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지크는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라일라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마법 물품에 눈을 빼앗겨 점포의 주인이 그 엘레나 드웨인인 걸 아직 눈치채지 못 한 모양이다.
지크는 라일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한창 즐거운 쇼핑에 빠져 있을 때 방해받은 게 짜증났는지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지크는 턱짓으로 엘레나를 가리켰다.
라일라는 그제야 점포의 주인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바로 알아보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엘레나 드웬인에 대한 기억도 없나?’
그렌 제너드의 파티는 어느 정도 기억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걸까. 하지만 곧 눈을 크게 치뜨는 걸 보니 단순히 바로 알아차리지 못 것뿐인 모양이었다.
“물건은 여러 가지 있으니 봐 보세요.”
오랜만의 손님인 것일까. 그녀는 안 쪽에서 다른 물건들을 꺼내 보여줬다. 그랬기에 라일라가 자신을 보고 놀란 것을 보지 못 했다.
라일라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마치 물건을 살까 말까 상의를 할 것처럼 지크를 데리고 거리를 뒀다.
“맞지?”
“맞아.”
주어도 뭣도 없는 대화가 오간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둘은 의미를 나누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미 화제가 공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고 해도 이곳은 길가다. 그들의 비밀을 직접적으로 얘기하기에는 그리 좋은 곳이 못 된다.
게다가 거리가 조금 떨어져 엘레나가 듣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스와 스녹의 귀는 둘의 대화를 완벽하게 캐치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둘은 지크나 라일라의 대화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점포의 상품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귀라는 기관은 물리적으로 막지 않는 이상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건 거르는 편한 기능은 없다.
아무리 신뢰하는 종이라고 해도 그들의 비밀을 가르쳐 줄 순 없었다.
“놀랐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렌 제너드의 파티에 소속되었을 정도로 그녀의 재능과 능력은 뛰어나다. 솔직히 지크가 마법사로서 회귀 전의 엘레나 드웨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존재는 둘. 마도의 마왕과 라일라뿐이었다.
물론 라일라는 아직 회귀 전의 엘레나 드웨인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중 영창에 무영창을 무슨 식은 수프 들어마시 듯하는 걸 보면 재능은 라일라가 압도적으로 위였지만, 아무래도 회귀 전 엘레나 드웨인은 많은 경험과 충분한 시간이라는 재료로 숙성된 만큼 지금 당장은 회귀 전의 엘레나가 위였다.
‘그것도 따라잡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테지만.’
따라잡기만 하겠는가. 손쉽게 추월해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나갈 게 틀림없었다.
“어쩔 거야?”
“어쩌긴.”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 생각 없어.”
어차피 지금 그녀는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지크와는 초면인 관계이기도 하다. 여기서 뭘 한단 말인가.
“그럼 다른 사람들처럼 친분이나 맺지 그래?”
분명 루벨라와 레오나를 일컬음이다. 지크가 인상을 쓰자 라일라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크의 어깨를 툭 쳤다.
“정했으면 움직이자. 네 말대로 우리가 뭔가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라일라는 다시 점포의 물건을 보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앗!”
엘레나가 입을 막고 어딘가를 쳐다봤다. 무척이나 놀란 듯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 그거요!”
“…네?”
스녹이 당황했다. 그녀의 두 눈이 자신에게 향해 있던 것이다.
“어깨에 타고 있는 그 동물!”
“아, 노웸이요?”
아무래도 그녀가 관심이 있는 것은 노웸인 모양이었다.
이런 반응은 꽤 겪어봤던지라 스녹은 놀라지 않았다. 노웸의 무척 귀여운 외견 때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많았다.
스녹은 노웸의 앞에 손을 갖다놨다.
쿠!
툭!
노웸이 스녹의 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제 가족입니다.”
쿠우!
노웸이 즐겁게 코를 울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 엘레나에게 있어 노웸의 귀여움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노웸 앞까지 들이밀었다.
쿠?
노웸이 움찔거렸다. 자기 몸통보다 훨씬 큰 얼굴이 이상한 숨소리와 함께 덤벼오는 모습은 천하의 노웸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이 아이, 대지의 환수죠?”
계약자인 스녹은 물론 옆에 있던 한스, 다시 다가오고 있던 지크와 라일라까지 놀랐다.
쿠!
노웸도 놀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지만 노웸을 본 것만으로도 대지의 환수라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처음 봤어요. 설마 내 눈으로 대지의 환수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빛나는 눈을 보니 노웸의 존재는 아마도 그녀의 흥미를 훌륭하게 자극한 모양이었다.
“혹시 이 아이를 조금 조사해봐도 괜찮나요?”
쿠?
노웸이 한 걸음 물러났다. 스녹의 손바닥에서 팔뚝으로 조심조심 옮겨갔다.
“괜찮아요. 아프게는 안 할 거니까.”
하지만 좋게 말해서 제정신이 아니고 나쁘게 말해서 미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말은 전혀 설득력 없이 보였다.
쿠우우!
공포를 느낀 노웸이 스녹의 팔을 후다닥 달려가더니 어개를 타고 넘어 등 뒤로 숨었다. 스녹의 옷자락을 발톱으로 꽉 쥐고 대롱대롱 매달린 후 얼굴만 쏙 스녹의 어깨 위로 내밀어 엘레나를 경계했다.
대지의 환수의 위엄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정말로 무서운 짓은 안 해! 해부라던가 그런 것도 안…!”
스녹마저 한 걸음 물러섰다. 노웸은 얼굴을 스녹의 옷자락에 파묻었다.
