는지 모르나?’
아마도 이렇게 전서구로서 암호만을 주고받는 사이일 수도 있다.
‘윌위스 드웨인을 떠본 건 자기가 손을 잡고 있는 자가 윌위스 드웨인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어서고.’
살짝살짝 퍼즐이 맞춰진다.
‘만약 그게 올랜드 드웨인이 의도한 방향이라면.’
회귀 전 마탑주는 올랜드 드웨인. 그리고 윌위스 드웨인은 마왕이 된다.
‘설마 이 자식. 자기 죄를 윌위스에게 전부 뒤집어씌워서 쫓아냈나?’
거기서 재위크가까지 한꺼번에 처리했을 수도 있다.
‘아니, 재위크가뿐만이 아니라 몇 가문 더 묶어서 처리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야 제가 마탑주로서 올라갈 가능성이 더 높아지니까.’
“뭐야? 표정이 심각해졌는데. 뭔가 알아냈으면 알려줘 봐.”
지크는 자신의 추측을 라일라에게 말했다. 라일라가 입을 조금 벌렸다.
“…그런 음모를 짜고 있다고?”
“아직까지는 추측의 영역이야. 이제부터 그걸 확인해야지.”
지크는 암호가 적힌 쪽지를 들어 올렸다.
“어쨌든 웨인 재위크가 연락을 주고받는 게 정말로 올랜드라면 이 암호는 올랜드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올랜드는 로브 놈들의 협력자로 생각되는 놈인 만큼….”
지크가 쪽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로브 놈들이 고대 제국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결국은 고대 제국이구나.”
“그래. 어쩌면 굳이 제국의 문자를 해석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 올랜드 놈에게서 해석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크는 라일라의 능력을 신뢰한다. 아무런 단서도 없다면 또 모르지만 아드로원 대수림에서 가져온 관련 자료가 잔뜩 있는 지금은 시간만 있다면 라일라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도 없다.
“결국은 올랜드 드웨인을 들이받아 볼 일이군.”
지크가 뚜둑 손가락을 꺾어 소리를 냈다. 그게 꼭 미래에 올랜드의 몸에서 날 소리 같았다. 물론 그때 날 소리는 훨씬 더 크고 소름 끼치는 소리일 것이다.
라일라가 한숨을 쉬었다.
“엘레나가 걱정이야. 나중에 할아버지와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아버지가 배신자라는 걸 알게 되면 충격이 클 텐데.”
“하지만 해야 하는 건 알지? 아무리 고통이 심하다고 해도 썩은 부위는 도려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
“나중에 네가 위로해줘라. 너는 엘레나의 스승이니까 새빨간 타인보다는 엘레나에게 조금 더 위로가 되겠지.”
“물론 그럴 생각이야. 한껏 힘내 봐야지.”
라일라는 주먹을 꽉 쥐며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사태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깊었다.
“네 생각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 아무래도 올랜드가 저지른 일이 하나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물론 엘레나에 관련된 사건 말이야.”
“…또 있어?”
“이건 한번 확인해야 할 문제이긴 한데 말이야. 과연 엘레나가 첫 번째일까?”
불친절한 지크의 말에도 라일라는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설마 엘레나 이전에 그 빌어먹을 짓을 다른 사람한테 또 했다고?”
“생각해 봐. 아무리 부인의 학파로 바꿨다고 해도 올랜드 드웨인은 윌위스 드웨인의 아들이야. 당연히 윌위스 드웨인의 플루 학파가 더 익숙하겠지. 윌위스 드웨인이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시켰을 테니까. 미래의 화염 마법의 대가인 엘레나를 생각하면 엘레나의 재능도 플루 학파에 어울리지 않는 건 절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올랜드 드웨인은 굳이 부인의 학파인 콘로드 학파의 마법을 익혔어.”
라일라가 입을 막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딸만이 아니라 자기 부인의 마법을…!”
“이건 시기를 따져봐야 할 거야. 올랜드 드웨인의 마법이 갑자기 성장했을 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엘레나의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를 말이야. 하지만 만약 올랜드가 급격한 성장을 한 시기가 엘레나의 엄마가 죽은 직후라면….”
지크가 말을 끊었지만 라일라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올랜드 드웨인은 자기 부인을 죽여 그 마법력을 빼앗은 것이라고.
* * *
밤새 스누위크에서 굉장한 소란이 일어나고 지크가 음모의 진상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작 스누위크의 소란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엘레나는 편안한 자세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가족?”
“응, 가족.”
오늘도 마법 훈련을 도와준 노웸을 꼭 껴안고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앞에는 요새 계속 말 상대가 되어준 스녹이 앉아 있었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감금된 채 지내는 것은 꽤 고달픈 일이다.
그게 삼시세끼 훌륭한 식사가 꼬박꼬박 나오고 자신이 좋아하는 마법 공부를 듬뿍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외출할 자유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사람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엘레나를 위한 일이라는 스녹의 설득과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증표가 없었다면 엘레나는 이미 벌써 몇 번이든 탈출 시도를 했을 것이고 한스와 스녹은 엄청난 골치를 썩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엘레나는 얌전히 이곳에서 마법의 연습만을 했다. 하나, 그것도 하루 종일 할 수는 없는 법.
그럴 때는 한스나 스녹이 말상대를 해줬다. 그리고 대부분 그녀의 말상대는 스녹이었다.
때문에 둘은 상당히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정도까지 친해져 있었다. 엘레나의 질문도 그런 환경으로 인해 나온 것이었다.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야. 너는 집을 나와서 지크 씨 일행과 여행을 하고 있는 거잖아. 가족들이 말리거나 하지 않았어?”
노웸의 몸이 굳었다. 아무래도 이 주제는 스녹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노웸에게 있어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걸 눈치챈 스녹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족은 없어. 형제는 원래 없었고 아버지랑 어머니도 예전에 돌아가셨거든.”
“아, 미, 미안해.”
“괜찮아. 예전 일인걸.”
스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피붙이는 아니지만 가족 같은 사람은 있었어. 샘이라고. 옆집 사는 사람이었는데 마치 형같이 굴었지.”
스녹은 자신의 얘기를 들려줬다. 고된 광산의 삶. 정말로 싫었던 삶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거기엔 분명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스녹의 과거를 흥미 있게 들었다.
“그런 사람이었어. 나이도 젊은 주제에 나이 많은 사람들마냥 꽉 막힌 사람이었지.”
“그래도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뭐, 그렇긴 하지.”
스녹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등불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 보였다.
“난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가족의 전부야. 어머니는 십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녀가 아련한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본다.
“무척이나 상냥하고 착하신 분이었어. 어렸을 때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드는 게 제일로 행복했었지.”
스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어머니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에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솔직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혼자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을 정도야.”
살짝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당시만 해도 아버지는 내게 정말로 쌀쌀맞으셨거든. 아니,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어.”
“그래? 들어본 얘기와는 조금 다른데? 네 꿈을 응원해 주시는 좋은 분 아니었어?”
“지금은 그렇지만 예전엔 달랐어. 그때는 굉장히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가. 당시의 아버지는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거든.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서 언제나 초조해하시고 계셨어.”
“그건 들었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서 늦게나마 성공을 하셨다고도 들었고.”
엘레나는 살짝 웃었다.
“맞아. 아쉬운 건 아버지의 성장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이뤄졌단 거야. 그게 좀 많이 안타까워. 아버지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시기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기는 정말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거든. 어머니가 조금만 더 사셨다면 상냥해진 아버지와 행복한 시절을 보내셨을 텐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