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영창을 먼저 시작한 건 재위크였다. 라일라와의 격투로부터 허겁지겁 도망가 지팡이를 먼저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재위크가 먼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엘! 윈! 드온! 르와즈!”
재위크가 눈을 부릅떴다. 구경꾼들과 엘레나도 마찬가지.
지금껏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주던 라일라가 이번엔 정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통 마법사의 모습으로 마법을 뽐낸다.
라일라 같은 규격외의 괴물의 결투가 아니라면 보통 마법사들 간의 결투는 영창 속도와 마력 운용으로 결정된다.
한마디로 누가 더 빨리 마법을 사용하느냐가 승리를 가르는 것이다.
물론 재위크가 한 것처럼 상대의 마법을 피하며 이동 영창을 하는 사람도 있고, 뒤늦게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마법의 위력으로 상대의 마법을 압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마법 결투는 선수를 쥐는 사람이 유리하다.
때문에 마법사들의 결투에서 영창과 마법 운용이 중요한 것이고, 재위크의 영창에 사람들이 감탄한 것이다.
그러나 라일라의 영창은 차원이 달랐다. 입술이 달싹이며 연신 일반인에게는 의미 모를 문장이 쏟아진다.
그 속도는 분명 재위크보다 훨씬 더 빨랐다. 발음도 정확해 마법이 끊기지도 않는다.
거기에 무영창으로 위력적인 마법을 연신 사용하던 라일라가 본격적으로 영창을 외우는 것이다.
준비하는 마법이 그저 그런 마법일 리 없었다.
콰아아아!
라일라의 지팡이 위에서 화염구가 생성된다. 크기와 머금고 있는 마력량 자체가 재위크가 사용하던 마법들을 장난처럼 여기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
영창을 하고 있던 재위크가 입을 떡 벌렸다. 영창이 끊기고 모이던 마력이 흩어졌다.
“어, 어…!”
소름이 돋았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눈앞의 화염이 자신을 태울 것 같다.
재빨리 다시 영창을 하려 했다. 하지만 당혹감에 몇 글자 읊지 못하고 다시 영창이 끊겼다.
앞에 압도적인 위용을 뿌리고 있는 화염구에 온몸의 소름이 쫙 돋았다.
“영창 안 할 거야?”
라일라가 묻는다. 자연스레 그녀의 영창도 끊겼지만 그녀의 마법은 여전히 유지됐다.
‘영창 정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무영창까지 하는 사람이 영창 정지를 못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아니면 뭐야. 포기한 거야? 그럼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
항복. 승부를 끝내기 위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
하지만 재위크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라일라의 눈이 차가워졌다.
“네 의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
라일라가 영창을 이었다.
화르르르륵!
화염구가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그 모습을 보며 구경꾼들이 웅성댔다.
“저런 걸 맞았다간 전투불능이 문제가 아닌 거 아냐?”
“몸이 흔적도 없이 탈 것 같은데.”
“결계는 버틸 수 있는 거야?”
엘레나도 걱정이 되는지 지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 저기. 저걸 맞게 된다면 재위크 씨는 괜찮을까요?”
“응, 괜찮아.”
엘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녀의 선생님은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크의 말이 이어질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깔끔하게 타버릴 테니까 시체 치우는 고생은 안 해도 될 거야.”
“…네?”
소리가 엇나가 삑사리가 났다. 황망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엘레나를 지크는 무시했다.
라일라의 영창이 끝났다. 그때까지 재위크는 계속 영창을 실패했다.
“마음은 변함없지?”
이제는 사람 대여섯 명은 손쉽게 삼킬 수 있는 화염구를 만들어 놓은 라일라가 말했다.
“자, 잠깐…!”
“그래. 넌 정말로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그래도 그 용기만은 칭찬할게. 너 같은 녀석에게 사양을 하는 것도 실례겠지.”
“그러니까 좀 기다…!”
