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위선자라니….”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철석같이 용사라고 생각한 그렌 제너드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라일라로서도 상상하지 못 한 것이다.
“잠깐! 설마 그때 그렌 제너드의 다른 미래가 생각나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도!”
“그렌 제너드의 위선적인 가면이 벗겨진 미래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야.”
라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크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미래에 전 세계가 위선자에게 속았다는 게 된다.
“내 생각이 맞다면 마인들을 잔뜩 만들어 세계의 혼란을 만든 놈이 그렌 제너드일 거다. 그런 놈이 한 말을 내가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라일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뭐 그것까지는 괜찮아. 너는 안 괜찮겠지만 나야 세계를 속인 위선자 한 놈 더 나온다고 해서 열을 낼 필요는 없지. 나는 세계를 휘저은 마왕이 될 인물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놈이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지크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라일라는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솟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을 멋대로 가지고 논 놈을 용서할 정도로 나는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니야.”
라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지크는 적어도 원한으로 움직인 적은 별로 없어.’
듬성듬성 구멍이 난 기억으로도 힘의 마왕 지크 모어는 그런 인물이었다.
물론 마왕이라 불렸을 만큼 피와 살육을 뿌리고 다녔고 성격도 개차반인 만큼 손속도 잔인했다. 그리고 사람 엿 먹이는 걸 좋아하는 만큼 적에게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 모어는 기본적으로 힘만을 갈구했던 인물이다. 그의 악행도 기본적으로 힘을 추구하며 다른 인물이나 세력과 충돌했을 때 일어났다.
사소한 시시비비를 위해 움직일 때도 있었지만 그건 잠깐의 외유일 뿐, 지크의 기본적인 행동 양식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런데 만약 지크가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 봐도 지크 모어 때보다 나쁜 상상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지크가 원한을 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원한 있는 자만 콕 집어 복수를 하려고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정말로 빨리 다른 이유를 찾아내야겠어!’
라일라는 더 다급해졌다.
* * *
그곳은 섬이었다. 먼 옛날, 화산 분출로 바다에서 돋아난 그 섬은 아직까지 격렬한 화산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섬 중앙에 높이 솟은 산꼭대기의 칼데라에는 새빨간 용암이 넘실거렸다.
화산 활동이 격해질 때 용암은 하늘 높이 자신의 존재를 흩뿌리기도 했다. 그런 때는 하늘로 분출한 화산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런 가혹한 환경의 섬인지라 생명의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섬을 얇게 뒤덮고 있는 풀들과 하늘을 날고 있는 바다새들뿐이었다.
육지와 거리가 멀고 식수조차 없는 데다가 지형도 거칠어 뱃사람들조차 잘 들르지 않는 쓸모없는 섬.
하지만 그곳에 사람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화산 중턱에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 입구가 있었다.
자연 동굴인 듯 보이는 그곳은 굴곡 있는 모습으로 비스듬히 내리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절대 사람에게 친화적인 동굴은 아니었다.
상당히 깊은 그 동굴을 따라 쭉 내려가다 보면 놀랍게도 인공적인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통로는 반듯해지고 계단까지 만들어졌다.
그 상태로 더 들어가다 보면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하게 됐다.
마치 무언가 고약한 음모를 꾸미는 비밀결사의 은거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문 너머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벽과 바닥에 놓인 많은 횃불과 촛불만이 공간을 밝히는 그럼 공간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아마도 지크가 이곳을 봤다면 희희낙락했을 것이다. 드디어 로브를 뒤집어 쓴 놈들의 아지트 하나를 찾아냈다며 윈두르를 여기저기 휘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로브를 입은 자들에게 다행히도 지크는 여기 없었다.
공간에는 로브를 입은 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의 지휘를 하는 자로 추정되는 사내도 있었다.
그는 마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변은 왕의 거처라고 생각될 정도로 화려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왕좌 같은 의자는 주변과의 밸런스를 흐트러뜨려 오히려 천박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그건 사내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원인은 찾았나?”
사내가 불쾌하게 말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대답은 없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사내의 목소리에 실린 불쾌감이 한층 더 깊어졌고 그와 함께 로브를 입은 자들의 고개도 더욱 내려갔다.
사내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질책은 없었다. 싸늘한 눈동자가 로브를 입은 자들을 훑었다.
“…어떻게든 코어를 찾아라. 그 여자의 기억에 뭔가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넷!-
로브를 입은 자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쏜살같이 그 공간을 나갔다. 심기가 불편한 윗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건 그들도 다른 이들과 같았다.
부하들이 사라지자 사내는 몸을 의자에 늘어뜨렸다.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로 되는 일이 없군.’
