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하지만 너무 그렇게 열 낼 것 없어. 저 녀석의 입장도 생각을 해 봐야지.”
“저런 멍청한 놈의 입장을 생각해서 뭘 하려고?”
아무래도 라일라는 마윈에게 무척이나 엄격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마탑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녀석이야.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할까?”
“하는 꼴을 보면 충분히 멍청해 보여. 그리고 지크 너도 알잖아? 학문을 공부하는 머리와 세상 살아가는 머리는 다르다는 걸.”
“알지. 충분히 알고말고. 하지만 그걸 생각해도 마윈 재위크의 믿음은 충분히 이상해.”
“그럼 뭐, 세뇌라도 당했다는 거야?”
“세뇌라면 세뇌지. 사람에게 자신을 믿게 만들 가장 좋은 수단이 뭐라고 생각해? 바로 실적이야.”
마치 대단한 진리라도 전하는 양 지크는 그렇게 말했다.
“생각을 해 봐. 우리가 아는 미래의 지식도 현실에 통용이 되니까 즉, 실적이 있으니까 믿고 있는 거야.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냥 정신병을 의심해야 하는 사람이 됐겠지.”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마윈 재위크에게 실적을 보여줬다는 소리야? 저런 멍청한 말을 믿게 만들 만큼?”
“얘기를 들어보면 작게는 자기 마법 공부, 크게는 가문 내나 마탑에서의 입지 같은 것에 조언을 해줬다더군. 처음에는 당연히 의심스러워했지만 그게 전부 맞아들어간다면 얘기는 다르지.”
“그럼 이번에도 그 조력자가 손을 쓴 거야?”
“조력자 정도가 아니야. 저 녀석 얘기를 들어보면 교묘하게 녀석의 복수심을 이용했어. 우리에게 복수를 하라고 말이야.”
“한마디로 그놈이 흑막이란 거네?”
“그럴 가능성이 높지.”
“잡을 수 있어?”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도움을 준 녀석이야. 들어보면 녀석의 가족도 흑막의 존재는 모른다더군. 재위크 녀석이 잡힌 걸 알면 외면할 가능성이 커. 본인은 그 흑막이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럼 헛고생이었네.”
“그렇진 않아. 우리가 찾고 있는 놈일 가능성이 높은 놈이 우리를 타깃으로 삼아준 거니까. 즉, 우리가 하는 일은 틀리지 않았다는 거야.”
지크가 확신에 차 말했다.
“게다가 녀석은 정말로 우리를 처치할 생각이었을까도 의문이고.”
“우리를 노린 게 아니라고?”
라일라가 눈을 끔벅였다.
“생각해 봐. 그 흑막인 놈이 진짜 저 모지리에게 선물을 주는 요정 같은 놈이 아니라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저 놈을 도발했을 거야. 저 녀석이 성공해서 우리가 죽는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지?”
“엘레나가 선생님을 잃겠지.”
그리고 그 이외에 대단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들은 떠돌이니까. 엘레나가 조사를 요구하겠지만 스누위크나 마탑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정말로 고작 그것 때문에 이 일을 일으킨 걸까? 자칫하다간 자신이 신뢰를 산 녀석을 통째로 내버리는 일이 되는데? 아무리 저 녀석이 멍청해도 마탑 명문가의 자제로서 이곳저곳에 쓸 수 있는 놈이야. 마탑 명문가의 자제 하나를 구워삶을 수 있는 놈이라면 우리를 엘레나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굳이 이런 위험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거야.”
“그럼 녀석들의 목적은 뭐라고 생각해?”
“드웨인가와 재위크가의 충돌.”
지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떠돌이라도 일단은 엘레나 드웨인의 선생이야. 물론 우리가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진다면 그리 큰 소란은 나지 않겠지만, 직접적인 소문이 나면 달라지지. 재위크가의 마윈 재위크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엘레나 드웨인의 선생을 습격했다. 그 마윈 재위크는 평소에 엘레나 드웨인을 무시한 자이기도 하지.”
