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20화 (220/628)

제220화

사락!

종이가 한 장 넘어간다. 너덜너덜한,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은 상태가 그 책이 겪어 온 세월을 말해줬다.

섣부르게 강한 충격을 줬다가는 당장이라도 잘게 부스러져 오랜 기간 품어온 수많은 글자들을 훼손시킬 것 같았다. 때문에 종이를 넘기는 손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곳은 은은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햇빛이 직접적으로 닿지 못하는 곳이라 대낮에도 인공적인 조명이 필요한 곳. 기다란 책상 위에 놓인 촛불 여러 개가 부족한 광원을 채웠다.

턱!

책이 덮였다. 약간의 먼지가 휘날린다. 책을 읽던 자가 손으로 먼지를 휘저어 흩어냈다.

그리고 표지를 한 번 스윽 훑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낡은 가죽 표지의 거친 표면이 느껴졌다.

“뭔가 좀 찾아낸 게 있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던 자,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지크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왔어?”

“새벽부터 여기에 처박혀 있다고 해서 와봤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봐 그놈의 호기심은 못 말리겠군.”

“네가 할 말이야?”

분명 그녀가 꼭두새벽부터 이 도서관에 들어와 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이른 시간이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친 덴 괜찮아?”

지크는 저번 전투에서 꽤 심한 부상을 입었었다. 목숨이 위험하거나 후유증이 남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부상도 아니었다.

“멀쩡해. 포션을 그렇게 들이부었는데 낫지 않았다면 카르위먼에 책임지라고 쳐들어갔겠지.”

“너라면 정말로 할 것 같아서 무서워.”

상품에 트집을 잡고 상점을 겁박하는 건달 짓을, 지크는 그 카르위먼을 상대로 태연하게 저지를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다, 농담. 진짜로 그렇게 하진 않아. 그놈들 상대로 객기를 부릴 생각은 없어.”

적어도 타스니아 평원의 킬링 머신과 성녀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과 대적하기 싫었다.

지크의 반 농담 반 진심인 너스레에 라일라는 쿡쿡 웃었다.

“그런데 설마 불의 거인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네가 상처를 입고 올 줄은 몰랐어. 정말 놀랐다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르누 그놈이 낸 상처는 절대로 아니야.”

지크가 부상을 입은 이유는 본인의 마력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가감은 했다지만 오랜만에 마음 놓고 휘두를 수 있는 힘에 취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거대한 마력의 흐름은 거대한 폭력이 되어 적을 유린했지만 자신의 주인에게도 이빨을 들이댔다.

“그래도 짜릿하긴 했어. 마력을 한껏 동원할 때마다 핏줄 하나하나가 터져나가는 기분이었으니까. 결과도 그랬고.”

“설마 했는데 너 마조히스트 같은 면도 있었어?”

라일라가 깬다는 표정으로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 지크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큼 내 본래의 마력을 다루는 게 좋았다는 거다. 나는 괴롭힘 당하고 기뻐하는 취향은 없어. 남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하긴….”

설득력이 넘치는 지크의 말에 라일라는 두말없이 긍정하며 다시 의자를 앞으로 잡아끌었다.

“뭔가 찾은 건 있어?”

지크가 라일라의 앞에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없어. 아직은.”

“아직은이라….”

지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뭔가를 찾을 때가 오긴 오는 거냐?”

지크가 그렇게 말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멘티스에 있는 도서관, 칼프날이었다.

그들이 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 중 하나. 라일라의 기억, 고대 제국, 윈두르 등 그들이 찾고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

이미 출입 허락은 받았다. 아드로원 대수림의 큰 은인인 지크의 별로 어렵지도 않은 부탁을 거절할 왕들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지크 일행은 한동안 굳어있어야 했다.

솔직히 예상은 했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그 긴 수명을 가진 엘프들이 정말로 오랫동안 모아온 서적이니 그 양은 장난 아닐 터.

‘그런데 이건 상상을 초월한단 말이지.’

칼프날에 들어와 직접 본 장서를 보고 그들은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예상은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다고.

보통 도서관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벽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책장과 그 안에 촘촘히 꽂혀 있는 책들이다.

하지만 칼프날은 달랐다. 드로니안이 말한 ‘선조들이 가져온 책을 모아둔 것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과장도 뭣도 없는 사실이었다.

분류는커녕 책장에 꽂혀있지도 않다. 그저 규칙성 없이 되는대로 쌓인 책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간신히 사람들이 다닐 길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천장까지 쌓인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문제는 이런 공간이 지하로 네 개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즉, 지크 일행은 다섯 개의 층에 마구잡이로 쌓인 책 중에서 원하는 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중에 그들이 원하는 책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방법을 찾아 봐야지.”

라일라도 별 다른 대책은 없었다. 그저 지금은 대책을 세울 때까지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훑어볼 생각이었다.

확인한 책을 치우고 옆에 쌓아 놨던 새로운 책을 꺼낸다. 그리고 펼쳤다.

지크가 책을 들여다봤다. 그는 모르는 글자였다.

“글자는 아는 거야?”

“아니, 내 지식도 모든 걸 알진 못해. 우리가 찾는 건 아마도 고대 제국과 연관이 있을 테니까, 이거랑 비슷한 걸 찾고 있을 뿐이야.”

