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윌위스는 예를 다해 지크 일행을 맞아줬다.
지크와 라일라에게는 존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존대는 꼬박꼬박 붙여주며 올랜드처럼 라일라를 선생님이라 호칭했다.
쭈뼛대던 엘레나도 식사 자리가 그럭저럭 부드럽게 흐르자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마법에 관한 것만 아니라면 조손관계는 지극히 양호한 모양이야.’
지크는 엘레나가 할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올랜드에게 말했던 걸 떠올렸다.
‘하긴,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최악이었다면 굳이 이 집에 남을 이유가 없지. 아버지의 집에서 살면 그만이니까.’
엘레나의 이야기를 듣자면 원래 올랜드도 윌위스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올랜드가 다른 학파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분가했고, 엘레나는 줄곧 윌위스의 플루 학파에 대해 공부를 했던지라 윌위스의 집에 남았다.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자식은 부모를 따라가겠지만 드웨인 가가 일반적인 가문이 아닌, 마법사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메인 요리가 지나가고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민감한 이야기를 하지 않던 올랜드지만 그가 라일라를 부른 이유는 엘레나의 마법 공부 때문이다.
결국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 손녀의 공부는 어떻소.”
엘레나의 몸이 굳었다. 가볍게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되고 있어요. 드웨인 양은 무척 뛰어난 아이에요. 지식을 흡수하는 속도가 분명 남달라요.”
“그렇소?”
아무리 마법 공부를 반대한다고 해도 손녀의 칭찬마저 기분 나쁘게 들을 순 없는지 윌위스의 표정에 일순 흐뭇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건 잠깐뿐이었다. 윌위스가 얼굴을 굳혔다.
“가장 중요한 마력은 어떻소.”
“아직이에요.”
라일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잠시 방에 침묵이 찾아왔다.
윌위스가 가볍게 한숨 쉬었다.
“내 입장은 이미 알리라 믿소. 엘레나가 말했거나, 그러지 않았더라도 스누위크에선 유명한 이야기니까.”
“네, 들었어요.”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도 알겠구려.”
“엘레나의 교육을 그만두라는 건가요?”
윌위스가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꾹꾹 눌렀다. 지금껏 마탑주이자 플루 학파의 수장으로서의 은은한 위엄을 내뿜고 있던 그가, 지금은 그저 손녀를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보였다.
“둘은 연인이오?”
윌위스가 지크와 라일라를 보며 물었다. 둘은 즉답했다.
“아뇨.”
“아닙니다.”
“그렇소?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지크가 피식 웃었고 라일라는 한숨 쉬었다.
“그럼 연인은 있소?”
“둘 다 없습니다.”
지크가 대답했다.
“두 분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알게 될 거요. 아이를 키우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윌위스는 디저트와 함께 나온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선생님께 묻겠소이다. 마도의 길이 쉽소?”
“전혀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많은 마법 지식을 알고 영창부터 마법진까지 마법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그녀지만, 마법의 길은 어렵다면 어렵지 절대 쉽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평생을 마도의 길을 걸으며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스누위크의 마탑주가 된 윌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렇소. 사람들은 나를 무슨 마법의 주인처럼 말들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난 그저 마법이란 바다에 한 발을 살짝 담근 사람일 뿐이오. 그만큼 마법이란 학문은 깊고 방대하지.”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여 윌위스의 말에 동의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천재라고 불렸고, 나 또한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오. 환경도 풍족했고 마법 공부가 즐겁기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마도의 길을 걷는 건 무척이나 힘겨웠소.”
“이해합니다.”
“그런데 말이오. 그런 힘든 길을 손녀에게 권유할 수 있겠소?”
윌위스가 울적하게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나 보고 손녀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제 주장만 일삼으며 아집을 꺾지 않는 빌어먹을 늙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오.”
“별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면 고마운 거고. 아무리 봐도 내 아들은 그리 생각하는 것 같지만.”
라일라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말이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알아줬으면 하오. 이런 말을 하긴 뭐 하지만 우리 드웨인가는 스누위크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요. 선조분들 중 마탑주를 맡으신 분이 수두룩하시지. 당연히 우리 가문의 후손들은 마도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후손이 마법에 흥미를 갖고 열정을 보이면 밀어주면 밀어줬지 막지 않는단 말이오.”
하지만 그는 엘레나의 길을 막았다.
“선생님은 지금부터 엘레나가 마력을 해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극히 낮겠죠.”
“그렇소.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도 가기 힘든 게 마도의 길이오. 한데 마도의 근본인 마력이 없이 어찌 그 길을 간단 말이오. 전쟁터에서 창도 칼도 활도 갑옷도, 심지어 돌멩이 하나 쥐지 않은 채 백만의 군세 앞에 돌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할아비로서 그리고 보호자로서 그걸 두고 볼 수가 없더이다.”
“하지만 엘레나가 원합니다.”
“그렇지. 꿈을 달리는 젊은이는 좀처럼 말릴 수 없지. 나도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너무 늙어버렸어. 때문에 불꽃같은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 내 아들도 그렇고 말이야. 엘레나에게 조금, 아주 조금의 마력만 있었어도 나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요.”
하지만 엘레나에겐 마법사의 필수 요소라는 마력이 없었다.
“나는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뤘소. 이제 원하는 건 그저 엘레나가 행복해지는 거요. 마법만 포기한다면 나는 엘레나에게 뭐든 해줄 수 있소. 그 아이가 다른 공부를 원한다면 지원해줄 거고 가게를 한다면 열어줄 거요. 결혼을 원한다면 최고의 신랑감을 찾아보지.”
