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스누위크.
예전 지크가 언급한 대로 마법사들의 성지라고까지 불리는 도시다. 그 보기 힘들다는 마법사들도 이곳에서는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지팡이를 들거나 로브를 입은, 딱 봐도 ‘나 마법사요’ 같은 티를 내는 자들은 물론 별 다른 특징 없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나돌아 다니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도시의 마법사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왼쪽 가슴에 달린 작은 브로치. 마탑의 소속이라는 걸 알려주는 그 브로치만큼은 어떤 차림새로 다니든 마법사라면 꼭 달고 있었다.
그건 마탑 소속으로서의 자긍심이었다.
마법사들을 키우는 곳은 스누위크 말고도 많았다.
나라에서 마법사들의 양성소를 운영하는 곳이 있는가하면 스누위크 처럼 아예 마탑을 만들고 도시 전체를 마법사 양성소로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마탑의 도시이자 마법사들의 성지를 물어볼 때 다른 곳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스누위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오직 그 단어뿐이었다.
그런 스누위크의 명성을 대변이라도 하듯 도시 중앙에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 있는 마탑이 서 있었다.
도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는 그건 결코 쓰러지지 않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형상화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스누위크에 있는 마법사들의 명예이자 긍지. 전 세계의 모든 마법사들의 선망, 질투, 견제를 받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거목.
그것이 바로 스누위크의 마탑이었다.
당연히 스누위크를 처음 와 본 사람들은 도시에 들어서기 전부터 보이는 그 마탑을 보고 감탄했다.
“오오!”
“우와!”
그리고 그건 백작가에서 나와 본 적 없는 한스와 광산에서 살다시피 한 스녹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마탑이군요!”
“정말로 높다!”
쿠!
두 명과 한 마리가 고개를 떨어질 듯 젖혔다. 스녹의 어깨에 서서 마탑을 올려다보던 노웸이 일순 균형을 잃어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다행히 노웸은 환수의 반사 신경으로 스녹의 옷자락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바닥에 충돌하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라일라도 마탑을 올려다봤다. 그저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한스, 스녹의 심정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마법사에게 친화적인 도시다. 마법사인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지식과 경험은 엄연히 다른 법. 이곳에서 겪을 경험이 라일라는 너무 기대됐다.
그리고 지크. 그도 다른 이들과 같이 마탑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가 품은 감정은 다른 셋-노웸까지 포함하면 넷-과는 아예 방향성 자체가 달랐다.
‘지긋지긋한 놈들.’
만인과의 투쟁을 하던 회귀 전. 웬만한 거대 세력과는 전부 다 한 판 씩은 붙어 본 지크가 스누위크의 마탑과 붙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당연히 붙어봤고 고전했다.
근접전에 약하고 공격 속도가 느린 마법사들. 하지만 마법사들이 존중받는 이유는 그 약점만 보충한다면 어마어마한 ‘한 방’을 때려버릴 수 있는 놈들이란 것이다.
게다가 마법사들은 수가 늘면 늘수록 위력을 증폭시킬 방법도 많았다.
서로의 마력을 연결해 더 거대한 마법을 사용한다든가, 상승효과를 일으켜 1+1=2가 아닌 2이상을 만들어버리는 마법들을 사용한다든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엄청난 마법에 지크도 거의 죽을 뻔했었다.
물론 지크는 결국엔 그 마법의 폭풍을 뚫고 마법사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에게 접근하기 전에는 정말로 지옥행 티켓이 손아귀에 꽉 쥐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최종적인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만약 놈들의 연계 같은 것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훨씬 고전했을 거야.’
머리 좋은 놈들이라 전략이나 전술은 잘 짤지언정 전장에서 군사로 선 이들을 통솔하는 건 어설펐다. 지크는 그 빈틈을 효율적으로 찔렀다.
지크는 상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각자의 감정을 담아 마탑과 스누위크를 보고 있는 일행들을 감상 속에서 끄집어냈다.
“정신 차려라, 이것들아. 성문 앞에서 넋 놓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민폐야.”