라일라가 마법 상자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그건 비올루윈의 무덤에서 뜬 탁본이었다.

“이것도 아냐.”

라일라가 그 책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다른 책을 꺼냈다.

그녀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압도적인 장서의 양에 그녀도 상당히 기가 질린 듯했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잖아? 뭔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크가 책 한 권을 꺼내들며 말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래도 여기서 영원히 있을 순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지루해할 거 아냐.”

“날 생각해주는 거야? 이것 참, 막 감동 받을라 그러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크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물론 그 소매에는 눈물의 흔적은커녕 조그만 얼룩조차 없었다.

“네가 양보해주고 있으니까.”

“응?”

라일라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임시라도 마왕이 되지 말라는 내 의견을 따라주고 있잖아. 그러면 이제 내가 너한테 맞춰줘야지.”

설마 라일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니, 좀 놀라서 말이야.”

“놀랄 게 있어?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고 있으니까 나도 너한테 뭔가 이득이 될 만한 걸 줘야 균형이 맞지.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그, 뭐냐….”

라일라가 조금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네 그, 괴상한 취미 있잖아. 그것에 대해서도 도와줄 테니까 앞으로는 사양하지 말고 말해.”

라일라가 껄끄러워하는 지크의 취미라면 하나밖에 떠오르는 게 없다. 지크는 짓궂게 미소 지었다.

“뭐야. 너도 이제 나처럼 다른 놈들 괴롭히려고? 좋아, 네가 관심이 생겼다면 내가 모른 체할 수 없지. 어떻게 하면 놈들이 싫어하는 걸 알아내는지부터 알려….”

“나는 관심 없어, 멍청아!”

라일라는 읽고 있던 책을 던지려다가 움찔했다.

자기 것도 아닌 데다가 안 그래도 낡디낡은 책이다. 함부로 던졌다가 훼손될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조심스레 책을 내려놨다.

그리고 낄낄대는 지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 * *

지크와 라일라가 칼프날에서 나온 것은 점심 즈음이었다. 계속 책을 찾으려는 라일라를 지크가 점심을 먹자고 억지로 끌어낸 것이다.

중천에 뜬 태양 아래 멘티스의 모습은 활발했다. 많은 숫자의 병사들이 섬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원래 전장의 수습은 그런 법이다. 어제까지 같이 싸우던 동료가 끔찍한 몰골의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군다.

뭐가 그렇게 원통한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는 동료의 눈을 살아 있는 자가 감겨준다. 그런 모습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지크와 라일라는 조용히 걸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성. 여기서는 밥 먹기가 좀 그렇잖아.”

“어라? 네가 그런 감성적인 면도 있었어?”

“굳이 감성적이지 않아도 상식적인 일 아니냐.”

“…네 입에서 상식이란 말이 나오다니.”

라일라가 입을 틀어막고 떨리는 눈으로 지크를 쳐다본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불의 거인을 봤을 때보다 더 놀라고 있는 것도 같았다.

지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번엔 간간이 있는 라일라의 승리였다.

“한스랑 스녹은?”

“수습을 돕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역시 착한 아이들이야.”

“미래의 용사라면 그 정도 마음가짐은 갖춰야지.”

“참고로 너라면?”

“남이 다 알아서 할 텐데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하냐.”

역시 지크는 지크였다.

둘은 성에 도착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둘을 보고 문을 열었다.

이미 엘프들 중 그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지크를 보는 눈에는 경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만큼 지크가 불의 거인을 쓰러뜨리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성에 들어가 그들은 가벼운 식사를 했다.

지금 연합군의 지휘부로 기능하고 있는 성이었지만 평원의 일족의 왕을 비롯한 지휘부는 전쟁의 뒷수습을 위해 성 밖에 있는 터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중요 인원이 바깥으로 나간 건 아니었다.

“아, 여기 있었네요.”

빵을 깨물어먹던 지크와 수프를 뜨던 라일라가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거기엔 호수의 일족의 무녀인 로만느가 있었다.

“저도 같이 먹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지크가 일어나 로만느의 의자를 빼줬다. 그녀는 지크에게 감사를 표하고 주방에 음식을 주문했다.

“칼프날은 괜찮았나요?”

그녀의 질문에 지크와 라일라가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로만느는 이해한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도 거기서 특정한 정보를 찾는다는 건 거의 포기한 상태이니까 이해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의 수습을 어느 정도 하고 나면 도와줄 이들을 보내드릴 게요.”

“아, 감사드려요.”

겸양을 위해 거절할 여유도 없다. 절실하게 인력이 필요했던 터라 라일라는 그녀의 친절을 감사히 받았다.

“별 말씀을요.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을 도와준 분들이신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런데 라일라 씨. 혹시 도움을 좀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도움이요?”

“이번에 호수의 눈물을 다시 멘티스로 옮기기로 했어요.”

“불의 나무 때문이군요.”

지크의 말에 로만느는 긍정했다.

“맞아요. 평원의 일족의 왕이 정식으로 제안을 했어요. 호수의 눈물을 멘티스로 옮겨 혹시나 모를 불의 나무의 폭주를 억제하자고요.”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평원의 일족의 왕은 불의 나무의 존재를 극도로 위험시했다.

때문에 다른 일족의 왕들에게 제안을 했고, 다른 일족의 왕들도 받아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