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마왕?’
지금까지 브레이브 일행의 대화를 눈꼴 시린 표정으로 보고 있던 지크의 눈에 처음으로 흥미라는 감정이 실렸다.
‘그러고 보니 지크 브레이브란 놈은 용사라고 했었지?’
에스텔레이드 들고 실력 좀 있다고 용사 칭호를 붙이진 않을 터. 그렌 제너드조차 여러 마인들을 처단한 후 본격적으로 마왕 공략을 선언했을 때부터 용사라고 불렸다.
‘그럼 적어도 저 녀석이 용사 칭호를 받을 만큼 인간에게 적대적인 무언가가 있었다는 소린데.’
눈앞의 개꿈이 진짜라는 확신은 아직 없다. 하지만 라일라가 지크 브레이브를 용사라고 기억한 만큼, 지크의 추측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럼 누구지?’
힘의 마왕 지크 모어가 용사 지크 브레이브가 된 미래이니 당연히 그 상대가 지크 자신은 아닐 것이다.
‘다른 마왕들인가?’
회귀 전을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섣부르게 결과를 내릴 수도 없었다.
‘내가 용사라고 불리는 정신 나간 세계이니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어.’
혹시 아는가. 성녀 아이네 루벨라가 마왕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세계일 수도.
‘…그건 그것대로 끔찍하군.’
지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어버리고는 다시 브레이브 일행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크 브레이브가 물었다.
“어디로 움직였대?”
“슈트올.”
“대도시군.”
거한이 침음을 흘리고는 이어 물었다.
“어떻게 됐다고 하지?”
“함락됐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전멸했다고 적혀 있어.”
레오나의 말에 일행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대도시의 전멸. 상세한 상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끔찍한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죽은… 아니,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나 되지?”
마법사가 물었다. 마왕이 침공해 도시가 함락됐다면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건 써 있지 않아.”
“거의 없거나 아예 없거나. 둘 중 하나겠군.”
마법사의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용서할 수 없어요!”
루벨라가 소리쳤다. 언제나 순수한 얼굴로 다른 사람을 위하던 그녀의 얼굴에 분노라는, 그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슈트올은 무척이나 평화로운 도시예요! 시민들도 친절했고 시장도 좋은 사람이었죠! 카르나 님도 신실하게 믿는 그런 도시였는데…! 그걸…! 그걸…!”
결국 루벨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조용히 흐르는 눈물이 바닥을 조금씩 적셨다. 레오나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 줬다.
“아이네의 말이 맞습니다.”
지크 브레이브가 말했다. 일행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지크 브레이브의 목소리는 루벨라처럼 격앙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평온한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조용한 분노가 더욱 무서운 법이다.
“나쁜 사람도 있었겠죠.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겁니다!”
지크 브레이브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로 그들이 그런 식으로 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우와, 진짜로 정말로 저게 나라고?’
지크는 팔을 벅벅 긁었다.
‘제발 좀. 이놈의 악몽은 언제 끝나는 거야?’
지금 꾸는 꿈은 지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잔혹한 악몽이었다. 심부 저 밑에서 공포가 솟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지크 브레이브가 레오나를 쳐다봤다.
“마왕은 아직 슈트올에 있다고 합니까?”
“아니. 지금은 철수했다고 쓰여 있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요?”
“그런 정보는 없어.”
지크 브레이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우리도 슈트올로 가보도록 하죠. 거기서 마왕이 어디로 갔는지를 찾아봅시다. 마왕의 정보도 얻을 수 있다면 얻고요.”
일행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리더인 지크 브레이브가 내린 결정이다. 게다가 반대해야 할 이유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마왕의 정보부터 정리해볼까?”
마법사가 의견을 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거의 없잖습니까.”
거한이 의문을 표했다.
“뭐, 그렇지. 하지만 소수의 정보라도 중요하다면 계속 상기하는 게 좋아. 그만큼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힐 테고, 그러면 뭔가 관계가 있는 정보를 발견했을 때 더욱 쉽게 연관 지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군요.”
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먼저 말함세.”
마법사가 말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그놈은 엄청난 마법적 능력을 갖고 있어. 막대한 마력은 물론이고 마법적 스킬도 엄청나지. 무영창에 이중영창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데다가 무영창을 하더라도 마법의 위력이 뛰어나. 정식 영창을 하면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마물을 다루지. 녀석의 군세는 정말로 엄청나. 수도 질도 압도적이야.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는 요새 몇 개도 함락됐을 정도니까.”
레오나가 말을 받았다. 다음으로 거한이 입을 열었다.
“외모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성별은 여성으로 보이지만 모르지. 겉보기만 그럴 뿐, 그 녀석이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야.”
“그리고 아름답죠. 무척이나. 저도 아름답다고 주변에서 말해지지만, 마왕은 저를 훨씬 능가하는 미인이에요.”
마무리는 루벨라였다. 어떻게 보면 마왕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 같았지만 싸늘한 냉기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냥 마왕의 특징을 내뱉을 뿐인 게 분명했다.
