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식사를 끝내고 지크와 라일라는 로만느를 따라갔다. 그녀는 둘을 데리고 1층,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까지 안내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었는데 여기는 원래 막혀있던 곳이었습니까?”
지크가 대충 돌바닥을 들어낸 것 같은 지하의 입구를 보며 물었다.
“맞아요. 흔적도 없이 막아버렸었죠. 이곳을 철저하게 없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러려면 일단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게 가장 좋죠. 실제로 다른 일족은 이 지하에 대해서 잊어버렸어요. 가장 잊어버려야 할 놈들이 잊지 않아서 문제였죠.”
르누에 대한 기억이 났는지 그녀가 불쾌하게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철의 일족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상의 중이에요. 왕과 장로들 그리고 주력 병력까지 모두 잃어 완전히 무력화됐다지만 아직 일족은 많이 남았거든요.”
“처리하기 곤란하겠군요.”
“그렇죠. 지금처럼 사이좋은 이웃으로 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부 죽여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지만 의외로 로만느는 그것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들놈이 다른 왕들이랑 알아서 잘 처리하겠죠. 그러라고 왕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이상, 그녀에게 정치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무녀라는 그녀의 직책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셋은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예전에 왔을 때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지키고 있는 자들이 철의 일족이 아닌 연합군이라는 차이뿐이었다.
불의 나무가 있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현재로선 둘뿐.
그중 하나인 르누의 열쇠는 불 타 사라졌다. 가라앉는 르누의 시체에서 지크는 그 모습을 확인했었다.
자연히 남은 열쇠는 지크의 윈두르뿐이었다.
로만느는 품에서 호수의 눈물을 꺼냈다. 여전히 신비롭게 생긴 보석이었다.
그녀는 그걸 들고 지하 중앙으로 걸어갔다. 언제 갖다 놨는지 그 곳에는 돌로 만들어진 제단 하나가 놓여 있었다.
로만느가 살짝 눈을 찌푸린 게 보였다. 지크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필 장소가 장소로군.’
제단이 있는 곳은 르누가 그녀의 피를 빼내기 위한 잔혹한 제단을 설치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로만느는 자기 개인감정 때문에 일을 꺼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라일라를 자기 옆으로 불렀다.
“여기에 호수의 눈물을 둘 건가요?”
“맞아요.”
라일라가 제단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제단에는 여러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눈이 문양을 이루는 선을 쭉 따라갔다.
“기본적으로 호수의 눈물의 마력을 퍼뜨리는 구조네요. 그런데 이거 뭐죠? 꽤나 특이한 문양이네요.”
“아, 인간에게는 좀 생소한 문양일 거예요. 우리 엘프들이 주로 사용하는 진이거든요. 능력이 뭐냐면….”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지크는 신경을 끊었다. 고위 마법사들이 하는 의견교환은 많은 경험을 쌓아 온 지크로서도 알아먹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불의 나무가 있는 방을 막고 있는 벽 쪽으로 움직였다. 벽에는 열쇠를 꽂을 수 있는 큰 균열이 그대로 있었다.
“무녀님.”
“왜 그러시나요?”
라일라와 함께 활발하게 의견 교환을 하던 로만느가 지크를 쳐다봤다.
“이 문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성을 철의 일족이 점거하고 있을 때는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었지만 지금 이곳은 연합군의 점령하였다. 함부로 문을 열 순 없었다.
“괜찮아요. 안 그래도 지크 씨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었거든요.”
“호수의 눈물의 힘이 불의 나무를 실제로 억제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군요.”
“지크 씨 같은 분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성격이 지랄 같아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제가 누군가 밑으로 들어간다면 비위는 기가 막히게 맞출 자신이 있습니다.”
로만느는 지크의 말이 웃겼는지 소리내어 웃었다. 그에 비해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크가 다른 사람의 밑에 들어간다니. 머릿속에서 한번 상상을 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열겠습니다.”
지크가 윈두르를 균열에 꽂아 넣었다.
철컥!
벽 너머로 무언가 딱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지크는 윈두르를 회전시켰다. 곧 벽을 이루고 있는 벽돌들이 뒤로 빠지며 불의 나무가 나타났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나무야.”
어느새 지크의 옆까지 다가온 라일라가 불의 나무를 쳐다봤다.
불의 나무는 여전했다. 나뭇잎 대신 달고 있는 불꽃의 잎이 하늘거리고 나무의 몸통 근처로는 커다란 불꽃들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로만느도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이 벽을 열 수 있는 건 이제는 지크 씨뿐이니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도 없죠.”
“다른 열쇠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 지크도 르누가 벽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상당히 놀랐다.
“그렇죠. 그리고 그 열쇠의 주인이 르누 같은 헛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죠. 철의 일족이 그렇게 대대로 지배욕을 버리지 못한 이유가 이 나무의 힘 때문이니까요.”
로만느는 상당히 씁쓸해했다. 아무리 다른 일족들을 전부 지배하겠답시고 전쟁을 일으킨 르누와 철의 일족이지만 지금껏 그들은 분명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지크도 불의 나무를 쳐다봤다.
‘결국 그놈이 왜 로브 놈들을 배신하고 자기 일족만으로 전쟁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게 됐군.’
로브를 뒤집어쓰고 놈과 다닐 때에도 ‘네가 무슨 이유로 배신을 했든 배신의 대가는 치르게 할 것이며, 지금만 손을 잡는 거다’라는 태도를 일관했기에 물어보지 못했다.
