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르누는 로브를 입은 자의 말에 다시 호수를 내려다봤다.
로만느를 실은 배가 호수에 떠서 멘티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호수의 눈물의 영역도 멘티스를 더욱 잠식했다.
“네 말로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하지만 어떻게 할 건가?”
“무녀가 멘티스에 들어온 후에 녀석들의 진영을 내 세력으로 공격한다. 물론 무녀를 멘티스 안으로 어느 정도 끌어들인 후에 해야겠지. 멘티스를 호수의 눈물의 영향권 안에 모두 집어넣을 생각이라면 그녀가 멘티스 중앙부 근처까지는 와야 할 테니까. 그러면 아무리 연합군 놈들이라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지. 그 틈을 노린다.”
르누는 지금 멘티스에 들어와 있는 연합군의 병력을 살폈다. 저항이 사라진 후, 연합군은 정말로 수월하게 병력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미 상륙한 병력의 숫자만 해도 자신의 일족과 비슷할 지경이다.
로브를 입은 자도 르누와 같은 것을 본 모양이다.
“병력은 비슷하군. 조금만 있으면 녀석들이 더 많아지겠어. 성공한다 해도 너희 일족은 상당히 많이 피해를 입겠지. 그래도 호수의 눈물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성공이다.”
“하지만 실패할 확률도 적지 않다.”
“그건 어쩔 수 없겠지. 전력의 규모가 다르니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한 로브를 입은 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숨겨 놓은 병력 같은 건 없나?”
“뭐?”
“병력이 아니라도 좋다. 너희 그, 플레임 트루퍼라고 했나? 그런 특별한 힘이라도 좋아. 지금 더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있냐고 물었다.”
“…….”
르누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있군.”
“그건 정말로 중요한 때에….”
“지금이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르누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철의 일족의 왕.”
로브를 입은 자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조금 분노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르누를 부를 때 르누의 풀네임을 입에 담던 자가, 지금은 그의 직책을 부른 것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다.
“애초에 네놈은 우리가 없다 하더라도 너희의 힘만으로 충분히 방어를 해낼 수 있었다. 그게 불가능해진 건 연합군이 호수의 눈물을 가져왔기 때문이지. 한데, 지금 너희를 압박하는 유일한 전력인 호수의 눈물을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럼 다시 한번 묻지, 철의 일족의 왕.”
“…….”
“지금 그 힘을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알았다.”
르누는 곁에 있는 병사 한 명에게 뭔가 명령을 내렸다. 병사가 급히 아래로 뛰어내려 갔다.
“폭주인가.”
르누가 한 명령을 옆에서 들은 로브를 입은 자가 물었다.
“그래. 의식 때 불의 나무에 과부하를 줘서 일시적으로 불의 나무의 힘을 뜻대로 다룰 수 있다. 그 순간엔 아무리 호수의 눈물이라도 플레임 트루퍼를 막을 수 없겠지.”
“플레임 트루퍼의 강화라. 어느 정도까지 강해지지?”
“아마 호수의 눈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때 정도까지는 강해질 거다. 만약 호수의 눈물만 아니었다면 그 이상도 강해졌을 터이건만.”
르누가 씁쓸하게 말했다.
“당연히 부작용은 있겠지?”
“의식의 완성이 뒤로 밀린다.”
그 때문에 르누도 이 방법만큼은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로브를 입은 자의 말에 따르는 게 맞았다. 호수의 눈물만 차지할 수 있다면 자신들의 승리는 굳어진다.
“그렇군.”
로브를 입은 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피리였다. 그는 피리를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삐익! 삑! 삑! 삐이익!
짧고 길게 끊어지고 이어지고를 반복하는 피리 소리는 분명 어떤 신호였다. 무척 시끄럽게 높은 그 피리의 소리는 호수를 넘어 숲까지 영향을 미쳤다.
르누가 로브를 입은 자를 쳐다봤다.
“뭐 하는 거지?”
임시 동맹이 하는 수상한 행동에 르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보면 모르나? 당연히 신호를 보내는 거다.”
“무슨 신호?”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테니 지정된 좌표에 가서 움직이라는 신호.”
로브를 입은 자는 태연하게 대꾸하고 피리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르누에게 불쾌하게 말했다.
