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철의 일족, 정확히는 르누의 용인 속에 갑옷들은 대부분이 멘티스에 상륙했다.
그 와중에도 로만느는 계속 멘티스의 중심부로 움직였다. 이미 호수의 눈물의 영향력은 멘티스의 대부분을 뒤덮었다.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은 성 주변과 연합군이 상륙한 곳의 반대편 호숫가 정도뿐이었다.
“슬슬 때로군.”
로브를 입은 자가 르누를 쳐다봤다.
“병력의 배치는?”
“전부 끝냈다.”
“그래. 그럼 시작할까.”
로브를 입은 자가 다시 피리를 꺼내 불었다.
“잠시 후에 공격이 시작될 거다. 너희 일족도 그에 맞춰 공격을 시작해라.”
“그러지.”
르누는 다시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하가 탑 아래로 뛰어 내려간 후, 철의 일족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르누와 로브를 입은 자는 조용히 멘티스를 내려다 봤다.
잠시 후.
“시작됐군.”
로브를 입은 자의 말처럼 호수 건너편 연합군의 진영이 부산스러워졌다.
짙은 수해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연합군의 본진이었지만 무언가 사건이 일어난 건 명백했다.
멘티스로 넘어가기 위해 새로 배를 출발시키려던 움직임이 멈췄다.
“지금이다. 르누 언 트 드라스.”
“좋다!”
르누가 신호를 보냈다. 성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광폭한 마력이 퍼진다. 멘티스를 뒤덮고 있던 호수의 눈물의 마력이 흔들렸다.
스으윽.
호수의 눈물의 영향력 안에서 덩치도 힘도 작아졌던 플레임 트루퍼들이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덩치는 원래대로 돌아갔고 기운 없던 불꽃의 일렁임도 다시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당장이라도 주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그런 모습.
“공격해라!”
켄디스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르누와 로브를 입은 자가 있는 첨탑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껏 물러나기만 하던 철의 일족의 병력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콰앙!
두 무리가 부딪쳤다. 처음은 거의 비등하게 싸운 두 무리였지만 조금씩 철의 일족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순수 병력의 숫자는 연합군 쪽이 약간 많았지만 제 힘을 되찾은 플레임 트루퍼들이 가세하자 숫자가 역전된 것이다.
“좋아!”
르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전황이 예상대로 흘러갔다.
본진 후방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에 연합군은 더 이상 멘티스에 병력을 투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멘티스에 있는 연합군은 플레임 트루퍼의 활약에 고전하고 있었다.
“계속 밀어붙여! 그대로 무녀와 호수의 눈물을 확보하는 거다!”
르누가 기세 좋게 말했다. 그 때, 연합군 쪽에 변화가 있었다.
“골렘들이 움직이는군.”
로브를 입은 자의 말대로 무녀의 곁에 찰싹 붙어 있던 갑옷들이 전투가 벌어지는 지점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르누가 코웃음 쳤다.
“전황이 불리하니 저 녀석들이라도 동원을 해야겠지.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골렘의 성능이란 뻔하니까.”
오히려 무녀의 호위가 줄어드는 결과가 되니 무녀를 죽이는 것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전투 지점에 접근한 골렘들이 철의 일족과 플레임 트루퍼에게 달려들었다. 르누는 비웃음을 지으며 그 장면을 지켜봤다.
퍼엉! 퍼엉!
“크악!”
“아악!”
하지만 골렘들에 의해 플레임 트루퍼가 소멸하고 철의 일족이 죽어나가자 그의 비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야!”
허둥지둥 첨탑 난간 부분에 손을 짚고 르누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로브를 입은 자도 갑옷들의 높은 성능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저것들이 그 성능 좋은 골렘인가? 그런데 네 말처럼 소수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철의 일족과 부딪치는 골렘들은 모두 준수한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로브를 입은 자가 싸늘하게 물어 온다. 하지만 르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고 받은 골렘들은 절대로 저런 성능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답답한지 골렘들이 갑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정체를 알게 된 르누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골렘이라고 생각한 자들은 모두 엘프들이었다.
“저, 저, 저 녀석들은….”
“이것 참.”
입을 다물지 못 하는 르누와는 다르게 로브를 입은 자는 냉정하게 내뱉었다.
“속았군.”
“소, 속았다니….”
“빤히 보이지 않나, 르누 언 트 드라스. 우리가 골렘을 우습게 볼 걸 알고 연합군 놈들이 갑옷을 입은 후 골렘 흉내를 낸 거다. 그다지 전력이 되지 않는 골렘의 상륙을 우리가 강하게 막지 않을 걸 예측한 거지.”
“그, 그럼…!”
“우리가 골렘이라 생각한 놈들은 전부 골렘으로 위장한 연합군이라고 봐야 한다.”
로브를 입은 자의 말처럼 멘티스 여기저기서 갑옷을 벗어던지는 엘프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철의 일족의 병사들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즉, 상대 병력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거다. 어쩌면 부활한 플레임 트루퍼로도 막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르누가 급히 전황을 살폈다. 갑자기 불어난 적의 병력에 당황한 것도 있어 철의 일족의 병사들은 연합군에게 밀리는 감이 보였다.
“아, 아무리 적의 병력이 늘어났다고 해도 플레임 트루퍼가 있는데 어찌…!”
“이번에도 호수의 눈물 때문인 것 같군.”
“뭐?”
“아무리 플레임 트루퍼가 제 힘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물의 마법에 약하다는 건 변함없지 않나. 그런데 호수의 눈물은 물의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지.”
연합군이 쏜 거대한 물줄기에 플레임 트루퍼 세 체가 동시에 터져나가는 것을 본 르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계획처럼 우리의 병력이 더 많았다면 의미 없는 일이 됐겠지만 지금은 연합군의 숫자가 더 많아.”
