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최고 장로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새하얀 수염이 붉게 물든다. 그의 눈이 당혹스럽게 흔들리다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커…억….”
그게 최고 장로가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그의 몸이 축 늘어진다. 가슴을 꿰뚫고 있는 검 때문에 쓰러지지도 못 하는 게 더욱 처참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 이노오오옴!”
장로 중 한 명이 쩌렁쩌렁 고함을 내지른다. 현실 같지 않은 상황에 넋을 놓고 있던 다른 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을 로브를 입은 자에게 향하고 마법을 발동한다.
과연 철의 일족 중에도 장로의 칭호를 받은 자들인지 그 와중에도 그들이 쏘아낸 마법들은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하여 그 위력을 높였다.
그에 로브를 입은 자가 선택한 행동은 간단했다.
최고 장로의 시체를 마법에 집어 던지는 것이었다.
콰아앙!
최고 장로의 시체에 마법이 작렬했다. 그의 몸이 터져 나가며 사방에 온갖 파편들을 쏟아냈다.
어느 정도 잔인한 상황에 내성이 있다 해도 얼굴이 시퍼레질 정도의 잔혹한 광경.
그러나 로브를 입은 자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브에 피와 살점이 뿌려지든 말든 마법이 소멸된 그 틈을 노려 움직였다.
“이 자식이…!”
순식간에 근처로 다가온 로브를 입은 자에게 장로가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무기도 들지 않은데다가 나이 때문에 신체 능력도 떨어진 장로의 주먹은 애처로울 정도로 약했다.
촤악!
주먹과 함께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났다. 불의 나무의 밑동에 피가 확 뿌려졌다.
로브를 입은 자는 다음 사냥감을 찾아 움직였다. 옆에 있던 장로 한 명이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는 게 보인다. 그의 검이 잔혹하게 장로를 쫓았다.
서걱!
장로의 목에 붉은색 선이 아로 새겨졌다. 그 선은 급격하게 확장됐고, 급기야 머리와 몸이 떨어져 내렸다.
“모여라! 일단 한곳에 모여!”
“전하를 지켜라! 전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래도 지금까지 쌓은 경험치가 어디 가지 않아 그들은 불의 나무를 등에 대고 로브를 입은 자를 경계했다.
그 사이 로브를 입은 자는 세 명의 장로를 더 죽였다. 그러나 그도 더 이상 섣부르게 움직일 수는 없는지 자리에 멈춰 섰다.
아까처럼 무영창으로 급하게 쏘아낸 마법이 아닌, 본격적인 마법을 장로들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로급 엘프의 마법,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었다.
“이, 이 빌어먹을 개잡놈이!”
대치 상태가 되자 르누가 로브를 입은 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를 짓씹고 상대를 노려 봤다.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난도질하고 싶다는 감정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로브를 입은 자의 손에 최고 장로를 비롯해 여러 장로가 죽었다.
물론 르누에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도구다. 도구의 파괴에 안타까움을 느낄지언정 슬퍼하는 감정을 갖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도구가 그에게 막대한 힘을 주게 만들 도구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임시라도 동맹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도 뼈아팠다.
그를 믿어서가 아니다. 뒤통수를 치더라도 르누 자신이 쳤어야 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건 그만큼 멍청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르누가 아니던가.
이 상황은 르누 자신의 멍청함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배신을 하다니! 대체 무슨 목적이냐!”
르누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자신들을 연합군에게 넘기고 목숨을 부지하려 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일까.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게 네놈의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네 놈도 네놈의 조직도 원하는 걸 얻진 못할 거다! 절대로!”
정말로 목 놓아 저주를 퍼부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맞은 배신은 르누의 증오를 한계까지 치솟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열이 받을 일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킥!”
여태껏 침묵한 채 검만 휘두르던 로브를 입은 자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킥킥킥!”
낮게 흘리는 비웃음. 오히려 대놓고 하는 웃음보다 더욱 르누의 신경을 긁어대는 웃음소리였다.
그런 르누의 심정을 안 것일까. 로브를 입은 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하, 하하하하하하!”
배를 잡고 껄껄대던 그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조직?”
웃음기 남은 음성이 퍼진다. 르누가 인상을 찡그렸다.
로브를 입은 자의 목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은 거친 음성이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음성은 그가 여태껏 듣던 음성이 아니었다.
깔끔하면서도 듣기 거북하지 않은 평범한 목소리.
“네가 말하는 조직은 어떤 조직이지? 음침하게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뒤에서 음모를 일삼는, 뭐 그런 조직이냐?”
“무슨 말을….”
로브를 입은 자의 배신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한 르누지만 적어도 지금 그가 내뱉는 말은 르누가 예상한 말이 아니었다.
“바퀴벌레처럼 사람들 눈을 피해 이리저리 먹을 걸 찾아다니는 놈들. 그리 생각해보면 너와는 참 죽이 잘 맞는 놈들이었을 거야”
“너, 설마…!”
그제야 르누도 감을 잡기 시작했다. 조직이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과 협력한 놈은 조직의 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더럽고 음습한 바퀴벌레조차 잡아먹고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동하는 너는 뭐랄까 음, 그보다 조금 더 아래의 무언가 같았어. 이걸 뭐라고 비유해야 할까? 곱등이? 구더기?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나라도 너 같은 놈과 비유되는 걸 찾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걸.”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았다. 붕대 속 화상이 다시 아파오는 걸 느끼며 르누가 더듬더듬 말했다.
