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본 말이다. 상처가 아물고 아물고 아물어 두껍게 딱지가 앉아 이제 별다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괜찮아요.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때문에 그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일라는 물론이고 지크조차도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많이 다쳤다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처란 것도 있는 법이지.’
지크가 보기에 지금의 엘레나는 딱 그랬다.
본인은 익숙해져 괜찮다고 하지만 그런 척만 할뿐, 상처에서는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본인을 악당에 쓰레기라고 대놓고 얘기하는 지크이지만 그는 절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다시 마왕의 길을 걷는다면 분명 장애물이 될 게 뻔한 한스와 스녹을 키우고 있는 이유 또한 그것이지 않는가.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엘레나에게는 작은 동정을 안았다.
그러나 딱 그뿐. 역시 지크는 지크였다.
“혹시 내가 드웨인양의 마력을 한 번 확인할 수 있을까?”
“네?”
“아무래도 지금까지 드웨인양의 마력을 검사한 건 전부 마법사들이었지? 나 같은 검사는 마법사들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렇게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다시 찾아온 자그마한 희망을 덥석 잡는다. 엘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쏘아지는 라일라의 시선이 날카롭다.
지크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저 엘레나의 희망을 한 번 더 짓밟는 결과가 나올 확률이 무척 높았다. 때문에 그녀는 지크의 검사가 탐탁잖았다.
하지만 막지는 않았다. 지크가 막는다고 그만 둘 위인도 아니고 그 말도 일리는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일라의 입장에서 지크의 계획에 전부 맞춰줘야 하는 것도 있었다.
“나도 걸리는 건 없네.”
“그, 그런가요.”
역시나였다. 엘레나가 표정 관리를 했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일라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첫날이니 가볍게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할 것 같아.”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레나와 헤어지고 난 뒤 지크와 라일라는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라일라는 지크를 심퉁맞게 쳐다봤다. 하지만 결국 한숨만 내쉴 뿐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눈망울을 한 지크의 어깨를 툭 칠 뿐이었다.
지크가 물었다.
“어땠어?”
“정말로 괜찮아. 저번에 얘기를 나눴을 때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때 판단했던 것보다도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저기서 마력만 받쳐준다면 정말 걸출한 마법사가 나올 거야.”
“아니. 그거 말고.”
엘레나 드웨인이 얼마나 엄청난 마법사가 되는지는 그녀보다도 지크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의 몸에서 뭔가 발견한 거라든가는 없어?”
“솔직히 없었어.”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마력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전형적인 마력이 해방되지 않은 몸이야. 아니면 마력이 선천적으로 없거나.”
“하지만 절대 마력이 없는 녀석은 아니야.”
그건 지크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럼 마력이 해방되지 않았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그것도 아니야. 그 정도로 녀석의 마력이 방대하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마력이 없거나 아직 마력이 해방되지 못했다는 가설은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너는 어땠어?”
이번엔 역으로 라일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흐음, 원점이네.”
“뭐, 초반부터 대단한 발견을 하리라곤 생각 안 했잖냐. 이제 조금씩 녀석의 몸을 살펴야지. 그리고 녀석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살펴야 하고 말이야.”
“그럼 일단은 계속 엘레나 드웨인을 교육하면 되는 거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야?”
“적어도 너보다는 귀염성 있잖아.”
“내가 엘레나 드웨인보다 귀염성이 딸린다고? 이 녀석이 내 귀여움을 무시하네. 어디 마왕으로서 단련된 내 귀여움을 보여…!”
“아, 좀!”
* * *
지크와 라일라는 며칠을 계속해서 엘레나를 가르쳤다.
라일라가 가르치는 것을 엘레나는 메마른 땅이 물을 흡수하듯 빨아들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탄을 하며 교육은 계속됐다.
하지만 서로에게 만족한 둘과는 달리 두 사람을 주목하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들은 그 시선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는다고 상대도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다.
결국 사건이 일어났다.
“잠깐 좀 보죠.”
오늘도 마탑의 접수처에서 방을 빌리려던 세 사람의 목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들의 곁에 한 사내가 있었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그 사내는 누가 봐도 마법사라고 인식할 수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긴 로브에 수정이 박혀 있는 지팡이. 거기에 백발과 길고 흰 수염을 가지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어느 연극단에 마법사 역할로 초빙받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뭡니까?”
지크가 나섰다.
사내의 시선이 지크에게 갔다가 뒤에 있는 엘레나 드웨인에게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지크를 쳐다봤다.
“당신보다는 당신 뒤에 있는 사람에게 볼일이 있습니다만. 좀 비키시죠.”
“거부합니다. 보다시피 우린 지금 바쁘거든요.”
사내가 불쾌하게 지크를 쳐다봤다. 그 시선만으로도 지크는 상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높은 지위의 부모를 두고 있는, 소위 있는 집 자식인가.’
자신의 일을 방해받는 게 불쾌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이 딱 그것이었다.
지크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 사태를 분석했다.
