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집으로 돌아온 웨인은 로브를 벗고 지팡이를 전용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옆에서 대기하던 사용인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웨인 재위크는 성질이 더러운 편에 속했다. 평소에도 그를 시중들 때 긴장을 해야 하는데 지금 웨인의 기분은 분명 나빠 보였다.
이럴 때 꼬투리를 잡히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마윈은 어쩌고 있느냐.”
재수 없게도 지금 웨인의 심기를 가장 거슬릴 질문이 날아왔다. 그러나 대답을 거부할 순 없다. 사용인은 각오를 하고 대답했다.
“여전히 방 안에 틀어박혀 계십니다.”
웨인이 나직이 이를 간다. 사용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각오하고 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웨인이 사용인을 보고 손짓을 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굶주린 사자 앞에서 탈출한 기분이 이럴까. 그는 이 작은 행운에 기뻐하며 얼른 방을 나갔다.
웨인은 의자에 앉았다. 오늘 있었던 회의가 생각이 났다.
“빌어먹을!”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장식품을 집어 벽에 던졌다.
쿠웅!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 박살나진 않았지만 분명 금 정도는 생겼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장식품의 안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 빌어먹을 떠돌이가!’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웨인이 상상하던 것과 별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무례하고 건방졌다.
감히 자신의 아들을 저 꼴로 만든 놈과 얼굴을 맞대는 것만으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극도의 인내를 동원해 참아냈다.
‘한데 날 모욕해!’
그가 먼저 시비를 걸긴 했지만 웨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신분과 권세를 생각하면 그 정도 비꼼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상대는 오히려 역으로 모욕을 줬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특히 마지막!’
로브 집단에 대한 의견을 뒤로 미루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스러운 자 취급을 받았다. 그게 가장 열이 받았다.
물론 진짜 그를 범인이라고 의심하는 자들은 없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도 잠깐에 불과했다.
지크의 말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중 하나고 재위크가는 명망 있는 가문이다.
그러나 그 잠깐의 의심도 그는 심히 불쾌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들켜버렸잖아!’
지크의 말대로 그는 의도를 가지고 로브 집단의 화제를 빼버렸다. 한데 그것이 지크의 한 마디로 소용없어져 버렸다. 이제 윌위스 드웨인은 로브 집단도 뒤를 캘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웨인은 종이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두고 펜을 들었다.
펜이 종이 위를 거칠게 긁어댄다. 검은 잉크가 규칙적인 문자를 만들어냈다. 알아볼 순 없었다. 세상에서 쓰이는 문자가 아니었다. 암호였다.
그는 종이 몇 장을 더 꺼내 똑같은 암호를 적어 넣었다. 종이를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향한 곳은 저택 가장 꼭대기, 전서구들을 키우는 곳이었다. 편지 개수만큼 비둘기를 준비한 후 다리에 편지를 묶었다.
푸드득!
전서구들이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하늘을 몇 번 돌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걸로 됐겠지.’
웨인은 전서구들이 돌던 곳을 쳐다봤다. 해가 지는 하늘은 마치 핏빛과도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 * *
엘레나 수색은 계속됐다. 도시를 이 잡듯 뒤지거나 도시 주변의 숲을 철저하게 쑤셔댔다. 그 와중에 애꿎은 짐승들과 몬스터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여전히 엘레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크는 오늘도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명분은 당연히 엘레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뒷골목 나쁜 놈들을 패면서 엘레나에 대해 묻고 다녔다.
물론 그들이 엘레나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엘레나는 내 손에 있으니까.’
지크에게 당한 자들이 알면 억울해서 눈을 까뒤집을 사실인지만 지크는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나쁜 놈들을 괴롭히는 건 죄가 아니잖아.’
정말로 심플한 사고방식이었다.
“커헉!”
이번에도 당연히 답을 주지 못 한 양아치를 벽에 던져버리고 지크는 다른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스트레스를 풀… 아니, 엘레나의 정보를 알지도 모를 나쁜 놈을 찾을 생각이었다.
‘…흠’
지크의 눈동자가 살짝 옆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행동은 그대로였다. 다리는 앞으로 전진했고 팔이 가볍게 흔들렸으며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그러나 지크의 감각은 뒤쪽을 감지하고 있었다.
‘미행이 붙었군.’
인원은 둘 정도다. 지크는 모른 척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암살자들 같은데?’
움직임이 절대로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칼밥 먹고 사는 놈들도 아니었고 마법사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몸을 숨기고 상대를 추적하는 걸 전문적으로 배운 놈들이었다.
‘로브 놈들인가?’
하지만 그만큼 실력 있는 움직임은 또 아니었다.
지크는 더욱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이 나왔다. 주변에 사람이 사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버려진 곳이었다.
지크는 마치 엘레나를 찾는 것처럼 그곳을 뒤졌다.
‘…안 나오는군.’
습격하기 좋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을 했는데도 상대의 움직임은 없다. 그저 몸을 숨긴 채 지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습격은 목적이 아니야.’
그렇다면 무슨 목적일까.
지크는 수색을 종료했다. 지크가 이동하자 그들도 이동했다.
지크는 이번엔 번화가로 나와 봤다. 그들은 여전히 그의 뒤를 따라왔다.
‘뒤를 밟고 있군.’
그렇다면 생각나는 원인은 하나다.
‘내가 엘레나에게 가는 걸 기다리고 있어.’
지크가 엘레나를 납치한 걸 들킨 게 분명했다.
분명 위험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크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잡았어!’
평소에 자기를 몰래 뒤따르는 것들을 역으로 잡아 정보를 듬뿍 뽑아내는 게 지크의 방식이지만 이번엔 그만뒀다.