“너… 너…!”
촤악!
로브를 입은 자가 들고 있던 평범한 장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나무가 가지를 뻗듯 여러 개의 날이 돋아난다.
그 형태의 검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건 이 불의 나무가 있는 방을 봉쇄하고 있던 문을 연 기괴한 형태의 검이었다.
“너어어어어어!”
르누가 절규하듯 고함쳤다. 로브를 입은 자, 지크는 로브를 화려하게 벗어던졌다.
“이야, 반가워, 르누 언 트 드라스. 우리 구면이지?”
절규하는 르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다른 장로들과는 다른, 정말로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지크가 말했다.
“예전에 잠시 본 이 방이 너무 기억에 남아서 말이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다른 사람 흉내를 내봤어. 당연히 용서해줄 거지? 방금 전까지 같이 연합군과 싸운 동지잖아?”
지크가 평소처럼 쾌활하게 말한다. 당연히 내용은 어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지만.
조롱을 들은 장로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들의 왕이 모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르누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하지만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마음이 안정되어서 그런 게 아닌 건 확실했다.
“…언제부터냐.”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질문. 하지만 지크는 쉽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대답했다.
“네가 아는 조직의 인간은, 아마 네가 죽였을 놈이 끝일 거야. 그 이후에 만난 건 전부 나지.”
“설마 배신을 확인하러 왔던 놈도…!”
“조직 놈들이 너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았거든. 그걸 확인할 겸, 네 녀석에 대한 정보도 파악할 겸 변장해서 너를 떠 본 거지. 이야, 생각대로 내가 원하던 정보를 술술 불어줘서 정말로 고마웠어. 아, 그러고 보니 그 감사를 표하지 않았네.”
지크가 무언가를 던졌다. 르누와 장로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그러나 그건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돈, 그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낮은 것이었다.
“이걸로 나중에 맛있는 거나 사 먹어. 이런 음습한 곳에 처박혀서 이상한 짓이나 하지 말고.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고 성격이 비뚤어진 거야. 이건 정말로 내 본심에서 우러나와 하는 충고니까 곡해해서 듣지 말고.”
르누와 장로들의 시선이 바닥에 구르는 돈에 꽂혔다. 그들도 그게 어떤 가치를 가진 돈인지는 알고 있었다.
“인간 세상의 돈이 그렇게 신기해? 너희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인간 세상에도 나가보고 그래야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지. 그게 안 되니까 엘프를 지배하느니 인간을 지배하느니 같은, 그런 같잖은 말을 하는 거야. 인간은 물론 엘프도 자기 자신의 분수를 파악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이봐.”
지크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르누가 주변 장로들에게 말했다.
지금껏 듣기 싫은 소리로 꽥꽥대기만 한 르누라고는 믿을 수 없는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
그만큼 르누가 분노에 차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의식을 진행해서 불의 나무를 폭주시킨다.”
“전하, 그것은…!”
반대 의견을 내려던 장로가 뒷말을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르누의 눈을 본 탓이다.
성격 더러운 르누였지만, 정말로 저런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은 처음 봤다.
“이 근방이 통째로 날아가도 상관없다. 이제 더 이상 뒷일 따위는 신경쓰지 않겠어.”
르누가 지크를 똑바로 노려봤다. 역전의 용사조차도 뒷걸음질 칠 만한 시선을, 지크는 태연하게 받아냈다. 오히려 그 증오가 감미로운지 히죽히죽 웃으며 도발까지 해댔다.
“일단 저놈을 죽여 버린다!”
장로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지, 르누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고민된 것이다.
그들의 왕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증오와 분노에 먹혀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결국은 그들의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걸 택했다.
물론 단순히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하에서 의식에만 치중하느라 지상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결코 그들에게 이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족의 운명을 걸고 마지막 도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쿠우우웅!
장로들의 마력이 불의 나무를 건드린다. 순식간에 그들의 주위에 화염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후웅!
마력이 날카롭게 뻗어 장로들의 몸을 노렸다.
콰앙!
하지만 마력의 칼날은 목적을 이루지 못 했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지크의 마력을 소멸시킨 것이다.
“멍청한 놈!”
르누가 지크를 비웃었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적의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줄 알았느냐!”
드디어 지크에게 한 방을 먹였다는 기쁨일까. 르누가 오랜만에 통쾌하게 외쳤다.
“보통 의식과 지금의 의식은 다르다! 폭주하는 불의 나무의 마력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보호하지! 네놈의 하찮은 실력 따위는 지금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지크가 이번엔 수 개의 칼날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그것들도 불꽃에 막혀 사라졌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봐라! 그래봤자 네놈의 무능에 절망만 할 테니! 네놈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의식이 실패하는 것뿐이다. 단, 우리의 의식이 성공한다면 그때야말로 네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 주마! 특히 네놈은 곱게 죽이지 않는다! 정말로 처절하게 갖고 놀다가 죽여주겠어!”
“아, 그래?”
르누의 저주에도 지크는 시큰둥했다.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모습이 너무나 여유로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