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17화 (217/628)

제217화

가만히 있던 르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지크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후웅!

한 걸음 물러난 지크의 앞으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오!’

지크에게 꽤 익숙한 형태의 물건이었다. 마치 나뭇가지 같은 형태의 금속 덩어리. 자신의 검과 무척이 닮은 그걸 보고 지크는 직감했다.

‘저게 저 녀석이 갖고 있던 열쇠로군.’

아마 불의 나무의 불꽃을 물리치고 있는 것도 저것일 거라고 지크는 판단했다.

하지만 지크가 가진 윈두르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윈두르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처음 불의 나무의 불꽃을 제대로 막지 못한 게 그 증거지.’

윈두르가 저 금속 덩어리와 동급의 녀석이었다면 천하의 지크도 르누처럼 붕대를 덕지덕지 감싸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르누가 고개를 들었다. 지크는 비죽이 웃었다. 르누의 눈. 그것은 지크가 무척이나 많이 본 것이다.

원하고 바라던 것들을 모두 잃고 희망조차 잃어 절망에 빠진 눈.

지크가 그다지 좋아하는 눈은 아니다. 모든 희망을 잃은 놈은 그저 숨만 쉬는 인형일 뿐이니까.

‘괴롭히는 재미가 사라지지.’

하지만 다행히도 르누의 눈에는 다른 빛도 비치고 있었다. 새빨갛고 강렬한 증오.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한 자에 대한 보복심.

녀석은 지크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지크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아니, 익숙하다 못 해 정감까지 가는 감정이었다.

굳이 회귀 전까지 갈 필요도 없다. 회귀 후 지금까지 만난 자들 중에도 지크를 저렇게 본 자들은 많지 않던가.

“…할 수 있는 게 끝났냐고 물었나.”

“응.”

한쪽은 서릿발이 잔뜩 돋아난 겨울. 한쪽은 따뜻한 바람이 잔뜩 밴 봄이다. 물론 상황을 보면 봄 쪽이 분명 이상했다.

“네가 어떤 기대를 했는지 모르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

“그래?”

지크는 좀 놀랐다. 조롱하느라 물은 것뿐, 아직 르누의 수가 더 남아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역시 우리 르누 언 트 드라스 님이시네. 토끼 새끼는 보통 도망갈 굴을 여럿 파놓는다지? 겁 많은 존재끼리 참 공통점이 많아서 좋겠어.”

“그런가.”

“이제는 좀 침착하네. 진작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아, 그건 불가능했나?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죽기 직전이 아니면 잘 안 바뀌지. 엘프도 비슷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네 변화를 촉구한 건 나라는 소리로군.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남의 좋은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흐뭇하거든.”

“그래. 그렇게 날 잘 안다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아는가?”

“물론이지.”

어려울 것도 없는 질문이다.

“날 죽이고 싶겠지.”

지금껏 르누의 입장에 섰던 모든 존재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준다, 절망을 준다, 굴욕을 준다,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아무런 관심도 없을 거야.”

지금껏 어떻게 죽여준다며 줄줄이 떠들어댄 것과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를 것이다.

“그냥, 그저, 다만, 내 숨통이 끊어지는 걸 보고 싶을 거야. 그렇지?”

“흐….”

르누가 흐릿하게 웃었다. 거기엔 지금까지 지크가 본 철의 일족의 왕 르누 언 트 드라스는 없었다.

그저 지크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르누’만이 있을 뿐.

“그러니까 그 마지막 남은 시도, 한번 해 봐. 혹시 알아? 그 시도가 멋지게 성공할지.”

푹!

섬뜩한 파육음이 들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위 틈에 흘러드는 빗물마냥 떨어졌다.

꿰뚫린 것은 르누의 복부. 하지만 지크가 공격한 건 아니었다. 르누의 복부를 꿰뚫고 있는 것은 르누가 들고 있던 그 열쇠.

르누의 복부를 찌른 건 르누 자신이었다.

분명 이상사태다. 그러나 지크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가 된 건 아니지?”

“쿨럭! 크…크큭…! 걱정 마…라…. 그런 건 아…니니까.”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르누는 웃었다. 광기에 휩싸여 더 이상 자신의 고통과 상처도 방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목숨이나 영혼을 제물로 바쳐서 힘을 얻는 건가?”

“…눈치챘…나?”

“궁지에 몰린 시궁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거든. 능력이 없으니 제 목숨이라도 깎아야지. 능력 없는 놈들은 참 사는 게 힘들겠어. 동정하마.”

“그럴 필요…없다…. 더 이상 네…놈은 동정이란 걸… 할 순….”

콰드득!

복부를 꿰뚫은 열쇠를 비틀어 더욱 깊숙하게 박아 넣는다.

“없을 테니까!”

콰아아아아아!

불의 나무에서 불이 떨어져 내렸다. 윈두르를 믿고 내려오는 불덩이를 보던 지크가 흠칫 하고 물러났다.

콰아앙!

불덩이가 지크가 있던 자리를 때렸다. 지크는 자신의 옷자락 끝을 매만졌다. 새까맣게 탄 부분이 바스락 무너져 내렸다.

‘윈두르가 통하지 않는군.’

지크는 조금 더 거리를 뒀다. 그에 비해 르누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귀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지크를 새파랗게 노려봤다.

콰아앙!

르누에게도 불꽃이 떨어졌다. 윈두르조차 보호해주지 못하는 불꽃을 그의 열쇠가 보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붕대가 순식간에 타들어가고 흉측한 몸이 드러났다. 불에 타는 고통은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르누는 웃었다. 광소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광기어린 웃음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그의 몸을 둘러싸는 불꽃이 더욱 커져갔다. 주변 공간의 열기가 급속도로 올라가 마치 찜통처럼 변했다.

