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그 의식 말이야. 대단한 거지?”
지크의 뜬금없는 질문. 거기에 르누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 의식이야말로 철의 일족을 위대하게 만들어줄 자랑거리가 아니던가.
“당연하지! 우리의 선조들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서 만들어낸 의식이다! 왜, 이제야 겁이 나더냐! 이미 늦었다! 네놈은 내가 말한 대로 갈기갈기 찢어서…!”
“아, 됐어.”
지크는 르누의 말을 끊었다.
그의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었다. 당연히 다시 한번 벌게진 그의 얼굴을 수습해 줄 이유도 없었다.
“확실히 대단한 의식이긴 해. 그건 인정하지.”
불의 나무의 마력은 정말로 거대했다. 그건 불의 나무가 있는 방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불의 나무를 제어할 수 있다니. 범상치 않은 의식임은 분명했다.
‘정말로 철의 일족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비밀리에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었겠지.’
수명이 길고 마법이 특기인 엘프가 대를 이어 만든 의식이라니. 그 완성도는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잖아?”
“…우리 선조님께서 만든 의식까지 능멸할 셈이냐!”
르누가 다시 분을 토해냈지만 그것까지 지크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능멸할 생각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할 뿐.
“아무리 대단한 의식이라도 너희들과 그 나무의 힘의 차이가 너무 크잖아.”
불의 나무에 비하면 아무리 대단한 엘프의 장로들이 모였다 해도 개미 새끼 몇 마리가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아니, 차라리 그쪽이 더 힘의 차이가 작을 것이다.
“그걸 메꾸려면 의식이 더럽게 정교할 수밖에 없지.”
그 때문에 지크도 의식에 대해 인정을 한 것이다. 실험도 대상도 없이 대대로 만든 복잡하고 정교한 의식이 멀쩡히 작동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태생적으로 그런 의식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지크는 윈두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지크가 하는 짓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르누는 불안감을 느꼈다.
‘저 검은….’
놀랍게도 불의 나무의 방을 열어젖힌 검. 지금까지야 전투라는 급박한 상황이라 눈이 제대로 가지 않았지만, 지크가 대놓고 들어 올리자 다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교한 의식은 불의 나무가 이상을 일으키면 너무도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지. 안 그래?”
아무리 의식이 정교해도 아무리 엘프 장로들이 대단해도 불의 나무의 힘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의식으로나마 간신히 제어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힘이 목적 없이 존재하는 힘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해결 방법은 간단하지. 그 힘에 너희들이 계산한 그 이상으로 변형을 주면 되는 거야.”
분명 지크의 말은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저 일리만 있는 말. 때문에 르누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그래. 그럼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 그 불의 나무의 힘에 대한 변형을 말이다.”
르누는 조소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큭큭큭!”
지크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 정말로 참을 수가 없네.’
자신만만한 얼굴이 굴욕과 증오로 일그러지는 모습은, 지크의 음습하고도 저열한 취미를 아주 직격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자신을 적대하는 적이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 지크는 진실로 환한 기쁨을 느꼈다.
라일라와의 약속으로 마왕이 되는 일은 당분간 없겠지만, 그렇다고 취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예전에 특이한 나무를 하나 본 적 있어.”
그래서 이렇게 혓바닥을 나불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상대가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지 알아야 더 즐길 수 있으니까.
“내가 그 나무에 다가가니 갑자기 이 녀석과 공명을 하지 뭐야.”
지크가 불의 나무를 쳐다봤다.
“이 나무도 무척이나 특이해서 혹시 그 나무와 비슷한 류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 그러면 이 녀석도 내 검과 공명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아?”
로만느에게 들은 다섯 그루의 특별한 나무. 아마도 자신이 공동묘지에서 본 것과 멘티스에 있는 이 나무가 그 다섯 그루 중 두 그루가 아닐까 지크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검이 내 생각을 긍정했단 말이야.”
지크가 검을 들고 세 걸음 쯤 다가왔을 때였다.
“그때, 너희들의 의식은 어떻게 될까?”
우웅!
윈두르가 몸을 떨었고.
화르르르륵!
불의 나무가 급격하게 불을 내뿜었다.
“뭐, 뭐야!”
거칠고 무겁긴 해도 지금까지는 의식의 마력을 잘 따라왔던 불꽃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자유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바깥세상을 추구하는 야생마라도 된 듯, 불꽃은 의식의 통제를 벗어났다.
“버텨! 어떻게든 버텨라!”
르누가 급히 말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장로들도 자신들의 마력을 한계치까지 쏟아냈다.
아니, 이미 한계는 와 있었다. 지금 내는 마력은 말 그대로 생명과 바꿔서 내는 그런 것이었다.
불꽃의 위력이 잠시 약해졌다. 통제에 따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곧 다시 거친 불꽃이 고개를 들었다.
“크으으으으으!”
장로들이 신음을 흘린다. 전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몇 명은 코피까지 흘렸다.
날뛰는 불꽃과 그걸 억제하려는 자들의 싸움.
르누와 장로는 생명까지 걸고 이 싸움에 임하고 있었지만 여기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도 있었다.
“오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지크는 화려하게 날뛰는 불꽃들을 보며 재미있어 했다.
그는 터벅터벅 르누와 장로들에게 걸어갔다.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선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르누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견딜 만해?”
“…….”
르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여유는커녕 난동부리는 불꽃을 억제하는 것만도 벅찼다.