“혹시 살아난다면 그때부턴 남을 무시하는 태도는 좀 고치길 바랄게.”
재위크의 말을 쿨하게 무시하고 라일라는 지팡이를 움직였다. 화염구도 지팡이를 따라 움직였다.
“어, 어?”
“지, 진짜 쏴?”
“잠깐! 저걸 맞으면 포션이고 뭐고 쓸 수가 없잖아!”
일단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하고 있던 결투다. 하지만 라일라의 마법은 그 최소한의 안전장치 운운할 마법이 아니었다.
퍼엉!
그러나 무정하게도 마법은 쏘아졌다.
재위크의 눈에 점점 화염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뜨거운 열기도 가까워졌다. 설마 하던, 죽음의 순간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하, 항보오오옥!”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화염구는 라일라의 통제를 떠난 상태다. 재위크의 몸이 당장이라도 불탈 것 같았다.
그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끼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앙!
화염구가 폭발했다. 굉음이 결투장을 강타했다. 하지만 화염구가 주변에 준 피해는 그것뿐이었다.
사아악!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화염이 주춤하더니 중앙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무것도 불태운 게 없는 아쉬움이 큰지 빛이 깜박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저항은 하지 못했다.
콰직!
주먹이 콱 쥐여지며 모인 불꽃이 흩어진다. 그것으로 라일라가 만든 화염구는 깔끔히 사라졌다.
재위크는 자신의 앞에 선 자를 멍하게 쳐다봤다.
“상처는 없는 것 같네.”
화염구를 베어낼 때 사용한 윈두르를 다시 등에 메며 지크가 재위크를 쳐다봤다.
“아, 아….”
“음, 설마 정신이 나갔나? 뭐, 그럴 만도 하지. 그러니까 조금 더 일찍 항복하지 그랬냐. 나 아니었으면 너 그냥 숯 더미야, 숯 더미.”
지크가 재위크의 뺨을 툭툭 두들겼다. 하지만 재위크는 크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눈앞의 사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랑 결투를 하자고 했잖아.”
재위크의 눈이 흔들렸다.
“언제 할래? 지금 이어서? 아니면 오늘? 내일?”
“…….”
“아니면 그냥 하지 말까?”
그제야 재위크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꼬리 내린 개라도 개 패듯 패는 게 나라지만 너는 그럴 가치도 없는 것 같거든.”
모욕적인 말에도 재위크는 별 말 하지 않았다.
그는 똑똑히 봤다. 자신에게 날아오던, 자신은 절대 어쩔 수 없을 마법의 화염을 그가 얼마나 쉽게 박살냈는지.
“앞으로는 조금 조심성 있게 다녀. 그렇게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다니다가 정말로 나쁜 사람들을 만나면 그 때야말로 숯덩이가 될 테니까.”
지크는 일어서 구경꾼들을 봤다.
“그럼! 혹시라도 제 아름다운 친우가 드웨인 양의 선생님이 되는데 불만이 있으신 분 더 있으십니까?”
“…….”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좋아요. 제 친우에 대한 여러분들의 오해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그럼 앞으로 저희에게 신경 쓰지 말아주시기를 바라죠.”
지크는 등을 돌렸다. 아직 결투장에 서 있는 라일라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펴보였다.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하지만 그러면서도 라일라는 손을 들어 지크의 손바닥과 마주쳐줬다.
“그럼 이 웃기지도 않은 일은 끝난 거지?”
“그렇게 말을 하기에는 아주 제대로 패던데?”
“마법사 주먹이 아프면 얼마나 아프다고.”
재위크가 들으면 억울해 죽을 것 같은 말이었다.
“일단 적당히 두들겨줬는데 계획대로는 된 거지?”
“일단은 말이야.”
“잘됐으면 좋겠네.”
“남 얘기처럼 하지 마. 너도 관련 있는 일 아니냐.”
라일라는 코웃음 쳤다.
“어쨌든 당분간은 교육에 집중하면 되지?”