‘회귀 전에는 이 나무에 대한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아마 로브 놈들의 협력에 의해 전쟁을 이긴 거겠지. 즉, 놈들은 이 나무를 사용하지 않았어.’
불의 나무가 있는 장소, 그 장소에 도달하는 방법 그리고 나무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전부 알고 있던 게 철의 일족이었다. 그게 회귀 전이라고 해서 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회귀 전과 회귀 후가 다른 이유가.’
하지만 르누는 죽었고 불의 나무는 시치미를 떼듯 불만 조용히 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크는 이번엔 자신의 검, 윈두르를 떠올렸다.
신화 속 고대 제국을 지탱했다는 나무의 이름을 딴 검. 이름을 붙였을 때 대단한 생각을 한 건 아니다.
그저 검 자체가 특별해보이고 생긴 것도 나뭇가지를 닮은 개성 있는 생김새이니 어울리겠다 싶어 붙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여러 경험을 겪은 후 지크의 생각도 조금 변했다.
‘고대 제국과 나무.’
클로원이란 고대 제국을 알았고 그 제국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유적에 벌써 특별한 나무를 두 그루나 만났다.
‘정말로 뭔가 인연이 있는 이름일 수도 있겠어.’
지크는 들고 있는 윈두르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 * *
라일라가 로만느를 도와 호수의 눈물을 설치하는 건 성공적으로 끝났다.
성 안으로 호수의 눈물의 마력이 가득차자 불의 나무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모양새가 눈으로 보였다. 로만느는 정말로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벽이 닫히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불의 나무를 지크 일행은 조용히 바라봤다.
그걸로 지크와 라일라가 할 일은 끝이었다. 로만느와 짧은 담소를 나눈 다음 그들은 다시 도서관에 처박혔다.
밤늦도록 탁본과 비슷한 글자의 책을 찾아보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지크 일행에게 배정된 숙소는 성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에서 가장 공훈을 많이 세운 사람들인 터라 좋은 숙소를 배정해준 것이다.
배정받은 방에서 이불을 툭툭 정리하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지크는 방 밖에서 들리는 노크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 와.”
들어온 사람은 라일라였다. 지크는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설마 이 야밤에 날 유혹하려고? 난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다만.”
“헛소리 하지 말고 여기 앉아 봐.”
라일라는 방에 있는 탁자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켰다. 지크는 순순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듣고 싶은 게 있어.”
“뭘 말이냐?”
“네가 갑자기 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변한 이유.”
“흐음.”
지크가 팔짱을 끼고 라일라를 쳐다봤다.
“솔직히 네가 이미 답을 내렸다면 그 이유가 뭐든 이미 상관없다고 해서 물어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네가 마왕이 되지 않을 이유를 찾을 거라면 그 이유도 들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네.”
“네가 마왕이 됐을 때를 생각해 봐. 그리고 그에 따라 얼마만한 피해가 나왔는지도. 솔직히 나는 이 이유를 찾는 일이 세계를 구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진정한 영웅은 내 앞에 계신 아가씨셨군.”
지크가 웃었다.
“말해 줄 수 있어?”
지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특히 너라면 더더욱.”
“나라면?”
“너도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으니까.”
“…미래에 관련된 이야기야?”
“그래.”
라일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라일라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이유 같았다.
“내가 아는 미래의 기억이 마왕의 기억인 건 알지?”
아직 지크는 라일라에게 자신이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알아. 아마도 네 성격이 지크 모어와 비슷한 쪽으로 쏠린 건 그 기억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 기억의 마지막은 내가 그렌 제너드에게 죽는 걸로 끝난다.”
“…그래.”
라일라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왕이 용사에게 토벌되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 이야기를 하는 건 불쾌할 것이 확실하기에 라일라는 조심스럽게 긍정을 했다.
“그때 그렌 제너드는 내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전에 이런 말을 했었어. ‘다음에 태어나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라고 말이야.”
“설마 네가 착한 일을 한다는 이유가…!”
“그 말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서야.”
라일라가 입을 벌렸다. 성격 더러운 지크가, 아무리 방법이 고약하다지만 그래도 어쨌든 착한 일을 하는 게 신기했었다.
한데, 그 이유가 설마 미래에 그렌 제너드가 한 말 때문이라니.
“뭐, 나는 이래봬도 힘의 마왕이었으니까. 아무리 파티를 이뤘다지만 날 쓰러뜨린 용사 파티에게 나름의 경의를 갖고 있었어. 그 때문에 착한 일을 했던 거야. 방법은 나 나름의 방법을 썼지만.”
“그랬구나.”
라일라는 내심 그렌 제너드를 칭찬했다. 상황이야 어쨌든 미래에 그렌 제너드가 할 말은 이렇게 지크의 마왕화를 확실히 저지하고 있었다.
‘과연 용사라고 불릴 만해.’
하지만 라일라는 곧 자신의 평가를 완벽하게 부정해야했다.
“그런데 그 그렌 제너드가 의심스럽단 말이지.”
“의심스러워?”
지크는 자신의 추측을 라일라에게 말했다.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라일라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찼다.
“자, 잠깐! 그런 네 말은…!”
“맞아.”
지크는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렌 제너드. 그놈은 우리가 아는 용사가 아니라 위선자, 그것도 상상 이상의 쓰레기일 가능성이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