“둘 사이가 좋아지진 않겠네.”
“적어도 지금도 좋진 않을 걸? 우리가, 정확히 말하면 네가 마윈 재위크를 공개적으로 박살냈으니까.”
라일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갈등은 뭔가 계기가 있다면 순식간에 타오르는 법이지.”
“그럼 어쩔 거야?”
“어쩌긴 뭘 어쩌겠어.”
지크가 마윈을 쳐다봤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대를 만들어주신다는데, 즐겁게 올라 타야지.”
드디어 원하던 무대에 오르게 된 유명 연극의 배우마냥 지크는 환하게 웃었다.
* * *
마탑이 뒤집혔다. 마탑의 명문가였던 재위크가의 아들 마윈 재위크가 마탑주의 손녀인 엘레나 드웨인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습격을 했다가 역으로 당한 것이다.
원래라면 도시의 치안대에서 해결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건에 마탑의 두 명문가가 엮인 것이다.
마탑주 윌위스 드웨인과 말석이지만 마탑의 최고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는 올랜드 드웨인, 이 둘이 있는 드웨인가가 확실히 재위크가보다는 권위와 세력 모두 높았지만 그렇다고 재위크가가 빠지는 가문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사건에 재위크가의 후계자인 마윈 재위크가 거의 폐인이 되었고 재위크가가 우두머리로 있는 학파인 퀘이럴 학파의 마도사들도 몇몇이 죽었다.
당연히 재위크가는 극렬 반발했다. 상세한 조사를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윈 재위크가 먼저 습격을 가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마탑의 최고 회의가 열렸다.
열 명의 마법사들이 회의실 안으로 모였다. 전부 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표정이 굳은 세 사람이 보였다.
이 사건의 관계자라고 할 수 있는 윌위스 드웨인과 올랜드 드웨인 그리고 웨인 재위크였다.
회의는 심각하게 이어졌다. 언뜻 고성이 오고 가기도 했다. 특히 올랜드와 웨인 간의 싸움이 컸다. 서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엄청나게 큰 소리를 냈다.
“일단….”
윌위스가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조사는 필요할 것 같군. 그 두 사람을 잠시 잡아두도록 하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무장해제를 시키고! 한 사람씩 따로 감옥에 쳐 넣어 철저하게 심문해야 합니다!”
“헛소리!”
웨인의 말에 올랜드가 반발했다.
“백 번 양보해서 조사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마치 죄인처럼 다루다니! 누가 봐도 이건 댁의 병신 같은 아들 잘못이 아니오!”
“뭐!”
웨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마력도 없는 결함 있는 새끼도 새끼라고 감싸는 건가! 그런 년을 싸질러놓고 입은 거창하군!”
“마력이 없더라도 결투로 인한 원한에 용병과 학파 마법사들을 잔뜩 데리고 가서 모조리 죽여버리고 자신도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정도로 병신은 아니지! 대단한 아들을 둬서 무척이나 자랑스럽겠소!”
“뭐야!”
“조용!”
결국 윌위스가 크게 소리쳤다. 올랜드와 웨인이 씩씩대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누가 그 손에 칼만 쥐어준다면 희희낙락하며 서로를 찌를 것 같았다.
“일단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진행하겠소.”
윌위스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여기에 대해서 의견이 있는 자는 없었다.
“그 둘을 감금하는 것도 허락하오. 하지만 감옥은 아니오. 평범한 집 하나를 빌려 그 안에 가두고 감시를 하지.”
“마탑주!”
웨인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윌위스는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둘은 무장해제를 하고 집 안에서 만나지 못하도록 하겠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
“반대입니다! 지나쳐요! 그들은 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올랜드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회의의 분위기는 윌위스의 명령에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애초에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지크와 라일라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은 몇 없었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인 마윈과 그 동료들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지크가 정보를 얻기 위해 한 고문도 문제였다.
