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불꽃을 바라봤다. 그건 철의 일족이고 연합군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불꽃이 다시 한 걸음을 뗀다.
쿠웅!
불에 질량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거인이 걷는 듯 불꽃이 걸음을 내딛을 때 땅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불꽃은 꼭 플레임 트루퍼를 닮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몸체와 사지, 그리고 어깨 위로 툭 튀어 나온 머리 같은 부위까지.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엄청난 덩치였다.
말 그대로 성 하나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건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라고 주장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불의 거인.”
가까이 있는 엘프 한 명이 중얼거린다. 주변 엘프들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도 말을 한 엘프와 똑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르누 언 트 드라스의 발악이라고?”
로만느의 억양이 무척이나 딱딱하다.
극도의 긴장이 그녀를 옭아맸다. 압박을 받고 있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만느는 특히나 더 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호수의 눈물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여전히 멘티스 대다수에 자신의 존재감을 뿌리고 있는 호수의 눈물의 마력은 불의 거인에게 접근하는 순간 흔적조차 남지 않고 불타버렸다.
‘물의 마력을 태워버리다니.’
그 가공할 힘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위기감이 솟았다. 저게 르누의 발악이라면 결코 연합군에게 좋은 일일 리 없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끌어낸 힘인 듯 보이니 오래 가진 않을 겁니다만.”
“저런 녀석은 단시간이라도 위험해!”
단시간이 뭔가. 한순간이라도 극히 위협적인 놈이었다.
화르륵!
불의 거인의 얼굴에서 변화가 일었다. 타오르는 불의 표면을 뚫고 무언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르누 언 트 드라스.”
로만느의 중얼거림이 그것의 정체를 알렸다.
“아직 안 죽었군.”
심각한 로만느와는 다르게 지크의 태도는 덤덤했다. 답답한 로만느가 불의 거인의 위험성을 강조하려 할 때였다.
지크와 르누의 눈이 마주쳤다.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지크는 르누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르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르누가 히죽 웃었다.
[너…으…어…어…!]
언어기관이 불타버린 것인지 아니면 언어 구사 능력이 떨어진 것인지 르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환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목소리만으로도 전해졌다.
후웅!
불의 거인이 팔을 휘두른다. 거대한 불줄기기 쏘아졌다.
퍼어어엉!
다행히 공격은 멘티스를 멀리 벗어나 호수로 떨어졌다. 아직 제대로 몸을 지배하지 못하는지 비틀거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을 비웃지 않았다.
크게 출렁이는 파문과 솟아나는 수증기. 직격당한 호수가 한순간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불꽃의 위력은 엄청났다.
[으…아…아…!]
분이 난 것인지 르누가 괴상한 비명을 질러댄다.
르누가 다시 한번 팔을 휘둘렀다. 다행히 이번에도 빗나갔다. 불꽃은 호수 너머 숲속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저 멀리서 불꽃이 솟구친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불꽃이 하늘을 가르고 파편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오, 오오오오!”
“왕이시여!”
말을 잃은 연합군과는 다르게 철의 일족은 환희했다. 패배를 눈앞까지 두고 그들의 왕이 갑자기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나타났으니 기쁨에 빠질 만했다.
그들은 마치 부모에게 달려가듯 불의 거인 발치에 몰려들었다.
“왕이시여! 어서 저 발칙한 것들을 쓸어주소서!”
“우리의 일족에게 승리를! 우리의 왕에게 영광을!”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한 마디를 했다.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이르는 철없는 꼬맹이들 같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이 전부 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지금 상황을 고작해야 그런 사소한 상황과 비교하다니. 그저 지크 일행만이 담담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좋아라 불의 거인에게 달려간 철의 일족이었지만, 그들의 운명은 별로 좋지 않았다.
스윽!
다시 한 걸음을 걸으려는 듯 불의 거인이 다시 발을 들었다.
철의 일족이 환호성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불이 거인이 연합군을 짓밟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짓밟은 건 연합군이 아니었다.
“어, 어! 와, 왕이시여! 여기가 아닙니다!”
“여기엔 저희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곳을 딛… 으, 으아아아악!”
콰아앙!
설마 자신들을 짓밟을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발이 너무 빨리 다가온 것도 있었다. 불의 거인에게 짓밟힌 철의 일족의 엘프들이 짓이겨지고 불에 타 잿더미로 화했다.
“왕이시여! 저희입니다! 전하의 충직한 종입니다!”
착오가 있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켄디스가 목에 마력을 넣고 쩌렁쩌렁 자신들의 정체를 알렸다.
하지만 그들은 르누의 의도를 잘못 짚었다.
[시…끄…러어어어!]
다시 한번 팔을 휘두른다. 이번엔 빗나가지 않았다. 불꽃이 철의 일족을 정확히 직격했다.
콰아아앙!
철의 일족의 엘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폭발의 굉음 속에서도 그들의 끔찍한 비명소리는 제대로 들렸다.
“끄아아악!”
지금껏 일족과 왕에 대한 충성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철의 일족을 용감하게 지휘하던 켄디스가 불에 휩쓸렸다.
불을 꺼뜨리려 바닥을 마구 구르는 것도 소용없이 그는 고통스럽게 목숨을 잃었다.
폭발에 휘말린 자, 불꽃에 뒤덮인 자 모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다.