“그만하세요. 신기한 건 알겠지만 애들이 너무 무서워하잖아요.”
그들을 구한 건 라일라였다. 마치 전설의 용사처럼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그 든든한 모습에 스녹과 노웸은 감동했다.
엘레나도 자신이 너무 심했다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너무 신기한 나머지….”
“아무리 그래도 옳은 태도는 아니었단 걸 아시죠?”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엘레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를 보며 라일라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순서를 지켜야죠. 만약 노웸을 해부해서 조사를 해야 한다면 내가 할 거예요.”
“…네?”
엘레나가 멍청하게 되묻는다. 그리고 믿었던 아군에게 뒤통수를 맞은 스녹과 노웸이 굳었다.
…쿠!
아련한 외침만이 노웸의 절망을 내보이고 있었다.
* * *
잠깐의 소란이 지나고 엘레나는 다시 주인으로서 물건을 팔기 시작했고 라일라도 손님으로서 물건을 골랐다.
스녹과 노웸은 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아예 스녹의 옷 안으로 숨어 든 노웸 때문에 스녹의 가슴 언저리가 볼록했다. 옷자락이 덜덜 떨리는 게 여간 겁먹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녹과 노웸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은 두 여성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품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라일라는 가장 가까이 있는 상품을 들었다. 아까 샀던 개쓰레… 아니, 효율이 엄청, 많이, 극히 떨어지는 아티팩트와 비슷한 판 형태였다. 그러나 재질이 달랐다.
“철이네요.”
마법이란 놈은 우습게도 재료를 극명히 가린다. 게다가 비싸고 희귀한 금속일수록 마법이 잘 스며든다. 만약 마법의 신이란 것이 있으면 무척이나 사치를 좋아하는 녀석이 분명할 것이라고 라일라는 확신했다.
그런 조건에서 이런 철로 만든 아티팩트를 내놓는다는 건 둘이다.
라일라처럼 극히 뛰어난 마법사여서 어느 정도 재료의 한계에서 벗어났거나, 아니면 돈이 없거나.
그리고 보통 후자는 효율이 없다고 단언해도 될 정도로 성능이 조잡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물건을 꼼꼼히 봤다.
‘응?’
라일라는 흥미를 느꼈다. 철판에 새겨진 마법진을 한 번 쓸어 봤다. 보통 마법진이라면 무척이나 복잡한 선과 도형들이 교체하는 진을 떠올린다.
틀리지 않다. 라일라가 아티팩트를 만들 때도 무척이나 공을 들여 마법진을 새겼다.
그러나 이 철판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은 달랐다. 복잡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했다.
‘수준이 높네?’
비효율적으로 온갖 진들을 덕지덕지 겹쳐 놓은, 처음 산 황금판 아티팩트에 비하면 이건 그야말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뭐지?’
손끝이 닿은 철판 뒷면에 뭔가 꺼끌거리는 것이 느껴져 라일라는 철판을 뒤집었다.
“호오!”
철판 뒤에도 새겨져 있는 마법진을 확인한 그녀가 감탄했다. 철판을 계속 뒤집어가며 새겨진 마법진들을 확인했다.
“뭔가 재미 있는 거라도 있어?”
“이거 봐.”
라일라가 지크에게 아티팩트를 보여줬다. 한스도 호기심을 보였다. 스녹은 고개를 쭉 뺐다.
노웸이 스녹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하지만 둘은 절대로 라일라와 엘레나의 일정 반경 이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위와 아래의 마법진이 다르지?”
“그렇네요.”
한스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지크의 반응은 달랐다. 그가 아무리 마법에 대해 문외한이라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입체마법진인가.”
“맞아.”
평면을 넘어 공간까지 사용해 그 효율을 늘리는 마법진. 그게 바로 입체 마법진이었다.
“물론 입체마법진치고 대단한 건 아냐. 입체마법진이라고 간신히 명함만 내밀 수 있는 수준이지. 단순하기 그지 없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건 변함이 없어.”
마법사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입체마법진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마법사가 얼마나 높은 마법적 성취를 얻었는지 알 수 있다.
지크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자신의 칭찬을 들은 건지 엘레나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다음 라일라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게다가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마력 은폐를 무척이나 잘 했다는 거야.”
“그건 나도 느꼈다. 훌륭한 마력 은폐로군.”
둘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엘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법진을 보니까 불의 마법이야. 별 거 아니지만 무척 효율적으로 되어 있어. 특히 이런 철판에 새겼다는 것 자체가 수준이 높다는 거지.”
라일라는 엘레나의 아티팩트가 퍽 마음에 들었다.
지크도 흥미로움을 느꼈다. 라일라가 이렇게 칭찬을 한 물건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라일라의 평가는 100중 95가 욕, 나머지가 그럭저럭이었다.
“이거 얼마죠?”
라일라가 바로 가격을 물었다. 엘레나가 머뭇거리며 가격을 말했다. 라일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그렇게 싸다고요?”
아니, 싼 정도가 아니다. 이건 거저나 다름없었다.
“저, 그게요….”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을 때였다.
“거기 물건을 사실 겁니까?”
옆 점포의 마법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는 옆 점포는 이미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퇴근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는 혀를 차며 그들에게 말했다.
“호기심이 이는 건 이해하지만 그딴 물건 살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충격적인 얘기를 내뱉었다.
“마력도 못 쓰고 마법사도 아닌 녀석이 만든, 그저 아티팩트 흉내를 냈을 뿐인 물건을 뭐하러 산단 말입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