그 분위기를 읽은 올랜드는 이를 갈았다. 그가 윌위스를 쳐다봤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아버지!”
“사적인 호칭을 하지 마시오, 드웨인. 이건 회의에 참가한 자들의 총의요. 그대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따를 의무가 있소.”
“…설마 이참에 엘레나의 선생을 치워 엘레나의 마법 공부를 포기시키려는 건 아니겠죠.”
“…말씀이 심하시오, 드웨인!”
윌위스가 호통을 쳤지만 올랜드는 계속 윌위스를 노려봤다.
“…회의에 모인 총의 때문에 마탑주로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무를 행했다. 그런 아버지의 주장, 꼭 진심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올랜드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렇게 이번 사태에 대한 마탑 최고 회의는 끝이 났다.
* * *
지크와 라일라는 드웨인 저택에 있었다. 엘레나를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다니던 스녹과, 평소 혼자 돌아다니게 놔둔 한스까지 같이 있었다.
사건이 터지고 일단 윌위스 드웨인이 감시 겸 보호를 위해 그들을 저택에 부른 것이다. 지크도 거절하지 않고 일행을 데리고 순순히 드웨인 저택으로 왔다.
“괜찮을 거예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근처에서 서성이던 엘레나가 크게 말했다.
“선생님과 지크 씨는 절대 잘못한 게 없는걸요! 아버지도 힘을 써주신다고 하셨으니 큰일이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곤란한데.’
엘레나의 희망과는 달리 지크는 뭔가 행동이 있었으면 했다. 그것도 크면 클수록 좋다. 그러나 티를 내진 않았다. 엘레나를 향해 웃어줬다.
“기대할게.”
그리고 다시 지금껏 하던 일을 계속했다. 별것 아니었다. 무료함에 그저 계속 발을 까딱일 뿐.
엘레나는 지크 일행을 살폈다. 사건의 당사자인 지크와 라일라는 물론 둘의 일행인 한스와 스녹마저 너무 태연했다. 이렇게 보니 마치 다급해하는 자신이 이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혹시 정말로 별일 아닌 것 아닐까. 마음을 놓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마탑이 난리가 났다는 걸 들었지만 눈앞의 상황을 보자 엘레나도 조금 걱정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곧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치며 엘레나는 다시 마음을 조여야 했다.
“당신이 지크가 맞소?”
윌위스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부리부리한 눈의 사내가 지크의 앞에 섰다.
“맞습니다.”
“당신이 라일라고?”
지크의 맞은 편에 앉은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을 연행하라는 지시가 있었소.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우리를 따라오시오.”
“잠깐만요!”
엘레나가 소리쳤다. 그녀가 사내의 옆에 있는 윌위스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할아버지! 이 분들은 죄가 없어요!”
“물러나거라, 엘레나. 이건 어른들끼리의 일이다.”
윌위스의 단호한 눈빛에 엘레나는 흠칫 놀랐다. 그녀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윌위스도 엘레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당신을 따라가면 되는 겁니까?”
지크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은 우리에게 주시오. 우리가 잘 보관할….”
“당신들의 뭘 믿고?”
지크가 사내의 말을 끊고 옆으로 손을 까딱였다. 한스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지크는 그에게 마법 상자와 따로 갖고 있던 돈, 그리고 윈두르를 내밀었다.
“잘 갖고 있어라.”
“네!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라일라도 스녹을 불러 자신의 지팡이와 물건들을 맡겼다.
지크와 라일라가 일어섰다.
“당신을 따라가면 됩니까?”
“그렇소.”
“앞장서세요.”
지크와 라일라가 순순히 협조하자 일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혹시 지크와 라일라가 반항을 할까 긴장하던 자들도 조금 긴장을 풀었다.
둘은 사내의 뒤를 따랐다. 지크가 한스와 스녹의 옆을 스쳐갈 때였다.
“잘해라.”
“네.”
“넵.”
지크의 은밀한 명령에 한스와 스녹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