그의 실력과 권력과 위상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마법만은 안 되오. 엘레나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취미로서 마법 공부를 병행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소. 하지만 마법을 목표로 하는 건 반대요.”
“엘레나는 마법 공부를 하는 걸 행복해 해요.”
“그 감정이 영원할 거라는 보장은 없소. 보답 받지 못 하는 노력은 늘 힘든 법이지. 한데 그걸 평생을 한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고행이오.”
윌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드웨인 님은 드웨인 양의 마법 공부를 계속 반대할 거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그렇소.”
“그럼 제가 드웨인 양에게 손을 떼길 원하시는 건가요?”
윌위스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불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윌위스는 다시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내가 그러라고 해도 엘레나도, 그리고 선생님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려.”
“네.”
“거기서는 눈치 좀 봐가며 돌려 말하는 게 어떻소. 늙은이 뒷목도 조금 생각을 해주시오.”
윌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행가라고 들었소. 이 도시엔 언제까지 머물 셈이오?”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오래 머물진 않을 거예요.”
“그렇군.”
윌위스가 엘레나를 쳐다봤다.
“나는 여전히 네가 마법 공부를 하는 것에 반대다.”
“…네.”
“하지만 할아비로서 손녀의 소원을 계속해서 걷어차는 것도 좀 그렇지. 이번 한 번뿐이다.”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딱 이 선생님께 마법을 배우고 마는 게야. 선생님이 도시를 떠나면 난 다시 네 마법 공부를 막을 거다.”
“할아버지!”
엘레나가 윌위스의 품에 뛰어들었다.
윌위스의 얼굴엔 못마땅하다는 감정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입가에 슬며시 드러나는 호선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여전히 무뚝뚝한 그것이었다.
“좋아하지 마라. 방금 말한 대로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뿐이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윌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일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조건을 걸지는 않으시는군요. 성과가 없다면 제가 떠난 이후에 마법을 그만둬야 한다 같은 거요.”
“난 손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싫소.”
만약 그런 조건을 건다고 해도 엘레나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소리다. 하지만 겸연쩍어하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니 윌위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라일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할아버지시네요.”
“손녀 좋다는 것도 반대하는 늙은이가 좋은 할아버지는 무슨.”
윌위스는 손사래를 쳤다.
“어쨌든 이걸로 당분간은 나도 편안하겠군. 손녀와 싸울 일도 없고.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 혹시 우리 마탑에 올 생각은 없소?”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라일라가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럽네요. 그런데 제가 마탑에 적을 두면 계속 엘레나를 가르칠 텐데요?”
“아, 그런가.”
그건 깨닫지 못했다는 듯 윌위스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마탑주로서 당신 같은 마법사에 대한 스카우트 시도를 안 해 볼 수도 없고.”
윌위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졌다. 장난스럽게 던진 라일라의 질문이 그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고민거리인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마탑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군.”
윌위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 * *
식사가 끝나고 지크 일행은 드웨인 저택에서 떠났다.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엘레나의 표정이 밝았다. 단시간이라고는 해도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것이니 당연했다.
지크와 라일라는 전날처럼 자신들의 숙소 앞에 내렸다. 라일라가 던진 질문도 전날과 비슷했다.
“어땠어?”
“수상해.”
지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영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설마 윌위스 드웨인이 너무 좋은 할아버지 같아 보여서 수상한다는 건 아니겠지?”
“요새 넌 내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읽냐?”
라일라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잠시 낄낄거린 지크가 내뱉었다.
“애초에 윌위스는 수상하지. 엘레나의 마법 공부를 극력으로 막고 있었으니까.”
“이유가 있었잖아. 게다가 오늘 대화를 나눠보면 엘레나 드웨인에 대한 사랑은 진짜인 것 같았고.”
“그 정도는 연기를 하면 되지. 나도 연기를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낚았는데.”
“너와 비교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왜. 윌위스 드웨인의 행동이 무척 진실돼 보였어? 아니, 그것보다는 그렇게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의심하기 싫은 거지?”
라일라가 움찔했다.
“이래서 감정에 쏠리면 안 된다니까. 특히 노인 같은, 사람들이 보통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감정을 보이면 그 사람의 감정선에 확 쏠리지.”
“…그래, 내가 멍청이다.”
할 말이 없던 라일라가 툭 내뱉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엘레나 드웨인의 마법 공부를 막았다고 의심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렌 제너드가 진짜 로브와 관련이 있는 쓰레기일 때 얘기인데 말이야. 마법을 익히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던 엘레나 드웨인을 그렌 제너드가 도와줘서 마력을 해방시켜 주는 거야. 그럼 어떨까?”
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야. 가설도 아닌 소설. 하지만 그 소설이 진짜일 때, 엘레나의 마법 공부를 막으려는 윌위스는 무척 수상할 수밖에 없지.”
듣고 보니 일리는 있었다.
“그래도 결정적인 단서는커녕 사소한 단서도 없어. 건진 건 소설에 가까운 추측 몇 개뿐이지.”
“그럼 일단 윌위스 드웨인과 올랜드 드웨인을 떠본다는 작전은 실패인가?”
결과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지크는 성과가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지크는 아주 흥미로운 발견을 한 상태였으니까.
‘그 인간 맞지?’
오늘 윌위스 드웨인을 본 지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처음 봤을 그의 얼굴이 지크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으니까.
‘내가 브레이브로서의 꿈을 꿀 때 레오나와 드잡이질을 하던 괴팍한 마법사. 윌위스 드웨인과 너무 닮았어.’
마치 동일인물인 것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