르누가 지크를 봤다. 그 때 그는, 지크가 지금껏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순수하고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죽어.”

콰아아아아앙!

성내가 불꽃에 잠겼다.

* * *

멘티스의 전투는 완전히 기울어있었다. 안 그래도 기울어가던 전장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더 이상 기습을 받는 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지휘부가 멘티스의 상륙을 다시 이어가자 승부는 급속도로 연합군에게 쏠렸다.

멘티스 곳곳에 시체가 널렸지만 그 수는 철의 일족의 것이 훨씬 많았다. 한 번은 연합군을 물러나게 했던 플레임 트루퍼도 이제는 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승리한다. 연합군이 그 생각을 떠올릴 때, 사건은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 소리는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병사들이 본능적으로 귀를 막고 땅에 엎드리게 할 정도로 컸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적아를 가리지 않고 병사들이 폭음의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이유를 찾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멘티스의 성이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 불의 나무의 힘에 의해 불을 내뿜은 전적이 있는 성이었지만 이번 건 차원이 달랐다.

성은 물론이거니와 성벽마저 커다란 불이 뒤덮었다. 마치 성을 원료로 삼아 불꽃이 타오르는 형국이다.

움직이던 플레임 트루퍼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호수의 눈물의 마력 속에서도 꿋꿋이 연합군을 괴롭히던 그것들이 사라지는 건, 분명 연합군에게 이득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성을 삼킨 불꽃과 플레임 트루퍼의 소실이 뭔가 연관되어 있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퍼엉!

불꽃을 뚫고 무언가가 성에서 나왔다. 재빠르게 이동한 그것은 순식간에 연합군의 진영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그것에 무기를 향하는 연합군이었지만 그걸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적이 아닙니다.”

무기를 든 엘프의 팔을 내리누르며 한스가 말했다. 그리고 다가온 이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지크 님.”

어깨에 남은 불똥을 툭툭 털어내며 지크가 손을 들었다.

“전투는 잘된 모양이군.”

“지크님 덕분에 멘티스는 거의 제압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한스는 불타오르는 성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건 뭡니까?”

“철의 일족의 왕이 마지막으로 불사르는 자기 목숨이다.”

한스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엘프들도 놀라 그 불꽃을 쳐다봤다. 특히 철의 일족의 엘프들은 기겁을 했다.

지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섬기는 왕이, 적어도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럼 끝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지크는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꽤 확신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타오르는 장엄한 불꽃을 보며 감상에 잠기기에 적절한 시간은 더욱 아니었다.

“네놈이 전하를!”

가까이 있던 철의 일족의 병사가 달려들었다. 나름 르누에게 충성이 강한 엘프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객기였다. 그리고 그 객기에 대한 보답은 자신도 모르게 두 동강난 신체였다.

촤아악!

피와 장기를 흩뿌리며 엘프‘였던’ 몸체가 바닥에 흩뿌려진다.

“하여간 주제파악 못하는 것들은….”

지크가 혀를 찼다. 지크에게 달려들려던 다른 철의 일족의 병사들이 움찔했다. 고작 일격으로 지크가 아득히 격상의 상대인 걸 인식한 것이다.

그걸로 지크에게 덤벼들 기회는 끝났다. 다시 연합군이 철의 일족에게 무기를 휘둘렀고 전투는 재개됐다.

하지만 지크는 전투에 끼지 않았다. 조용히 성의 불길을 쳐다봤다.

“…지크 님, 방금 그건….”

한스가 안색이 변해 물었다.

“잠깐 사용하게 된 거다. 그 클로원의 힘이란 게 꽤 재미있는 물건인 모양이야.”

“예전 비올루윈 때와 같은 상황입니까?”

“맞아.”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점이 전부 해소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지크가 하는 일이 아니던가. 더 이상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지크!”

얼마 후, 라일라가 스녹과 함께 다가왔다. 로만느도 끼어있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다시피.”

지크는 두 팔을 벌려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옷자락이 가볍게 탄 자국이 있을 뿐, 지크의 몸은 건강 그 자체였다.

“저건 어떻게 된 거죠?”

로만느가 성을 보며 물었다. 지크는 이번에도 한스에게 한 것과 똑같은 답을 해줬다.

“르누 언 트 드라스가 마지막 목숨을 태우는 불꽃입니다.”

“…철의 일족의 왕이요?”

“목숨을 건 비장의 수라는 거죠. 몰릴 대로 몰렸을 때 나온 발악 같은 겁니다.”

“…당신은 정말로 대단하군요.”

로만느의 목소리엔 일종의 경의라고까지 표현될 감정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의 일족이 촉발한 이 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것은, 그녀의 손녀가 데려 온 이 이방인이었으니까.

“칭찬은 나중에 듣도록 하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끝나지 않았다뇨? 저 불꽃이 철의 일족의 왕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면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가요?”

왕이 죽고 전투에서 패배한 이상, 철의 일족의 몰락은 막을 수 없다. 아니면 혹시 끝까지 방심하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지크의 말은 비유도 뭣도 아니었다.

“저 불은 르누 언 트 드라스의 마지막 발악이 맞지만, 결코 끝난 게 아닐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녀석의 발악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겁니다.”

“그게 무슨….”

콰아앙!

로만느의 질문이 새로운 폭발음에 끊겼다. 그러나 그녀는 억울해 할 필요가 없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의 불꽃이 대신 해주고 있었으니까.

불꽃이 거세게 확장했다. 마치 하늘 끝까지 솟으려는 듯 몸을 불리며 사방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멘티스에 있는 사람들은 곧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쿠웅!

거대한 불꽃이 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