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해석에 윌위스가 적잖이 당황해 했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작게 수군거렸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는 엘레나를 납치한 자, 혹은 집단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죠.”
“납치된 드웨인 양을 찾기 위해 모인 자리요. 대체 그런 당연한 이야기는 뭐 하러 하는 거요.”
웨인 재위크가 다시 투덜거렸다. 지크는 그를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친절하고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의 말은 좀 끝까지 듣는 게 어떻습니까? 질문을 해놓고 답변을 하려 할 때마다 투덜거리다니. 누가 보면 이런 긴급 사태에 일부러 시비를 걸어대는 몰상식한 작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뭣!”
웨인이 발작하듯 지크를 쳐다봤다. 이런 노골적인 대답이 돌아오리라곤 예측하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재위크 씨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건 아닙니다. 아들의 병신 짓도 겸허히 인정하신 분인데요. 자식 교육이, 그러니까, 조금 달리는 것만 빼면 무척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
너무나 화가 나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격언을 웨인은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그러니 무척 궁금하셔서 의도치 않게 제 말을 끊으신 거겠죠. 이런 급박한 상황에 시비를 건다는 모자라고도 무식한 짓거리를 한 건 아니실 테니까요. 재위크 씨의 아들과 제가 시비가 붙었던, 그것도 그 아들이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다가 개박살 난, 상식이 박힌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들을 꾸짖어야 할 사건 때문에 악감정을 가지고 계신 건 절대 아닐 겁니다. 등신 쪼다처럼 그 일을 질질 끌어 여기에서까지 분출하는 건 더더욱 아닐 거고요.”
벌떡!
웨인 일어섰다. 그가 옆에 세워뒀던 지팡이를 짚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입술이 들썩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영창을 외울 태세였다.
“자, 잠깐! 잠깐만, 재위크!”
웨인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얼른 지팡이 쪽으로 뻗은 웨인의 팔을 낚아챘다.
“진정하게! 지금 여기서 뭘 하려는 건가!”
“놔! 지금 당장 저 녀석을 죽여 버리겠어!”
팔에 매달리는 마법사를 뿌리치려 웨인이 난동을 부렸지만 나이 든 마법사가 사람 한 명의 무게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히 근본도 모를 떠돌이, 그것도 자신의 아들을 반폐인으로 만들어 놓은 놈의 비아냥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신경줄은 굵지 못했다.
쿠웅!
그러나 갑작스럽게 들린 커다란 소리가 그의 난동을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몰린다. 테이블을 내리친 상태 그대로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는 윌위스가 거기 있었다.
마탑주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사람들을 쏘아본다.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분노에 차 날뛰던 웨인도 찔끔했다.
“…지금은 내 손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소이다. 그 이외의 말은 적어도 당분간은 삼가 주시길 바라오. 내 부탁드리리다.”
말은 부탁이지만 그 말을 단순한 부탁으로 받아들일, 간 크고 머리 나쁜 인간은 다행히도 이 자리에 없었다. 웨인이 지팡이를 두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얘기를 계속 해주시오.”
“그러죠.”
심각해진 분위기와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지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시선이 날아와 꽂혔지만 지크는 역시 상관하지 않았다.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엘레나를 납치한 자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다는 것까지 얘기했소.”
“그랬었죠. 그 말대로 우린 엘레나를 직접적으로 납치한 존재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간에 한 존재를 더 끼워 넣어봅시다.”
“어떤 존재를 말하는 거요?”
“엘레나가 납치당한 날, 성벽 밖에서 발견된 로브를 입은 정체불명의 시체들 말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수상한 사건이었지. 성벽 밖이라도 그렇게 떼로 죽어나간 시체가 발견된 적은 없으니까.”
“분명 조사에서도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소.”
“외견부터가 하나도 빠짐없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범죄자 무리 혹은 암살자일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의견을 교환했다.
윌위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도 그들이 엘레나를 납치한 자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었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엘레나를 납치한 자들과 적대적인 사람들일 거요.”
“둘이 충돌해서 로브를 쓴 집단이 패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당신의 생각은 다르오?”
“아뇨.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수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엘레나를 구출하는 것과는 관계가 적을 거라고 여겨 일단 신경을 끄고 있었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요.”
지크는 오늘 처음 이 회의에 참석을 했지만, 지크가 참석하기 전 다른 회의는 몇 번이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로브 집단에 대한 것은 미뤄두자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 잡힌 모양이었다.
“일단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엘레나를 납치한 집단과 죽은 로브 집단은 적대관계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두 집단이 엘레나를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성 바깥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했다는 전제로 말을 하겠습니다.”