“…네가 민폐라는 말을 쓰는 거야?”
라일라가 어처구니없어했다.
“왜?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남한테 민폐 안 끼치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카르위먼에서 그 증표로 명예 성기사도 줬잖냐.”
“민폐를 안 끼쳐? 너한테 온갖 치욕과 굴욕을 당하고 목숨까지 달아난 놈들이 들으면 아마 잘려나갔든 파괴됐든 썩어 떨어졌든 자기 신체부위 어떻게든 기워 붙이고 일어나려 할걸?”
“뭘 모르는군, 라일라.”
지크는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원래 나쁜 놈들이란 건 패든, 짓밟든, 침을 뱉든 뭐든 할 수 있는 연습 과녁 같은 놈들이야. 그놈들에게 뭔 짓을 하든 사람들은 칭찬을 하지. 그런데 내가 무슨 민폐를 끼치겠어.”
“당한 놈들은 그렇게 분명히 그런 생각 안 할 거야.”
“그놈들은 그런 의사표현을 할 권리가 없어. 나쁜 놈들이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습다는 건 알지?”
“아니, 전혀. 난 이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어. 예전의 내가 지금 내 얘길 들어도 백번 맞는 이야기라고 고개를 끄덕일걸?”
“하여간 주둥이는!”
더 이상 듣기 힘들다는 듯 라일라가 고개를 흔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고 한스와 스녹도 움직였다.
그렇게 그들은 스누위크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 * *
지크의 궤변 아닌 궤변에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잠시, 라일라는 온 도시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마법사에게 이 도시는 천국과 다름없었다.
온갖 마법 물품과 재료들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고 낮은 위력의 것이지만 마법서를 파는 곳도 있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학구열이 높은 마법사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전체적인 서적의 양과 수준도 높았다.
그래서 지금, 지크와 한스, 스녹은 숙소조차 잡지 못한 채 그녀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다.
“어머, 저것 좀 봐! 여기에 저런 것도 있었네?”
그 말만을 남기고 라일라는 무리에서 이탈해 어떤 노점 앞으로 다가갔다.
“…보통 무리에서 떨어진 동물은 외부의 위협에 취약하다고 하던데.”
하지만 지금의 라일라는 상대가 어떤 무서운 포식자라도 역으로 물어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크 일행은 슬금슬금 라일라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섰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와 일행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건 바람 화살을 쏠 수 있는 아티팩트인가요?”
“눈썰미가 상당히 좋군요, 아가씨. 용도를 바로 알아보시네요.”
점포의 주인은 특색 없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하지만 왼쪽 가슴에 마탑을 상징하는 브로치가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연구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발명품을 팔러 나온 마법사인 것 같았다.
라일라가 손에 든 건 얇은 금판이었다. 표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진으로 엷은 마력이 흐르고 있다.
“얼마죠?”
흥미가 간다. 돈도 있다. 라일라는 대번에 가격을 물었다.
마법사가 가격을 말했다. 한스와 스녹이 경악했다.
“저, 저렇게 비싸다고요?”
“바가지 아닌가요?”
지크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받은 둘이었지만 서민 감각은 아직 빠지지 않았다.
애초에 돈이 있다고 해도 그 돈을 편하게 사용할 기간조차 별로 없어 익숙해지지 못한 것이다.
“원래 아티팩트는 저 정도 해.”
지크가 한스와 스녹의 착각을 정정해줬다.
“라일라가 여행 중에도 여러 아티팩트를 척척 만들어줘서 너희들은 실감이 잘 안 나겠지만, 아티팩트란 건 원래 만들기 극히 어려운 거다. 설비 짱짱한 작업실에서 귀한 재료들을 갖고 수준 높은 마법사가 시간을 투자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지. 당연히 아무리 사소한 아티팩트들이라도 비싸질 수밖에 없어. 저 정도 가격이면 그리 비싸지 않은, 오히려 싸구려에 속하는 아티팩트다.”
물론 장사니만큼 어느 정도 바가지를 끼얹어 파는 일도 종종 있지만 지크가 보기에 이번 거래는 나름 공평했다.
