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지크는 콧노래를 부르며 펜을 이리저리 돌렸다. 라일라는 지크의 뒤에 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협박장을 쳐다봤다.
“너도 마탑주 보고 뭔가 요구할 게 있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돈이라든가, 마법서라든가, 보물이라든가. 뭣하면 마탑주보고 달 밝은 밤 마탑 앞에서 춤을 추라고 요구해도 돼. 우리는 손녀의 목숨을 쥐고 있다고.”
“없어. 그보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뭔 놈의 협박장에 그딴 내용을 적으려는 거야?”
“장난.”
“…넌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난 내 인생의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단순한 쓰레기짓을 무슨 인생의 철학처럼 포장하지 마!”
“라일라가 전한다. 마탑주는 제 쓰레기짓을 인생의 철학처럼 포장하지 말….”
“뭘 쓰는 거야!”
라일라의 손바닥을 지크가 잽싸게 피했다. 놀랄 만큼 빠른 속도와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라일라가 몇 번 더 손바닥을 휘둘렀지만 지크는 상체만 움직여 그것들을 전부 피했다.
“아무리 네가 어느 정도 주먹질에 소양이 있다지만 그 정도로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지크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지만 라일라가 정색하고 지팡이를 잡는 걸 보고는 얌전하게 몸을 바로 했다.
“…뭘 썼어?”
한동안 지크를 노려보다가 심호흡 몇 번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라일라가 지팡이를 놓고 물었다. 물론 그 전에 지크의 등짝을 세게 한번 때리는 건 잊지 않았다.
“대단한 건 아니야. 아니, 지금 당장 뭘 요구할 생각은 없어.”
맞은 등을 손등으로 문대며 지크가 말했다.
“엘레나를 우리가 납치해서 흑막에게 한 방 먹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놈의 정체를 안 건 아니니까.”
“그럼 왜 협박장을 쓰려는 건데?”
“당연히 흑막의 정체를 캐기 위해서지. 물고기를 낚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미끼를 던져야 하는 법이니까.”
지크는 협박장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글자 몇 자가 단출하게 쓰여 있었다.
“지금은 이거면 돼. 나머지는 앞으로 진행되는 일을 봐가며 협박장을 써야지.”
* * *
지크는 윌위스의 부름을 받았다. 불린 곳은 윌위스의 저택. 꽤나 다급한 일인지 윌위스가 그를 부른 것은 아침 일찍이었다.
지크는 대충 끼니를 때우고 저택으로 향했다.
사용인이 지크를 맞았다. 이미 얘기가 되어 있는 듯 그들은 지크를 바로 응접실로 안내했다.
저택 자체가 묘한 다급함에 휩싸여 있는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뭐, 내가 보낸 협박장 때문이겠지만.’
티는 내지 않아도 저택을 휘감은 긴장감과 엘레나의 걱정 등으로 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용인과 달리, 지크는 무척이나 태평했다.
응접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상석에 윌위스가 있었고 올랜드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 몇이 앉아 있었다.
“왔소? 이쪽으로 오시오.”
윌위스가 지크를 자신의 옆에 세웠다.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오. 이 근래 커다란 소동을 일으킨 사람이니까.”
사람들이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간간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모두 마법사다보니 사건을 보는 시선이 편중될 가능성이 없지 않소. 그래서 이 분을 불렀소이다. 검사로서 그리고 여행자로서 우리가 보지 못 한 시선을 제공해줄 것이오.”
윌위스가 빈자리에 손짓을 하자 지크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는 윌위스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아주 태평하군. 설마 여행자 따위가 가장 늦을 줄은 몰랐어.”
누군가 빈정거린다. 지크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지크가 앉은 곳과 대각선 쪽 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크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생김새를 들은 적이 있고 무엇보다 지금 지크에게 저런 살벌한 눈초리를 날릴 윌위스 관계자는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뵙는 건 처음이군요, 웨인 재위크 씨.”
지크는 싱그렇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손자분은 잘 있습니까?”
꾸욱!
웨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그 주먹으로 지크를 때려죽이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지크는 태연했다. 오히려 어쩔 것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 개…!”
웨인이 참지 못 하고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그만하게. 지금 여기가 싸울 때인가!”
웨인을 옆에 있는 사람이 말렸다. 웨인이 입을 다물었다. 지크를 시선으로 찢어버릴 듯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좀 참아 주십시오.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닙니다. 부탁드립니다.”
지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올랜드가 말했다. 지크도 웨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좌중이 진정되자 윌위스가 입을 뗐다.
“일단 여기 모여계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소이다.”
그의 음색은 무척이나 피로했다. 그가 최근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익히 짐작할 만한 목소리였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 손녀를 찾는 일에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것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윌위스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이 당황해 얼른 그를 말렸다.
“지금껏 마탑주께서 마탑을 위해 고생하신 것이 얼만데 고작 이런 걸로 고개를 숙이신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럴 때 돕지 않으면 어떻게 같은 마탑의 동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고맙소.”
윌위스는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 이유를 말했다.