무리한 추측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지크는 은쟁반 위에 올려져있는 편지를 다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척 봐도 도발적이죠. 손녀님 그리고 따님을 납치당한 마탑주님과 드웨인 씨 그리고 더해서 엘레나를 찾으려 협력하는 다른 분들을 무척이나 열받게 했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이죠. 이 편지엔 분명 도발의 의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윌위스가 숨을 격하게 내쉬었고 올랜드가 가볍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생각을 하자면 이 도발적 문구에 열받을 집단이 또 하나 있지요.”
“…엘레나의 납치에 실패한 로브 집단말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자신의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제자를 칭찬하듯 지크가 올랜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웨인 씨의 말대로입니다. 안 그래도 엘레나의 납치는 실패하고 상당한 인명피해도 입었는데 상대가 엘레나를 데리고 있단 걸 으스댄다면 로브 집단의 일행은 엄청나게 화가 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 문구는 그 로브 집단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설령 당신의 말이 맞다 해도 그 편지를 왜 마탑주께 보낸단 말이오.”
기가 차다는 듯한 사람이 말했다.
“보내려면 그 로브 집단에게 보내야지. 전달되어야 할 자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헛짓거리가 될 뿐이오.”
“물론이죠. 동의합니다. 하지만 아주 잘 전달되었다면요?”
“잘 전달되었다니. 이 편지는 로브 집단의 동료가 있는 곳이 아니라 마탑주께 전달되었….”
순간 말을 하던 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누가 봐도 극도로 분노한 얼굴이었다.
“설마 그대는 마탑주를 의심하시오? 마탑주가 로브 놈들의 동료라고?”
충격이 내려앉았다. 말을 한 자는 물론이고 다른 자들 또한 분노 어린 얼굴로 지크를 쏘아보았다.
몇몇은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지팡이를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날 의심하는 것이오?”
의외로 마탑주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지크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뜻이오.”
“또 있지 않습니까. 이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 사람들이.”
지크는 마탑주의 눈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아직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고 아니, 오히려 듬뿍 내세우며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그 행동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우릴 의심한다고?”
윌위스를 의심한다며 화를 낸 그 사람이었다. 이제 그의 얼굴은 마치 사과 같았다. 본능적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그의 손엔 지팡이가 꽉 쥐어져 있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불쾌감도 뛰어올랐다. 험악함을 넘어서 잔잔한 살기까지 흐르는 사람도 있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무르진 않았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의견이라 나중에 증거가 더 모이면 조심스럽게 얘기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돼버렸군요.”
“질문에 대답해라! 우리를 의심하는 건가!”
지크를 향해 조여져 오는 압박감. 하지만 지크는 강하게 누른다고 해서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반발할 뿐.
“네.”
너무도 담담한 지크의 말에 한순간 험악함이 사라졌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감정의 공백 상태가 된 것이다. 마치 해일이 오기 전에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빈 곳을 메우고 육지까지 올라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해일처럼, 막대한 분노가 쏟아졌다.
“이, 이! 그렇다면 너도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저도 용의자죠.”
“…뭐?”
다시 한번 분노가 무너졌다. 자신도 용의자라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인정하는 지크의 행태를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크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행위였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도 제 의견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고 많은 의견 중 하나인 거죠. 그저 ‘이런 의견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싱글싱글 웃었다.
험악한 분위기기 잦아들었다. 지크를 보는 눈이 호의로 바뀐 건 결코 아니다.
그저 두 번씩이나 분노를 터뜨릴 지점이 지나가버려 이제는 화를 낼 타이밍이 꺾여버린 것이다. 지크를 향한 불쾌감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분위기 속에서도 지크는 꿋꿋이 자신의 일을 했다.
“그래도 로브 집단을 조사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마탑주께서 하지 않으신다면 저 혼자서라도 녀석들의 뒤를 캐보겠습니다만.”
“…부탁하겠소. 나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네.”
지크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마탑주가 지크의 의견을 일견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자 불편한 얼굴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로브 집단을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대놓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아까 로브 집단에 대한 것은 엘레나를 구출하는 것과는 관계가 적을 것 같아 뒤로 미뤄두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그 주장을 누가 먼저 꺼냈는지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사람들은 지크의 말에 반감이 일어났다. 아직도 자신들을 의심하는 것일까. 그러나 마음속에 스며든 찝찝함이 기억을 더듬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그 주장을 꺼낸 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시선을 받은 주인공이 깜짝 놀란다. 지크가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척이나 재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었습니까? 웨인 재위크 씨.”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