손가락으로 머리를 누르며 고민하는 것도 잠시. 그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있는 공간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공간이었다. 기둥 하나 없어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그 공간의 상태였다.
절대로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은 아니었다. 벽과 바닥은 세삼하게 깎아낸 듯 반듯했고 곳곳에 여러 가지의 용도 모를 장치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 벽, 천장을 가리지 않고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공간 한쪽으로 걸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어떤 장치 앞에서였다.
사람 한 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원통처럼 생긴 그것은 투명한 둥근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쪽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 투명한 벽은 금 가고 깨져 있었다.
마치 안에 갇혀 있던 무언가가 탈출한 것처럼.
그 원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내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탈출한 코어도 문제지만 지금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완벽하게 반듯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공간답지 않게 한쪽의 벽이 마치 무너진 것처럼 뻥 뚫려 있었다. 사내는 벽의 구멍을 지나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경이로운 곳이었다.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용암이 사나운 빛을 뿌린다. 그것들은 바닥에 모여 커다란 용암의 호수를 만들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열기만으로도 그 용암이 얼마나 짙은 뜨거움을 품고 있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용암으로 이루어진 호수가 아니었다.
호수 중앙에는 커다란 섬 하나가 있었다. 용암의 호수는 마치 그 섬을 호위하듯 또는 포위하듯 흐르고 있었다.
그 섬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는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갈색의 표면에 녹색의 잎사귀도 달려 있었다.
용암이 흐르는 지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특별한 나무이긴 했지만 일단 생김새는 다른 일반적인 나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컸다. 엄청나게. 놀라울 정도로.
사내가 있는 곳에서 용암 호수가 있는 곳까지는 과장 좀 보태서 커다란 산의 바닥과 꼭대기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용암 호수가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그 나무의 가지는 놀랍게도 사내가 있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의 모습은 어색하게 보이기도 했다. 몸통 위로 뻗어 있는 가지들이 규칙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베어낸 것처럼 몇 군데가 커다랗게 비어 있었다.
사내는 그 나무를 쳐다봤다. 마치 나무의 의도를 캐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무는 표정도 몸짓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존재할 뿐.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건은 얼마 전에 일어났다. 이곳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그저 오롯이 존재하기만 했던 나무가 갑자기 진동했다. 그 진동이 얼마나 컸는지 당장이라도 섬에 있는 화산이 폭발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나무의 격렬한 진동이 우습게도 바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깥에 있던 부하는 그 진동을 느끼지 못 했다고 했다.
처음 일어난 나무의 진동에 놀랐지만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진동은 또 한 번 일어났다.
사내는 부하들에게 원인을 조사하라 했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부하들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시스템의 정확한 원리와 구조를 그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사용하고 있을 뿐.
사내는 부서진 원통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다 한숨 쉬고 나무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나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윈두르.”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는 나무다. 조사는 좀 해봤지만 알아낸 건 없다. 혹시 잘못 건드렸다가 시스템이 망가질까 봐 세세하게 조사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 나무가 시스템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때문에 나무의 이상 현상에 사내는 히스테릭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무를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나 때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 * *
지크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는 동안 지크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각몽이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을 보는 순간 지크는 학을 떼었다. 당장 이 꿈에서 나가고 싶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자신의 일행을 보며 선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자신이었다.
‘아니, 내가 아니지.’
지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맞지만 자신이 아니다.
꿈에 나온 자는 바로 지크 브레이브. 라일라가 말하길, 지크의 용사의 미래라 불린 놈이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 빌어먹을 꿈은 깨어나기도 쉽지 않았다. 팔을 흔들고 고함을 지르고 발길질도 했지만 꿈은 여전히 계속됐다.
결국 지크는 팔짱을 끼고는 뚱한 표정을 지은 채 꿈의 진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크 브레이브는 여전히 착했다. 지크는 브레이브의 행동을 보고 오한이 일었다. 몸을 떨며 침을 탁 뱉었다.
‘빌어먹을 놈. 선인 행세는.’
남이 선인 행세를 하건 말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지크였지만 브레이브는 달랐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닭살 돋는 말을 줄줄이 내뱉는 놈을 보고 그렌 제너드보다 더한 살의에 시달렸다.
윈두르로 저 놈의 목을 날려버리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일행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사소한 잡담이었다.
하지만 레오나가 어떤 새에게 쪽지를 전해받은 후에 분위기는 일변됐다.
“뭐냐? 뭔 말이 쓰여 있는데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마법사 노인이 물었다. 평소에 티격태격하지만 둘 다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하지 않았다. 레오나의 얼굴이 굳어지자 걱정이 든 것이다.
“…마왕이 다시 움직였대.”
레오나의 말에 다른 이들의 얼굴도 굳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