지크 브레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전부 잘 알고 있네요. 그 정보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러분이 아는 정보와 연관이 있을 만한 정보가 발견되면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자도록 하죠. 내일 일찍 일어나 슈트올로 가봐야 할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지크 브레이브의 일행은 불침번인 거한을 남겨놓고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지크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 * *
번쩍!
지크는 눈을 떴다. 상체를 세워 주변을 둘러봤다. 단정히 정리된 넓은 방의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배정된 멘티스 성의 방 중 하나였다. 잠들기 전의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지크는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봤다. 아직 어둠이 가시진 않았지만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 빛이 슬금슬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털썩!
지크는 다시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꿈…이라면 좋겠다만.’
하지만 이미 지크는 자신의 꿈이 한낱 개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꿈이 개꿈이라면 침을 한 번 탁 뱉고 ‘악몽 같은 브레이브 같으니!’라며 욕 한 번 박아주면 끝나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지금의 꿈이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 중 하나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마왕이라.’
지크는 꿈에서 나타난 마왕이란 존재를 떠올려봤다.
‘일단 브레이브의 동료들이 말한 정보를 생각하면 내가 아는 마왕은 아니야.’
능력은 그나마 마도의 마왕과 가깝지만 그는 여성이 아니고 미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너무 짚이는 사람이 있어서 문제였다.
이중영창과 무영창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무영창으로 마법을 사용해도 훌륭한 위력이 나오며 정식 영창을 하면 엄청난 마법을 쏠 수 있는 뛰어난 마법사.
게다가 여성에 루벨라조차 능가하는 미인이라는 조건까지.
‘딱 라일라잖아.’
라일라라는 인물을 보고 평가한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다.
‘만약 정말로 라일라가 내가 브레이브 시절의 마왕이라면….’
지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혹시 그 녀석이 날 속인 건가?’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라일라의 행동은 지식만 있는 촌뜨기 그 자체였다. 게다가 실력도 마왕이라 불릴 정도도 아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면 그녀도 지크처럼 충분히 마왕이라 불릴 실력에 도달할 건 확실했다.
‘아니면 마왕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잃은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당연히 속 시원히 밝혀진 건 없었다.
‘꿈이 개꿈일 수도 있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더 라일라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좋겠어.’
그러나 만약 그 녀석이 정말로 마왕이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봤다.
‘그 녀석이 마왕인가.’
어떻게든 자신을 마왕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런 녀석이 마왕이라니.
‘일단 한스와 스녹은 당연히 적대하겠지.’
그리고 녀석들은 아마 지크 자신이 마왕이 됐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척이나 가슴 아파할 것이다.
‘나하고도…아마 좋은 사이로는 지내지 못할 거다.’
지크가 지금까지처럼 착한 일을 우선한다면 당연히 라일라와는 충돌할 것이다. 착한 일을 하는 지크 자신과 마왕은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일 테니까.
‘내가 다시 마왕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회귀 전에도 다른 마왕과 사이좋게 지내본 적은 없다. 오히려 종종 충돌했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마왕이 된 라일라와도 사이좋게 지내기보다는 충돌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나저러나 싸움밖에 없겠군.’
지크는 창문 너머에 시선을 뒀다.
‘…이거 확실히 놀랍군.’
지크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보듬었다.
‘씁쓸함. 이건 분명 씁쓸함이야.’
라일라와의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감정이 들다니.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달라서 그런가.’
자신이 마왕이란 길을 선택한다면 라일라, 한스, 스녹과 적대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결정이다.
하지만 만약 라일라가 마왕이 된다면, 지크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녀와 적대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마도 이 감정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지크는 피식 웃었다.
‘그저 그렌 제너드 때문에 착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만, 확실히 나도 꽤 변한 모양이야.’
지금의 자신은 적어도 회귀 전 지크 모어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였다.
지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 좋아.’
창가로 걸어갔다. 산등성이 너머의 빛이 강해지고 본격적인 태양의 일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진짜 미래든 아니든 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 내가 알고 본 그 미래들로 가는 건 불가능할 거야.’
이미 너무나 많은 과거가 변했다. 아마 지크나 라일라가 마왕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절대 그때와 똑같은 미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될지, 라일라가 어떻게 될지, 한스, 스녹 그리고 그렌 제너드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미래를 아는 건 힘의 마왕 지크 모어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해.’
그 끝이 영광이든 파멸이든, 지크 자신이 선택한 것이란 게 중요했다.
‘감정에 휘둘리든 감정을 쳐내든, 용사의 길을 걷든 마왕의 길을 걷든, 지금의 동료들과 적대하든 계속 동료로 남든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서로의 선택과 선택이 맞물려 미래가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자. 라일라에게 어느 정도 관심은 갖되 그 이상은 필요 없어.’
다만 적절한 정보는 찾아야 할 것이다. 걱정을 하지 않는 것과 아예 손 놓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어느새 태양은 산등성이를 넘어 자신의 찬란한 몸체를 대지 구석구석 흩뿌리고 있었다.
지크는 잠시 그 태양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끼익!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방 안에는 가재도구들과 창에서 날아 들어온 밝은 햇빛만이 남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