오히려 그들이 혹시라도 자신을 놓칠까 봐 속도까지 조금 늦췄다.
지크가 하루종일 도시를 돌아다닐 때도 그들은 계속해서 지크를 따라다녔다. 그건 지크가 숙소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숙소에 접근하진 않는군.’
그 정도까지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지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추적자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잠깐 한 명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교대했군’
저들이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크는 다시 한번 숙소에서 나섰다.
미행인들이 그를 따라붙었다. 지크가 가게에서 과일 몇 개를 사고 숙소로 돌아오자 그들도 다시 숙소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두 명의 인기척이 숙소 주변에 더 자리를 잡는 게 느껴졌다.
움직임이 비슷한 것이 지크를 따라온 미행인들과 같은 부류의 놈들 같았다.
‘라일라에게 붙은 놈들이로군.’
지크의 추측대로 하나의 기척이 지크의 옆방으로 오고 있었다. 그곳은 라일라의 방이었다.
지크는 방문을 열고 몸을 상체만 밖으로 빼냈다.
“깜짝이야!”
갑자기 열린 문에 화들짝 놀란 라일라가 보였다. 지크가 웃자 고운 아미를 가볍게 찡그렸다.
“무슨 일이야?”
“할 얘기가 있어. 들어 와.”
둘은 지크의 방에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지크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감시가 붙었어.”
“감시가 붙었다고?”
라일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나한테 각자 둘씩 붙었지. 미행 실력이 꽤 좋은 걸 보니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놈들이야. 아, 그렇다고 그렇게 위험한 놈들은 아니야. 만약 놈들이 널 공격한다면 충분히 반격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아무리 내가 근접전에 약하다고는 해도 숨어다니는 놈들한테 당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누가 보냈지?”
“몰라. 예상은 가지만.”
“말 돌리지 말고 말해봐.”
“흑막. 아니어도 그놈들과 관계된 자들.”
“이유는?”
“우리가 엘레나를 납치한 걸 눈치 챈 것 같아.”
라일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떻게? 이런 쪽 뻔뻔함에서는 도가 튼 너한테서 흘러나가진 않았을 거고, 나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는데?”
“뻔뻔함이라니. 안 좋은 소리를 하네.”
“그건 사실이잖아.”
지크의 야유에도 라일라는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혹시 한스나 스녹이 들킨 건 아니겠지?”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저렇게 슬금슬금 접근하지는 않았겠지. 지금 녀석들의 행동을 보면 우리가 엘레나에게 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럼 어떻게 들킨 거야?”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야.”
지크가 깍지를 끼고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얼굴에는 얄미운 웃음. 라일라는 긴장감이 스르르 내려가는 걸 느꼈다. 저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도 네 계획대로라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마치 무대 위의 익살꾼 대사처럼 들렸다. 라일라는 가볍게 지크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툭 차며 말했다.
“놀리지 말고 말해 봐.”
“레이디께서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과장되게 인사를 한 지크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처음부터 짚고 넘어가 볼까. 엘레나의 납치가 무척 갑작스러웠다고 생각하지 않아?”
“갑작스러워?”
“그래. 우리가 잠깐 감금당하기 전에 내가 한스와 스녹에게 몇 개의 명령을 내려놓은 건 알지?”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거기에 엘레나 납치는 우선순위가 조금 아래였어. 그것 말고도 드웨인가와 재위크가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방법은 많으니까. 게다가 설혹 한다고 해도 조금 더 뒤에 하는 게 효과가 좋거든. 드웨인가와 재위크가의 사이가 지금보다 더욱 험악해졌을 때 결정타로서 말이야.”
“그런데 예상 외로 엘레나의 납치가 빨리 이루어졌단 거지?”
“그것뿐만이 아니야. 엘레나를 납치하기 위해 로브 놈들이 직접 나섰지. 지금까지의 놈들을 보면 철저하게 뒤에서 자신들의 대리인을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놈들이야.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사건이 막바지에 이를 때나 그랬지. 그런데 이번엔 도시의 중추까지 들어와서 엘레나를 납치한다는, 위험성 높은 일을 했어.”
“벌써 사건이 마무리될 시기였나?”
“그러기엔 사건이 너무 안 터졌어. 지금까지 녀석들이 저지른 사건들을 생각해 봐.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마윈 재위크를 두들겨 팬 것밖에 더 있어?”
라일라는 눈빛으로 지크의 말을 재촉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녀석들이 계획을 대폭 앞당겼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녀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적으로 움직인 것도 이해가 가거든. 계획이 엇나갔으니 직접 움직이더라도 결과를 내야지.”
그렇다면 그 조심성 많은 로브 놈들이 직접 움직인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럼 녀석들은 왜 계획을 앞당겼을까? 변수가 생겼으니까. 녀석들이 너무너무 싫어하는 변수가.”
“우리의 존재 때문이란 거야? 우리가 엘레나에게 마법을 가르친 것 때문에?”
“그건 아닐 거야.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려 드는 상황은 언제든 생길 수 있어. 마탑이 있는 도시의 명문가 영애라는 신분에 할아버지는 마탑주, 아버지도 대단한 마법사야. 마법을 배우는 걸로 파탄 날 계획을 세울 리가 없지.”
“그럼?”
“그런데 우리는 특이한 방법을 썼잖아.”
“…노웸의 마력.”
문득 라일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너, 감금당한 엘레나에게 노웸의 마력을 이용해 계속 마법 공부를 해도 된다고 했지! 설마 이런 걸 생각해서?”
지크는 빙글빙글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