“실은 어제 이런 걸 받았소이다.”
윌위스가 신호를 주자 집사 차림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은쟁반 하나를 들고 있었다.
집사가 그 은쟁반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은쟁반 위로 쏠렸다.
그곳에는 뜯어진 편지 봉투와 그 봉투 안에 들어 있었을 거라 짐작되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윌위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자가 물었다. 윌위스는 한숨을 한번 쉬고, 분노가 잔뜩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엘레나를 납치한 자가 보낸 듯한 편지요.”
사람들이 웅성댔다.
“읽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올랜드가 조심스럽게 그 편지를 들었다.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올랜드는 편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레나 드웨인은 우리가 데리고 있다.”
사람들이 침음성을 삼켰다. 너무나 짧았지만 그렇기에 더 노골적인 문장이었다.
누구는 눈을 감았고 누구는 분을 참았으며 누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전부 올랜드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올랜드는 편지를 내려놨다.
“이게 끝입니다.”
“뭐?”
사람들이 당황했다. 옆에 앉은 자가 재빨리 편지를 들어 올린 후 자세히 살폈다.
앞면을 보고 뒷면을 보고 위아래를 거꾸로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적혀 있는 건 정말 딱 그 한 문장뿐이었다.
“무슨 이런….”
“정말로 고작 한 문장뿐이라니.”
편지를 돌려 본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 단순한 장난이 아닙니까?”
그런 의견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윌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원에 있는 테이블 위에 있었소.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지금 이 시기에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 장난을 친단 말이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기에 그런 장난을 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정말로 범인이 보냈을 확률이 크단 건데….”
사람들이 고민에 빠졌다.
“대체 뭘 위해서 이런 편지를 보낸 거지?”
“요구 조건도 없고 범행 성명도 없소이다. 정말로 딱 이것 하나만을 말하기 위해서 드웨인 저택에 침입하는 위험을 감수했다고?”
도저히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똑똑하기로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지만 고작 문장 하나뿐인 편지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돌던 편지가 지크에게도 전해졌다. 지크는 마치 고민을 하듯 인상을 찡그리고 편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속으로는 정말로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썼지만 정말 이상하게 썼네.’
필적으로 들키지 않기 위해 글을 쓸 때 정말로 꼬아 썼다. 문장의 의미를 아는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절대 잘 쓴 필체도 아니었다.
물론 그건 그 누구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크를 마지막으로 모두 편지를 확인했다. 지크는 테이블에 놓인 은쟁반 위에 도로 편지를 갖다 놨다.
“이제 편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소.”
윌위스가 물었지만 사람들은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대체 이걸 무슨 의미로 썼을까.
“과시가 아니겠습니까.”
한 마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과시?”
“네, 과시요. 말 그대로 자랑을 하는 거죠. 자신들이 드웨인 양을 잡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건 너무 현실성이 없지 않소? 뭐 하러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한단 말이오.”
누군가 그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지크는 동의했다.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무척이나 불쾌한 시선이 하나 섞여 있긴 했지만 지크는 그 시선을 묵묵히 무시했다. 정확히 말해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꽤 많은 인간들을 만났었는데, 그중에는 정말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피해자의 가족에게 자랑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는 미친놈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허! 무슨 그런!”
사람들이 혀를 찼다.
“그럼 이게 미친놈의 소행이란 말이오?”
올랜드가 묻자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 정도의 일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확답을 할 순 없죠.”
“그럼 다른 목적일 가능성도 있겠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오?”
다른 의견이 나왔다.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든가, 아니면 우리의 행동에 따라 계획을 바꾼다든가 그런 것 말이오.”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렇게 사람들이 계속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단서가 적어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확신은 못하지만, 그런대로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의견들은 몇 개가 나왔다.
나름 성과라면 성과였기에 윌위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렇게 많은 의견을 나누며 슬슬 이번 회의가 끝날 것 같을 때 즈음이었다.
“당신은 무슨 의견이 없소?”
웨인이 갑자기 지크에게 물었다.
“마탑주께서 전혀 새로운 시선을 원하셔서 그대를 불렀는데, 별 의견을 내지 않았잖소.”
“그는 충분히 의견을 나누는데 동참을 했습니다.”
올랜드가 그를 옹호했다. 하지만 웨인은 코웃음 쳤다.
“고작해야 남의 의견에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지. 그걸론 그를 부른 기대에 미치지 못하오. 전혀 다른 시선으로, 우리가 생각해내지 못한 의견을 듣기 위해 그를 부른 것 아니오?”
“이보시게. 적당히….”
다시 다른 사람들이 말리려 들 때였다.
지크가 빙긋 웃었다.
“전혀 다른 시선이라…. 뭐, 없진 않습니다.”
“…뭐?”
웨인이 당황했다. 다시 다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 우려와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는 마치 으스대듯, 무척이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예 생각을 바꿔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이 협박장이 우리, 정확히 말해서 마탑주께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떨까요?”
자신을 향하는 수 쌍의 눈을 향해 지크는 담담하게 내뱉었다.
“이 메시지는 마탑주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