‘아무래도 불만은 엘레나 드웨인에게 있는 것 같지? 불만의 이유야 뭐 뻔하고.’
마법사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그녀가 마탑에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가 마법사들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기에 명분이 부족하단 말이야.’
분명 다른 이유가 얽혀 있을 것이다.
지크는 사내의 시선을 다시 살폈다.
‘나랑 라일라도 불만의 대상인 모양인 것 같은데….’
아니, 저건 불만이라기보다는 의심의 눈빛이다. 지크는 대강 상황 돌아가는 걸 알아챘다.
‘나와 라일라를 사기꾼으로 보는 모양이군. 그리고 엘레나 드웨인은 사기에 놀아나는 멍청이로 보는 거고.’
그러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상황은 대충 파악됐다. 그럼 이제는 이걸 어떻게 사용할까가 문제다.
‘덮어? 아니면 판을 키워?’
덮는 거야 무시하면 그만인 일. 제가 아무리 잘난 집안의 인간이라도 이쪽도 엘레나 드웨인이 있는 이상 계속해서 시비를 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판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엘레나 드웨인을 관찰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어.’
상황은 정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즈음해서 한 번 뻥 터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키우자!’
그리고 그게 지크 자신의 성향에도 맞았다.
지크는 한쪽 팔을 들어 라일라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사내를 쳐다봤다.
뒤에서 엘레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시비가 붙은 것 같았다.
시비를 말리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 하는 그녀를 라일라가 제지했다.
“선생님?”
“괜찮아. 한번 두고 보자.”
그렇게 두 사람은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좋은 말로 할 때 비키시죠.”
사내가 험악하게 말했다.
“좋은 말이라…. 스누위크에서는 좋은 말이란 뜻이 조금 다른가 봅니다. 누가 봐도 지금 당신은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말장난할 생각 없습니다. 당장 비켜요!”
“말장난할 생각 없으시면 가던 길 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크는 마치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옆쪽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사내의 험상궂은 시선이 더욱 거칠어졌다.
“드웨인!”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언제까지 그렇게 헛꿈이나 꾸고 있을 셈이야! 네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아무래도 지크가 비킬 생각을 않자 목소리를 크게 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사내의 발언에 엘레나의 고개가 떨어졌다.
“아, 정말로 시끄럽군요. 무슨 드래곤의 성대라도 씹어 드셨습니까?”
손으로 과장되게 귀를 막았던 지크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목소리만 큰 게 아니라 무척이나 무례하기도 하군요. 당신은 대체 어떤 존귀하신 분이시기에 제 친우의 제자에게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시는 겁니까?”
“…제자?”
“네. 제자.”
지크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 뒤에 있는 끝내주게 예쁜 제 친우가 엘레나 드웨인의 임시 선생님을 맡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당신의 그 폭언을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사내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라일라는 뚜렷한 표정 없이 사내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흥!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까 하는 인간이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겉멋 들어서 선생 놀이 하기 전에 본인 실력부터 키우는 게 우선이지!”
“그거야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죠. 그리고 제 친우도 이른바 천재라는 인종이어서 말이죠. 드웨인 양을 교육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천재?”
사내가 다시 라일라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비웃는 시선. 사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지크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이, 사기꾼들.”
이제는 사양도 없었다.
“저 녀석의 사정을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헛꿈 깨고 조용히 돌아가. 마법으로 슬슬 꾀면 네놈들의 사기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을 했나 본데…. 뭐, 솔직히 저 멍청이가 완전히 걸려들었으니 너희들의 작전은 꽤 괜찮았다고 봐. 아니면 저 멍청이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멍청했거나.”
사내가 엘레나를 한 번 차갑게 노려봤다.
“하지만 너 같은 놈들이 마탑 안에서 설치는 걸 놔둘 정도로 마탑도 스누위크도 만만하지 않아. 저 녀석의 가족들도 당연하고. 이건 충고야. 여기까지는 그냥 어쩌다 일어난 웃기지도 않은 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손 떼고 조용히 사라져.”
마치 자신이 무척 관대한 권력자라도 된 듯한 어투다.
하지만 지크는 그의 관대함에 감동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상대의 반응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어이, 모지리.”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느 귀한 집 자식인지 몰라도 처음 보는 사람을 대놓고 사기꾼으로 모는 걸 보니 인성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나 봐?”
“이 자식이…!”
“됐고. 어차피 서로의 의견은 평행선 같은데.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당신, 말하는 걸 보니 또래에서 꽤 대단한 마법사 같은데. 그렇지?”
“그렇다. 사기꾼이라 그런지 최소한의 보는 눈은 있군.”
사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 피곤하게 말로 이러지 말자고.”
지크는 엄지손가락을 펴 뒤쪽, 정확하게는 라일라를 가리켰다.
“그럼 어디 한 번 직접 확인해 봐. 우리가 사기꾼인지 아닌지, 내 친우가 드웨인 양을 교육할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말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