그리고 로브를 입은 자는 르누를 만나서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완벽하게 놀아났군.”
“…이, 이자식이…!”
갑자기 르누가 로브를 입은 자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손이 로브를 입은 자의 멱살을 틀어잡으려 했지만 로브를 입은 자는 가볍게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무슨 짓이냐.”
“네 놈 때문이야! 네놈이 저 갑옷들을 상륙시키자는 말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로브를 입은 자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헛소리 하지 마라, 르누 언 트 드라스. 저 갑옷을 그저 골렘이라고 나에게 알려준 자는 너다. 성능은 떨어지는, 머릿수만 채우는 놈들이라는 수식어는 덤이었지. 게다가 내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렸나? 지금 멘티스에서 방어전을 치르는 철의 일족의 명령권은 너에게 있을 텐데.”
르누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로브를 입은 자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로브를 입은 자의 말은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
“그럼 네 부하들에게 명령해라! 당장 우리를 도우라고!”
“정말로 그러고 싶다만, 내 부하들은 연합군 본진과 교전중이다. 또 모르지. 멘티스의 어느 분께서 내 부하들의 상륙을 허가했다면 지금 쯤 네 부하들과 같이 연합군을 막고 있었을지도.”
로브를 입은 자와 르누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누가 봐도 일촉즉발의 상황. 뒤에서 대기하던 철의 일족의 병사 몇 명이 슬그머니 자신의 무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걱정하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르누가 등을 돌리고 첨탑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지?”
“네가 알 바 아니다!”
르누가 거칠게 소리쳤다. 하지만 로브를 입은 자는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르누의 뒤로 따라붙었다.
“자꾸 잊고 있는 모양이지만 너와 나는 동맹 관계다. 네가 승리해야 나도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지.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면 일단 내게 말해라. 그래야 내가 네 승리를 위해 움직일 수 있다.”
“…….”
무언으로 로브를 입은 자를 노려보던 르누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다시 첨탑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로브를 입은 자를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를 제지하려는 병사들을 막았다.
‘이런 상황이 된 만큼 이 녀석의 손이라도 빌려야 해.’
정말로 본의가 아니었지만 지금 로브를 입은 자의 손을 뿌리치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지하로 갈 거다.”
르누가 입을 열었다.
“지하? 불의 나무가 있는 곳 말인가?”
“그래. 그곳에서 출력을 올릴 수 있는지 장로들을 닦달해 볼 생각이다.”
“그렇군. 플레임 트루퍼의 성능이 올라간다면 이 상황도 타개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짜봐야지.”
거기서 르누가 로브를 입은 자를 돌아봤다.
“네 마력도 같이 동원해줘야겠다.”
“어쩐지 지금까지는 접근도 하지 못 하게 한 불의 나무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것 같더라니. 하지만 좋다. 지금은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겠지.”
르누와 로브를 입은 자는 순식간에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여전히 불의 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지하부터 성의 저층은 불의 나무로부터 뿜어진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통로는 존재했다.
둘은 불의 나무의 밑동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곳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력을 자아내고 있는 철의 일족의 장로들이 보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전하.”
다른 장로들을 이끌고 있는 철의 일족의 최고 장로가 르누를 공손하게 맞았다. 흘러내리는 땀과 파리한 안색이 결코 정상적인 몸 상태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르누는 그의 건강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불의 나무의 힘을 더 끌어내라.”
그저 그렇게 명령할 뿐이었다.
최고 장로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전하,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불의 나무의 힘을 간신히 컨트롤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여기서 조금이라도 의식이 잘못됐다간 이 일대가 전부 불의 나무의 힘에 잡아먹힐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간청에도 르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전쟁에서 지면 우리 일족의 미래는 없다! 그럴 바엔 자멸하는 위험을 안더라도 힘을 더욱 끌어내야 해!”
“하오나…!”
“명령이다, 최고 장로!”
최고 장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르누가 절대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이번 의식은 나와 저기 있는 자도 참여를 할 거다. 성공률도 높아지고 자네들의 부담감도 그리 늘어나지 않을 게야.”
아무리 르누라도 일족의 최고 장로를 윽박지른 것에 조금 부담을 느꼈는지 말투를 조금 부드럽게 바꿨다.
“전하라면 충분히 의식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만, 저자가 의식에 참여할 마력을 갖고 있을까요.”
최고 장로가 로브를 입은 자를 미덥지 못 하게 쳐다봤다.
의식의 한계 이상을 짜내는 일이다. 정도 이상의 마력량은 필수였다.
“썩어도 우리를 도와주던 정체불명의 조직의 지휘관이다. 마력은 충분히 갖고 있겠지.”
“마력량이 문제라면 걱정 마라. 적어도 남한테 뒤진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는군.”
르누는 최고 장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기본적인 마력 운용은 자네가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로브를 입은 자를 최고 장로에게 맡긴 르누는 자신에게 집중된 장로들의 시선을 느끼며 불의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지금부터 하는 의식에 우리 일족의 운명이 걸려있다! 성공하면 우리는 위대한 지배자로 세계에 우뚝 설 것이고 실패하면 우리 일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성공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의식에 참여할 테니, 그 어느 때보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네!”
장로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자, 이름 모를 동맹이여. 네놈의 자리는 저….”
르누의 말이 끊겼다. 다른 장로들의 얼굴에도 경악의 표정이 새겨졌다.
“커억!”
철의 일족의 장로들을 이끄는 최고장로. 그의 가슴에 검 하나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을 잡은 자는, 바로 철의 일족의 동맹인 로브를 입은 자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