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지크 일행은 한동안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고대 제국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은 책들을 찾았다.
얼마 지나자 연합군이 보내준 인력이 도착했다.
라일라는 그들에게 탁본을 필사한 종이들을 건네주고 이것과 비슷한 글자를 찾아 달라 요청했다.
연합군이 보내준 인력은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필사본을 들고 책들 사이사이를 누볐다. 모자란 필사본은 다른 엘프들이 써서 필사본이 없는 이들에게 건넸다.
작업은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됐지만 그렇다고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퍼석!
지크가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의 손 안에 남은 부스러진 책의 찌꺼기들을 쳐다봤다.
세게 힘을 준 건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쥐었을 뿐인데 책은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처럼 잔해들을 쏟아냈다.
아무리 이 도서관이 관리가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세월의 힘은 인위적인 관리를 너무도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쯧!”
혀를 한 번 차고 지크는 가까운 쓰레기통에 책을 던져 넣었다. 이미 쓰레기통에는 부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다시 아까의 곳으로 가 이번엔 다른 책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이번 책은 상태가 그나마 괜찮았다.
함부로 다루면 방금 전의 책처럼 먼지로 화하긴 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쥐기만 해도 무너지는 참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지크는 책을 펴 글자를 살폈다.
‘이 녀석도 아닌 것 같아.’
라일라의 탁본과 글씨 모양이 달랐다. 지크는 책을 옆에다 두고 다른 책을 찾았다.
“여기 있었네?”
책으로 만들어진 벽 너머를 바라봤다. 시야가 가려져 있지만 책 무더기 사이사이로 맑은 눈동자와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라일라였다.
책들을 찾다가 어느새 라일라가 책을 찾는 근처까지 온 모양이었다.
지크가 라일라를 빤히 쳐다봤다.
‘이 녀석이 마왕일 수도 있단 거지.’
지크 자신이 마왕이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녀가 마왕 후보라니. 그것도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는 용사였을 때 그와 대적하는 마왕이다.
“…왜 쳐다 봐?”
지크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눈치 챘는지 라일라가 물었다.
“…혹시 너 세상에 불만이라든가 있냐?”
“뭐?”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이 주륵 흘렀다. 떨어뜨릴 뻔한 책을 부여잡고 그녀가 샐쭉하게 지크를 노려봤다.
“갑자기 무슨 놈의 헛소리야.”
“아니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뭐 그런 생각이라도 갖고 있냐?”
“내가 너냐!”
지크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정강이를 한 대 까였을 것이다. 라일라는 지크를 한 번 노려봐 주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헛소리할 시간에 책이나 찾아.”
라일라는 지크의 그것을 언제나의 놀림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지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런 놈이 마왕이라니.’
역시 개꿈일까.
‘아냐. 저번에 생각했던 것처럼 잃어버린 기억에 뭔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사람이란 건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어렸을 적 지크 스틸월을 아는 사람이 훗날의 지크 모어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만큼 사람의 미래는 모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크는 라일라에게 뭔가를 캐내려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의 정리는 끝난 상태.
그는 다시 고대 제국과 관련이 있는 책을 찾기 위해 다른 책무더기 쪽으로 걸어갔다.
* * *
아드로원 대수림에 도착하고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전쟁이 끝난 후 멘티스에서 지내며 도서관의 책들을 조사하던 지크 일행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보고 싶을 거야!”
레오나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지크와 라일라를 껴안았다. 라일라가 그녀의 등을 두드린다. 지크도 그녀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레오나는 지크 일행을 따라가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일족을 떠나 가출을 감행한 건 호수의 눈물을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호수의 눈물이 일족의 품에 돌아온 이상 그녀가 대수림을 나갈 이유는 없다.
물론 그녀는 이 상태로 지크 일행과 여행을 계속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 대 무녀 후보라는 이름값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호수의 일족의 제사를 지내는 권한 있는 원로 정도의 직위였던 무녀의 위상이 불의 나무라는 상정 외의 존재 때문에 급격하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녀의 후계라는 자리도 중요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일단 한 번 튕겼을 것이다. 대놓고 거절하진 않았겠지만 싫은 티를 팍팍 냈을 것이다.
그녀는 엘프로서 상당히 어린 나이의 소녀였으니까.
그러나 인간 세계로 나가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이 그녀를 변화시켰다.
레오나는 무녀의 후계자라는 자리를 맡기로 했다.
때문에 지크 일행과 같이 갈 수 없었다.
레오나는 한스와 스녹도 한 번씩 꼭 껴안고 노웸을 한번 세게 품에 안았다.
그리고 물러섰다. 눈에 이슬방울이 맺혀 있는 상태에서 환하게 웃었다.
“지금은 비록 헤어지지만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건 아닐 거야.”
“물론이지. 종종 칼프날을 이용할 생각이니까 적어도 그 때마다는 볼 수 있어.”
라일라가 맞장구쳐줬다.
“올 때 마다 꼭 나한테 들르는 거다? 꼭이야!”
“물론이지!”
라일라에게 확답을 받아낸 레오나가 이번엔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는?”
레오나가 조금 불안한 눈으로 바라본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생각해보면 지크와 레오나의 관계는 참 기묘했다.
그렌 제너드와 같이 지크를 죽이는데 한몫 보탰던 레오나.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크는 그에 대한 원한은 전혀 없었다.
‘진 놈은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지. 게다가 이미 루벨라랑도 협력을 했던 판에 레오나라고 다르겠어.’