‘장사꾼이 정직하거나 아니면 라일라가 사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겠지. 마법진만 보고 용도를 파악하는 마법사가 많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지크는 아마 후자가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봤다.
라일라는 아티팩트를 들고 기분 좋게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훌륭한 물건인가 보지?”
“아니, 개쓰레기야.”
지크가 발을 삐끗했다. 한스와 스녹도 라일라를 쳐다봤다.
“마법의 구동과 현현은 낡디 낡았고, 마력의 움직임도 이리저리 돌아 엄청나게 비효율적이야. 위력 증폭 같은 건 아예 없어. 당연히 위력도 사거리도 마력 소모도 전부 다 저급일 테지. 이런 쓰레기를 팔 생각을 하다니 저 사람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해.”
한스와 스녹은 서로를 마주봤다. 라일라의 말투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그 주인공을 봤다.
“…뭘 그렇게 보냐. 나 아냐.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지크의 부정은 통하지 않았다. 이제는 노웸까지 지크를 쳐다봤다.
“젠장, 그럼 그런 건 왜 산 거야.”
지크가 짜증을 냈다.
“너무나 엉망진창이라서 오히려 호기심이 일어서 말이야. 그 왜 뭐랄까,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쓰레기로 만든 게 움직이면 신기하잖아. 그래서 샀어. 오히려 이런 게 나한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러냐.”
지크는 뒤를 돌아봤다. 라일라에게 물건을 판 마법사가 흐뭇하게 지크 일행을 보고 있었다. 지크의 시선을 눈치 채고 눈으로 인사를 한다.
아무리 지크라도 차마 그 인사를 무시하지 못하고 똑같이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앞을 쳐다봤다.
지크는 다시는 그 상점을 돌아보지 않았다.
* * *
“…이제 슬슬 숙소를 잡자.”
라일라에게 지크가 그 말을 꺼낸 건, 슬슬 하늘이 노란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라일라가 하늘을 보고 놀랐다. 그녀도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좋아. 이 라인의 가게만 보고 잡으러 가자.”
“…보통은 거기서 바로 숙소를 잡자는 얘기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
하지만 라일라는 벌써 가까운 점포의 물건을 보고 있었다.
지크는 한숨을 쉬며 라일라가 들어간 점포 라인에 있는 다른 점포들의 수를 셌다.
‘얼마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이곳은 상당히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도시를 마구잡이로 헤집다 보니 어느새 이런 곳까지 들어왔다. 당연히 점포의 숫자도 적었다.
지크는 라일라의 어깨 너머로 상품을 살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만큼 당연히 점포 물건의 상태는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크의 눈으로 보기에도 상품들이 조악했다.
‘라일라에게는 이쪽이 더 흥미가 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라일라도 수준 떨어지는 물건이랍시고 마구잡이로 사들이진 않았다.
‘쓰레기도 흥미가 가는 쓰레기와 악취만 가득한 쓰레기는 구별을 해야 한다고 했지.’
물론 그 기준은 라일라 개인의 것이었다.
점포의 물건들을 훑어보며 이동하던 라일라가 드디어 마지막 점포에 도착했다. 드디어 이것만 끝나면 숙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크가 그녀의 뒤에 섰다.
“어서 오세요.”
미성이 그들을 반긴다. 지크는 상품을 살폈다.
‘응?’
지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들은 아티팩트가 아닌 것 같은데?’
아티팩트 특유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력까지 숨길 수 있는 아티팩트란 말인가.
‘그런 걸 왜 이런 길바닥에서 파는 거야?’
지크가 점포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이 녀석은!’
알고 있는 인물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는 인물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부스스한 갈색머리에 대충 주워 입은 것 같은 로브. 하지만 녹색의 눈은 총기로 반짝인다. 꾸미지 않았지만 드러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인 소리를 들을 만한 여성.
‘엘레나 드웨인!’
회귀 전, 그렌 제너드와 함께 자신을 쓰러뜨린 용사 파티의 마법사가 거기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