처음으로 명중한 공격이 자신들의 부하들을 향한 것이라니.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떻게 상대할 거야?”
라일라가 물었다. 그녀도 불의 거인에게 위협을 느꼈다. 아니, 마도에 정통한 그녀인지라 다른 이들보다도 더 잘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 너희보고 상대하라곤 안 해.”
“그럼 누구랑 같이 싸울 건데?”
“누구도 필요 없어.”
지크가 윈두르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무척이나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혼자면 충분해.”
“뭐? 아무리 너라도 무리야!”
지크의 대단함은 라일라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불의 거인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했다.
그러나 지크는 손을 살랑거릴 뿐, 발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로만느를 향해 말했다.
“군대 물려줘요. 지금부터 일어날 싸움에 휘말려 죽는 건 개죽음일 뿐이니까.”
“정말로 혼자 갈 생각인가요!”
로만느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녀가 보기에 지크의 행동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 아니었다.
스녹은 노웸을 껴안고 지크와 불의 거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라일라와 로만느처럼 말리진 않았다.
지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는 그는 지크에게 어떤 생각이 있다고 여겼다.
다만 불의 거인이란 존재가 워낙에 상식을 파괴하는 존재였기에 조금 불안함이 엿보였다.
그에 비해 한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물리는 게 좋을까요?”
오히려 지크에게 질문까지 했다.
“최대한 멀리. 생각 같아서는 섬을 떠나라고 하고 싶지만, 그 정도의 시간은 없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한스는 지크의 등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일행을 쳐다봤다.
“어서 군을 물리죠.”
“…너 정말 지크가 저 거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것도 단신으로?”
“네.”
한스의 단호한 대답에 라일라는 할 말을 잃었다. 지크에 대한 믿음이 맹목적인 영역까지 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을 줄이야.
하지만 한스가 자신하는 이유는 지크에 대한 믿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성에서 나오신 후에 지크 님이 힘을 쓰는 걸 봤습니다.”
“응?”
“어떻게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지크 님은 평상시와 다릅니다. 아마도 비올루윈에서와 비슷한 상황이신 것 같습니다.”
“비올루윈?”
라일라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설마!”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나요?”
로만느가 물었다.
“네, 있어요.”
만약 정말로 지크가 그때와 같다면.
“정말로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라일라와 똑같이 상황을 파악한 스녹과 노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하지 못 한 로만느는 갑자기 변한 그들의 모습에 당황할 뿐이었다.
* * *
뒤편에서 신호가 울린다. 연합군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철의 일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적, 뒤로는 미쳐버린 것 같은 자신들의 왕이 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합군이 철수하며 공간이 생기자 그들도 슬금슬금 자신들의 왕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왕은 미쳐 있었다.
그렇게 썰물 빠져나가듯 엘프들이 불의 거인에게서 거리를 둘 때, 지크만이 유일하게 그것에 걸어갔다.
[흐…!]
르누가 웃었다. 전보다 훨씬 더 심하고 녹아 엉겨 붙은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이제는 엘프의 얼굴이라고 하기 조차 망설여질 정도였다.
[너…너, 주…죽이…죽인…다!]
“이젠 말도 못할 정도가 됐군.”
엘프를 지배하고는 인간조차 지배하려 한 자 치고는 무척이나 영락한 모습. 하지만 적어도 지금 가진 힘은 가공하다.
[지, 지금…은…나, 가, 강하…!]
불의 거인이 팔을 들었다.
[너…너 보…다…강하, 다!]
후웅!
그대로 휘둘러졌다. 휘몰아치는 불꽃의 압력과 모든 걸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 그것이 뚜렷한 살의를 지니고 지크를 향했다.
지크는 윈두르를 고쳐 쥐었다.
“너는 끝까지 착각만 하는군.”
그리고 지크는 그 착각을 고쳐줄 아주 친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후웅!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불의 거인의 주먹과 윈두르가 맞닿았다.
콰아아앙!
천지를 떨어 울리는 굉음. 다시 한 번 엘프들이 귀를 막았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만은 굉음이 난 곳을 쳐다봤다. 불의 거인이 거대한 주먹을 내리꽂았던 그곳을.
“응?”
“어?”
엘프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귀를 막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잊었다. 눈에 보인 비현실적인 상황에 얼어버렸다.
[…아?]
그건 불의 거인도 마찬가지. 르누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지크를 향해 날린 팔이 있는 곳이다.
없었다. 남은 건 어깨 부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꽃뿐이었다. 그게 마치 피가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다시 지크를 쳐다본다. 주먹에 짓뭉개지고 불타며 비명을 지르고 있어야 할 그가 멀쩡했다. 그러긴 커녕 그의 주변에도 그 어떤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으…으아아아…아아!]
화르륵!
절단면에서 불꽃이 일었다. 순식간에 팔이 재생됐다.
“재생도 가능하군.”
지크는 그 모습을 마치 낙엽 하나가 떨어진다는 태도로 중얼거렸다.
[아아아아!]
후웅!
다시 한번 불의 거인이 주먹을 날렸다. 강맹한 압력. 치명적인 열기.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콰아앙!
다시 한 번 날아간 팔을 보고 르누가 눈을 크게 떴다.
“슬슬 착각을 수정하는 게 어떠냐. 르누 언 트 드라스. 지금도 난 너보다 강해.”
지크는 상냥하게 웃으며 르누에게 말했다.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