하지만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꿈에 나온 것이 예사롭지 않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하지만 지금 지크는 그녀를 분명 같은 일행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종종 들를 기회가 있을 때 얼굴 비추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지.’
그랬기에 상당히 시원하게 대답을 줄 수 있었다.
물론 절대로 고개를 끄덕이라며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라일라의 압박도 분명 원인 중 하나였다.
“고마워!”
레오나가 크게 말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가족들 옆으로 물러났다.
지크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그들은 레오나의 이별 장면을 잔잔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왕비가 레오나의 어깨를 안고 눈물을 닦아준다. 로만느도 레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와 있는 것은 호수의 일족의 왕족뿐이었다. 다른 일족의 왕들과는 전부 전날에 인사를 끝냈다.
이번 자리는 지크 일행의 친구였던 레오나와 그 가족으로서 따로 만든 것이었다.
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우리를 도와준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겠네.”
“별말씀을요. 저희도 얻은 게 꽤 많습니다.”
지크가 답했다. 고대 제국의 정보라든가 불의 나무라든가. 이번 여행은 분명 수확이 많았다.
“게다가 칼프날의 책도 가져가게 해주셨고 말이죠.”
지크와 라일라 그리고 지원된 연합군 병력의 노력 덕에 그들은 상당히 많은 양의, 탁본과 비슷한 글자를 가진 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책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 많은 양을 필사할 수도 없는 노릇. 필사를 한다 해도 글자를 모르니 의미를 틀리게 옮겨 적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멘티스에 주저앉아 해독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 지크 일행의 곤란함을 안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은 결정을 내려 발견한 책들을 전부 대여해주기로 했다.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칼프날에 있는 책들은 예전에 레오나의 오빠가 말했듯이 엘프의 보물 취급을 받고 있는 것들이다.
한데 그런 것들을 선뜻 빌려주다니.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이 지크 일행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 오게. 이미 다른 일족의 왕들과는 말이 다 끝났으니까. 자네들이 지금 빌려간 책을 전부 훼손해서 온다고 해도 다른 책을 빌려줄 걸세.”
“감사합니다.”
지크 일행은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했다. 로만느도 그들과, 특히 라일라와 헤어지는 걸 무척 아쉬워했다.
호수의 눈물의 마력을 끌어낼 때 등 같이 움직이며 정이 많이 든 것이다.
“혹시라도 뭔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바로 도움을 청해요. 다른 일족이 거절한다 해도 우리 호수의 일족만큼은 당신들을 도와줄 테니까.”
손주를 보는 할머니 같은 눈빛으로 그녀가 자상하게 말했다.
작별 인사를 모두 끝낸 지크 일행이 길을 떠났다. 호수의 일족의 수도를 왔을 때처럼 드니엘이 그들을 안내했다.
이번 전쟁의 공적으로 드니엘은 다시 왕실 호위대로 복귀했다. 다만 이번에 한해서는 지크 일행을 그가 직접 호수의 일족의 마지막 경계선까지 안내하기로 했다. 호수의 일족이 보이는 호의였고 드니엘도 이 임무에 자원했다.
“출발하시죠.”
드니엘이 앞장서고 지크 일행이 그 뒤를 따른다.
그렇게 지크 일행은 아드로원 대수림을 떠나는 길에 올랐다.
* * *
호수의 일족의 마지막 마을에 도착한 후 지크 일행은 드니엘과도 헤어졌다. 이제 남은 건 그들 일행뿐이었다.
“조금 허전하네.”
라일라가 힐끔힐끔 옆을 봤다. 언제나 레오나의 자리였던 그곳이 이제는 텅 비어있었다.
만나서 같이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크게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라일라라면 당연하겠지.’
기억이 없는 라일라에게 레오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친밀한 사이다. 감정도 나름 풍부한 그녀가 외로움을 크게 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런 녀석이 마왕이 된다고?’
사람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찔끔 난 눈물을 털어버리고 라일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철의 일족은 어떻게 됐을까?”
“일단 다른 일족들이 관리를 하며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 낼 모양이야.”
“일반 엘프들은 불쌍하네. 그 엘프들은 르누나 지배층과는 관계가 없을 텐데.”
먼 옛날에는 철의 일족의 일반 엘프들도 다른 일족을 핍박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 인과를 지금의 철의 일족에게 묻기는 힘들었다.
“르누 녀석만 조용하게 있었어도 계속 평화로웠을 텐데 말이야. 뭐, 다른 일족들도 철의 일족의 일반 엘프들에게까지 가혹한 짓을 하진 않을 생각인 모양이더라고.”
“그건 다행이네.”
라일라가 안도했다.
“그럼 이제 어딜 갈 거야?”
“글쎄.”
‘슈트올에 한번 가볼까.’
꿈에서 나온, 아마도 라일라인 듯한 마왕이 함락했다는 곳이다.
‘한번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때 지크의 상념을 라일라가 깼다.
“혹시 괜찮으면 ‘수느위크’에 갈 수 있을까?”
“수누위크?”
지크도 아는 도시다. 아니, 아는 걸 넘어서 무척 유명한 도시다. 세계의 도시에 대해 잘 모르는 한스와 스녹조차도 아는 도시.
“응, 거기에 혹시 클로원에 대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갖고 온 책의 해석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확실히 그렇긴 하지.”
수느위크는 온갖 지식과 학문으로 유명한 도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도시에 있는 어느 한 가지에 비하면 별 의미를 갖지 못 한다.
“뭐니뭐니해도 마탑이 있는 곳이니까.’
이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성지. 그게 수느위크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불리는 별명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