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후!”
라일라가 지팡이를 든 손을 늘어뜨렸다. 내뱉는 숨에 상쾌함이 섞였다.
“기분은 풀렸냐?”
“대충은.”
라일라는 걸음을 내딛으려다 멈칫했다. 발을 내딛으려 하던 곳에 지크가 기절시켜 놓은 용병이 있었다.
퍼억!
그녀가 걷어차자 용병이 몇 바퀴 굴렀다.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뱉었지만 깨어나진 않았다.
“꽤 많이 살렸네?”
“누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까. 일단 실력이 좀 더 있는 놈들로만 골라봤어.”
“역시 조금 참는 게 좋았을까?”
자신의 감정 때문에 지크가 손해를 본 것이 아닐까 라일라는 머쓱해했다.
“이 정도면 됐어. 용병, 마법사 적당히 섞어서 살렸으니 제법 정보는 모이겠지. 게다가 제일 중요한 놈도 살렸고 말이야.”
지크는 기절한 인간들의 무더기에서 사람 한 명을 꺼내 들었다. 마윈 재위크였다.
“얼굴을 보니 이제 좀 기억나네. 맞아. 이 사람이 나랑 결투를 한 사람이었어.”
“…너 진짜로 몰랐던 거야?”
“굳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인간은 아니잖아?”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대단하다.”
지크의 말투에 라일라가 울컥했다. 아무리 자신이 결투를 한 자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당사자가 들으면 확실히 분에 찰 일을 했다지만 그렇다고 지크가 저런 말을 할 정도일까.
“그런 너는 왜 저런 아무래도 좋은 놈을 기억한 거야? 넌 사소한 일은 잘 잊어버리는 편이잖아.”
“딱 봐도 원한을 쉽게 잊을 놈이 아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든 뒤통수를 칠 놈이니 당분간은 기억에 잘 온존하고 있어야지.”
지크의 말이 이치에 맞자 라일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곧 이어진 지크의 말에 ‘그럼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걸 잘 기억하고 있어야 나중에 엿 먹일 때 성질을 더 긁어댈 수가 있거든. 작고 세세한 걸로 잘 긁어대야 더 흥분하는 놈들도 있으니까.”
“…아무리 내가 성질이 더러워져도 너한텐 안 될 것 같아.”
“당연하지. 내 성질 따라오려면 적어도 몇십 년은 진흙탕에서 굴러야 한다고.”
“제발 그런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지 마.”
시체가 가득해 순식간에 스산해진 숲속에서도 두 사람의 입담은 여전했다.
지크는 쓰러진 큰 나무를 하나 끌고 왔다. 눕혀놓자 훌륭한 벽이 됐다. 지크는 기절한 이들을 그 벽에 기대어 나란히 앉혔다.
라일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의 마법에 의해 밑동만 남은 나무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정보를 캐낼 거지?”
“그래야지. 그것 때문에 살린 거니까.”
“어떻게 캐낼 거야?”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놈들한테 정보를 캐낼 방법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잖아?”
라일라는 그 방법이 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로브 놈들은 고문이 통하지 않는 녀석들이라 쓰진 않았지만, 내가 또 이 바닥에서는 한 솜씨 하거든.”
지크가 라일라를 보며 말했다.
“심장이 약하면 보지 않는 걸 권장할게.”
* * *
마윈 재위크는 정신을 차렸다. 아직 남아 있는 뒤통수의 얼얼함에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 기분은 갑자기 들린 비명에 순식간에 날아갔다.
“읍! 읍!”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 무언가가 물려 있었다.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으으읍!”
몸을 버팅겨 봤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심지어 눈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무언가가 씌워져 있었다.
“정신이 들었어?”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였다. 예전에 자신을 보고 온갖 모욕을 날렸던 인간. 아니, 예전까지 갈 일도 없다. 습격을 했을 때에도 저 목소리로 자신을 조롱하지 않았던가.
‘습격?’
순간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사기꾼이라고 여겼던 여자가 발동한 압도적인 마법에 자신이 동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재수 없는 놈에게 무언가를 당했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어.’
사로잡혔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대충 상황판단은 끝났으려나?”
지크가 말했다. 마윈이 결박을 끊기 위해 팔딱팔딱 뛰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끊기에는 지크가 해놓은 결박이 너무 단단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겠지. 뭐, 잠시 동안은 너 좋을 대로 하도록 해. 어차피 네 차례는 아직이니까.”
‘차례? 그게 무슨 뜻이지?’
마윈의 의문은 얼마 안 가 해결됐다. 그에게는 무척이나 끔찍하고 두려운 방법으로.
“끄아아아아아아악!”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마윈은 추측할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절대로 온화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 서로 편하게 가자고. 내가 원하는 걸 말해주면 그만둔다니까?”
“다, 다 말했잖아! 내가 아는 건 다 말했다고!”
아마도 그가 고용한 용병의 목소리인 듯하다.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답변이야. 그런데 네가 말한 건 다른 녀석이 이미 불어버린 정보거든. 난 그 외의 다른 정보가 필요해.”
“그,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 이외에는 난 몰라!”
“그것 참 아쉽네. 네가 그렇다면 난 눈물을 머금고 이 짓을 더 할 수밖에 없어. 아, 슬퍼라. 이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저 산 위에 핀 꽃 정도가 아닐까.”
“그딴 말을 하려면 표정이나 바꿔라, 이 악마 같은 새끼!”
“하하하! 이래 봬도 난 악마한테도 질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방금 그 말은 조금 기분 나빴어. 어차피 더 아는 것도 없는 모양이니 일단 그 쓸모없는 입부터 조져볼까?”