눈까지 감고 집중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니 그들을 보호할 불꽃이 여전히 존재하는 걸 믿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불행한 점은 귀는 눈처럼 감각을 차단할 방법도 없는데다가 엘프인 그는 청각조차 무척 예민하다는 것이었다.
“야, 야. 무시하지 말고. 지금 상황이 어때? 뭔가 날뛰는 소 위에 앉아 버티는 뭐 그런 느낌이야?”
“…….”
“네가 해보라고 해서 해봤는데. 역시 끝내주지? 그런 금이 간 유리병 같은 의식 따위 힘의 근원을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붕괴되잖아. 공든 모래성이 무너진 거 같다고 할까? 그걸 수백, 수천 년 간 만든 머저리들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 미안. 네 선조들의 이야기였지? 미안해,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어. 믿어줄 거지? 너랑 나 사이 아니냐.”
“…….”
“이야, 그래도 꽤 잘 버티네? 근성이 애들 재채기에도 날아가는 민들레 같은 놈이라서 조금 쯤 하다가 포기할 줄 알았는데.”
“…….”
“그래. 그 정도까지 노력을 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응, 나도 노력파는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는 저능아들이 벌레처럼 꿈틀대는 걸 보면 나도 인생의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달까?”
“…….”
“아, 대체 삶이란 무엇일까! 헛된 야망을 품다가 이 길 저 길 다 막히고 노친네들과 같이 기도밖에 하지 못하는 그런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 가는 인간은 대체 무슨 의미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그놈이 태어나든 말든 이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
“좋아, 잘한다! 내가 응원할게. 힘내라, 힘! 힘내라, 힘!”
“…….”
“어, 어, 야! 조금만 더 집중해! 너한테서 두 번째로 옆에 있는 늙은이 숨넘어가려고 한다! 너희 일족의 소중한 장로잖아! 죽게 놔두면 안 되지! 숫자는 내가 충분히 줄여 줬잖아! 이제 그렇게 부담이 되지도 않을 텐데. 나머지는 네가 열심히 부양해야 할 거 아냐!”
으드득!
정신을 집중하는 르누의 입가에서 얇은 핏줄기가 흘렀다. 이를 너무 악 물어 잇몸이 무너진 것이다.
옆에 있던 장로들의 안색도 분노와 수치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신이 흔들린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불꽃 한 줄기의 통제가 완전히 엇나갔다.
퍼어엉!
“끄아아아아악!”
정말로 재수 없게도 그 불꽃은 의식을 하고 있던 장로 한 명을 그대로 덮쳤다.
그나마 불꽃의 위력은 아직 약한 채였지만, 장로에게는 오히려 그게 더 불운이었다.
그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산 채로 타죽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그나마 단말마의 비명이라도 남길 수 있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그게 붕괴의 서곡이었다. 한 명이 빠져서 본격적으로 힘이 밀린 것인지, 아니면 동료의 죽음에 더욱 동요해서 그런 것인지 의식의 힘이 확실히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억지로 폭주시켜진 불의 나무다. 윈두르에 의한 공명에 맞춰 불의 나무는 정말로 포악하게 주변에 불꽃을 뿜어냈다.
그건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공포스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사방에서 날뛰는 불꽃이 방 안을 이리저리 유영한다.
“크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불꽃에 휩싸인 장로들이 비참하게 비명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촤악!
옆에 있던 또 다른 장로가 의식을 중단하고 불이 붙은 자들에게 물의 마법을 뿌려 봤지만 그럼에도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을 사용한 장로조차 불꽃에 휩싸였다.
바깥에서 작게 비명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불의 나무의 불꽃이 성의 다른 곳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불꽃도 지크의 곁으로는 오지 못했다.
지크는 윈두르를 쳐다봤다.
“너 정말로 쓸 만하네.”
역시 토르니움 대신 이 녀석을 선택한 건 정답이었다.
불꽃을 반사해 윈두르가 옅은 붉은색으로 빛난다. 그 모습이 마치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 같았다.
“이노오오옴!”
이미 의식이고 나발이고는 물 건너 간 것. 어떻게든 이 사태의 원흉인 지크만이라도 죽이겠다는 듯 장로 둘이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몸에 붙은 불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지크를 죽이겠다는 살의 하나만으로 달려드는 모습은 무척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필사의 각오도 지크에게는 달려드는 파리 새끼와 다를 바 없었다.
후웅!
깨끗한 일섬. 그 하나만으로 장로들의 허리가 깨끗하게 양분됐다.
털썩! 털썩!
지크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그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콰아앙!
시체 위로 불덩이가 떨어졌다. 안 그래도 불타고 있던 그들의 시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갔다.
그 둘로 끝이었다. 이 음습한 지하에 처박혀 그들의 일족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의식을 치르던 모든 장로들의 목숨이 사라졌다.
남은 건 윈두르를 들고 있는 지크. 그리고 불의 나무의 밑동에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는 르누였다.
불꽃은 르누의 곁도 피해가고 있었다. 지크는 예전 자신이 처음 이 방의 문을 열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불꽃도 나름 저놈을 피해가긴 했지.’
물론 완전히 피해가진 않아 전신에 화상을 입긴 했지만, 당시 터져 나온 불꽃에 삼켜진 자들은 전부 불에 타 죽었다.
그걸 생각하면 르누도 어떤 방식이든 불꽃을 피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지크는 르누의 앞으로 걸어갔다. 르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대충 끝났어?”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우에게 하는 것처럼, 지크는 상냥하게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