“맞아. 판은 키웠고 소란을 일으켰어. 이제 마탑의 높으신 분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봐야지.”
그렇게 마탑을 휘감은 소동은 막을 내렸다.
* * *
라일라가 결투를 한 지도 며칠이 흘렀다. 지크와 라일라는 언제처럼 마탑에 들러 엘레나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탑의 마법사들의 반응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호기심과 멸시가 섞여 있던 시선은 공포와 경의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크는 시선들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마탑의 직위나 학파 같은 걸로 마탑 내에 서열이 정해진다고 해도,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위해 모인 사람들인 이상 뛰어난 마법사에 대한 대우는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탑은 일단 실력주의 단체인 것이다.
지크의 옆에서 걷는 라일라를 따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인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런 시선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정말로 가르치는 데 푹 빠졌군.’
그녀는 즐겁게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계획의 일부라는 건 거의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다.
‘뭐, 실컷 즐기라고 해야지.’
그녀가 자신을 도와준다는 언질을 줬다고 해서 그녀를 마음대로 휘두를 생각이 지크는 없었다.
‘적어도 저 정도 스트레스는 풀어 줘야 나중에 기분 좋게 도와줄 테고.’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격하게 움직일 이유도 없다.
‘소문도 잘 나고 있으니 이제 어떤 식으로든 마탑의 윗대가리들이 움직일 거야.’
그리고 거기엔 지크의 목표인 윌위스 드웨인과 올랜드 드웨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 * *
마탑의 꼭대기는 마탑주인 윌위스 드웨인의 차지다. 마탑의 꼭대기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마탑에서 마탑주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꼭대기 층의 한 쪽에는 회의실이 자리 해 있었다. 정기적으로 마탑에서 마탑주를 포함해 가장 뛰어난 마법사 열 명이 모여 지금의 정세와 마탑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회의를 한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소.”
윌위스가 마탑주로서 회의의 종료를 말하자 회의실의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어이구, 허리야!”
“이것 참! 나이 먹으니 한 달 회의도 어렵습니다그려.”
마법사들이 몸을 늘어뜨리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나고 있는 언제나의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회의가 공적인 일이었다면 회의 이후에 나누는 사담은 사적으로 고위 마법사들끼리 친분을 나누기 위한 것.
윌위스에게도 옆에 있던 마법사가 말을 걸어왔다.
“소문을 듣자하니 마탑주님의 손녀분이 새로운 선생을 들였다고 하던데요.”
“아, 그 일이요. 저도 들었습니다.”
대답을 한 건 마탑주가 아닌 다른 마법사였다. 그 외의 마법사들도 흥미를 보였다. 지금 그 이야기는 마탑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였다.
“재위크가의 아이가 결투로 큰 곤욕을 당했다지요.”
“끄응!”
어떤 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윈 재위크의 할아버지이자 재위크가의 수장인 웨인 재위크였다.
“마침 잘 된 일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또래보다 조금 뛰어나다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었으니. 게다가 허락도 없이 자기 멋대로 결투장을 사용한 건 용서할 수 없죠. 한 번 따끔한 맛을 본 것이 좋은 공부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웨인 재위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무리 마윈 재위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손자인 것이다.
때문에 다른 이들도 더 이상 마윈 재위크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그에 대한 제재도 들어간 상황. 동료의 체면을 더 이상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그들의 관심사는 마윈 재위크도 아니었다.
“이름이 라일라라고 했다죠?”
“네. 우리 소속의 마법사는 아니고. 떠돌이 마법사라고 합디다.”
“헌데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지금껏 들은 것만 해도 무영창과 영창 정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최후로 보인 영창을 한 마법은 상당히 고수준의 마법이었다고도 들었습니다.”
마법사들이 서로가 들은 라일라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그 모습을 마탑주인 윌위스 드웨인과 젊은 나이에 벌써 이 자리에 낀 올랜드 드웨인이 조용히 바라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