“자, 잠깐…! 그만!”
하지만 그의 애원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이슬처럼 바스러졌다. 곧 이어 끔찍하게 이어지는 비명 소리.
마윈의 이가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하게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있었다. 그게 뭔지 몰랐는데, 상황이 정리되자 추측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피비린내!’
시각은 쓸 수 없고 청각과 후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척 끔찍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옷이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온갖 끔찍한 생각이 뇌리 속에서 헤엄을 쳤다.
뚝!
비명 소리가 끊겼다. 동시에 무언가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가 났다. 걸음 소리가 난다. 자신에게 조금 가까워지는 기척에 마윈이 숨을 헐떡였다.
“자, 그럼 이제는 너한테 물어볼까?”
다시 비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다른 목소리다. 마윈의 떨림도 더 커졌다.
* * *
“네가 마지막이야.”
기척이 자신의 앞에 멈췄다. 마윈은 침을 삼켰다. 하지만 바짝 마른 입 안엔 수분기가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질문들은 들었지?”
당연히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손이 뒤로 묶여 있어 귀를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그가 한 질문과 희생자들이 한 답변을 모두 들을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너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얘기를 해야 할 거야.”
허벅지에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이 닿았다.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살짝 베인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 민감하게 일어난 촉감이 상처에서 흐르는 피의 감촉을 그대로 전달했다.
마윈은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무슨 적진에 잡힌 이야기 속 기사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엔 지금까지 들어온 비명과 계속 콧속으로 들어오는 피비린내가 무서웠다.
오히려 빨리 질문을 해줬으면 했다. 모든 것들을 전부 내뱉고 편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 전에 준비부터 좀 해놓자. 네가 뭔가를 속이면 안 되니까.”
허벅지에 닿고 있는, 칼이 분명한 그 감촉이 조금 더 강해졌다.
“읍! 으읍!”
마윈이 울부짖었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크도 그의 의도를 알았다. 하지만 윈두르에 주는 힘을 줄이는 일은 없었다.
“알아, 알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두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사람을 잘 못 믿어서 말이야.”
“읍! 읍! 읍읍!”
“잠깐이면 돼.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아. 알았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음성. 하지만 행해진 결과는 그 음성과 어울리지 않았다.
푸슉!
“끄으읍!”
끓어오르는 고통에 마윈이 비참한 신음을 흘렸다.
* * *
지크는 마법 상자에서 물통을 꺼냈다.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을 물들이고 있는 피가 깨끗한 물 속에서 천천히 흐려졌다.
“끝났어?”
비명 소리가 끊기자 숲 안에서 라일라가 걸어 나왔다. 필요하다면 충분히 잔혹한 손속을 쓸 수 있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남의 피나 고통을 즐기는 성향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잠시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 있었다.
“끌어낼 정보는 대충 끌어냈어.”
“어떤 정보였어?”
“기대하진 마. 그렇게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으니까.”
지크가 이제는 끔찍한 시체가 되어버린 정보 제공자들을 바라봤다.
“용병이나 마법사 놈들은 그냥 고용된 놈들이었어. 용병 놈들은 돈에 고용됐고 마법사 놈들은 나중에 마윈 재위크가 학파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에 베팅하고 협력한 놈들이지.”
지크가 새끼손가락을 세웠다.
“즉, 따까리 놈들이란 거야.”
“그럼 마윈 재위크는?”
라일라의 시선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온 로브가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 좋은 꼴을 당한 것 같진 않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히 보였다. 아마도 포션으로 치료를 한 모양이었다.
“일단 저놈이 이 계획을 짜긴 한 모양이야.”
“그럼 그냥 원한에 의한 습격이었어?”
엘레나의 성장을 막았으리라 추정되는 존재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로서는 조금 맥이 빠지는 일이다.
“일단 표면상으로 그래.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니 꽤 재미있는 얘기를 꺼내더라고.”
“어떤 얘기?”
“자신을 도와주는 존재가 있다고.”
마윈이 명문가의 도련님인 이상 그를 도와주는 존재는 쌔고 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존재를 지크가 이렇게 중요하게 얘기하진 않을 터. 라일라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녀석이 ‘믿을 만한 곳에서부터 들은 정보’ 운운했었지? 그 녀석인가?”
“맞아.”
“어떤 존재인데?”
“모른대.”
“…뭐?”
“자기도 모른대.”
지크는 너무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한 거 아냐?”
“그건 절대 아냐. 녀석이 내 친절한 질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신뢰 관계를 아주 돈독히 쌓았으니까.”
그 방법을 라일라는 묻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정체도 모르는 존재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심지어 많이 신뢰하고 있더라고.”
지크는 웃었다. 하지만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마윈의 멍청함을 비웃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너 보고 속임수를 썼다고 했잖아? 네가 비겁하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귀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결투에 임했다고 믿고 있더라.”
“…아니, 마법사 간의 결투에서 인정되는 건 지팡이뿐이긴 한데, 설마 그걸 믿었다고? 내가 그때 구사한 마법만 몇 갠데? 그걸 전부 활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는 나도 못 만들어!”
“그러니까 말했잖아.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귀한 아티팩트라고.”
“…부탁이 있는데, 지크.”
“걱정 마. 난 저기 있는 멍청이 하나 때문에 마법사에 대한 이미지를 바닥으로 처박을 생각은 없어.”
“정말 고마워.”
라일라가 자신에게 이렇게 고마워했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그만큼 저 멍청한 놈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