“아무리 얼마 후면 목숨 걸고 싸우는 사이가 될 거라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할 거면 뭐 하러 손을 잡은 거지?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내 부하들이 멘티스에 상륙하지 못하게 한 건 네놈이다. 녀석들이 멘티스에 있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신호는 필요 없었겠지. 그래 놓고는 이제 내가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의심하는 건가? 그럼 내가 대체 내 병력을 어떻게 움직일까. 고함이라도 쳐야 하나?”
“…….”
르누가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신호는 연합군 녀석들도 들을 텐데? 네 부하들이 들키면 어쩔 생각이냐.”
겨우 한 말이란 게 그 따위의 궁색한 변명이었다. 당연히 로브를 입은 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성에서 퍼진 신호는 누가 들어도 네가 너희 일족에게 내린 명령으로 알아들을 거다. 헛소리는 그만 해라.”
“…알겠다.”
결국 르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 시각. 연합군의 진영.
로브를 입은 자가 보낸 신호는 당연히 그들에게도 잘 들렸다.
“신호로군.”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지휘부에 앉아 있던 평원의 일족의 왕이 눈을 빛냈다.
“해석해.”
“네!”
옆에 있던 부하 엘프가 신호를 듣고 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신호가 이어졌고 엘프의 손놀림도 계속됐다.
신호가 끊겼다. 엘프가 종이를 들어 평원의 일족의 왕 곁으로 다가갔다.
“뭐라고 보냈냐.”
“상대의 비장의 수. 클로원 힘의 폭주. 단시간 동안 불덩이들이 호수의 눈물 영향권 내에서도 제힘을 찾을 것으로 보임.”
“클클클!”
평원의 일족의 왕이 통쾌하게 웃었다. 옆에 있던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크라고 했나. 호수의 일족 왕의 딸이 정말로 대단한 놈을 데려왔어.”
“능력, 담력, 지력 등등 빠지는 게 없군요.”
“솔직히 자기가 철의 일족의 왕 옆으로 가 정보를 캐내고 전황을 컨트롤하겠다고 했을 때는 정신 나간 놈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랬나? 나는 처음부터 무척 재미있고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을 했었다만.”
그리고 평원의 일족의 왕은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병사 한 명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보고드립니다. 무녀님께서 멘티스에 도착하셨답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계속해서 병력을 수송하지.”
“그런데 속을까요?’
“뭘 걱정을 하고 그러나?”
산의 일족의 왕은 수풀에 가려진 성이 있는 쪽을 보고 씩 웃었다.
“그 대단하신 철의 일족의 왕 옆에 있는 사람이 알아서 처리할 텐데.”
* * *
결국 무녀가 멘티스에 상륙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르누는 억지로 다시 폈다.
로브를 입은 자의 말처럼 무녀와 호수의 눈물을 탈취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호수의 눈물의 영향력은 이미 멘티스의 2/3를 집어먹은 상태. 그만큼 철의 일족의 방어선도 후퇴한 상태였다.
“저건….”
공격 타이밍을 언제로 잡을까 고민하던 르누의 눈에 지금까지완 다른 게 보였다. 로브를 입은 자도 흥미를 보였다.
“갑옷인가?”
“골렘이다.”
르누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놈들에게 휘둘려 인질들을 모두 빼앗긴 쓰라린 기억이 생각난 것이다.
“아, 널 능멸했던 그 놈들이군.”
로브를 입은 자가 그렇게 말하니 더더욱 열이 받았다.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어떻지?”
“대부분은 뒤에서 숫자나 채우던 놈들이다. 골렘인 만큼 잘 죽진 않지만 그렇다고 성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지.”
“너희 병사와 비교를 하면?”
“비교를 할 가치도 없어. 우리 병사 한 명이 두 세대는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그런 놈들한테 속은 건가?”
“무척 우수한 성능의 놈들이 얼마 끼어 있었다. 직접적으로 싸운 건 그 놈들이었지. 그 꾀에 우리는 홀랑 속아 넘어가버렸고.”
말을 하면서 르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로브를 입은 자는 다시 한번 갑옷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갑옷이 상당히 많은데. 네 말에 따르면 숫자만 채우던 놈들까지 전부 동원한 것 같군.”
호숫가에 가지런히 늘어선 햇빛을 반짝이는 갑옷들의 향연은 그 자체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 배에 타서 멘티스로 향했다.
“지금 건너오는 놈들은 모두 골렘이로군. 엘프는 더 이상 건너오지 않는 모양이야.”
멘티스 중앙에 뚫린 구멍에서도 이제는 엘프 대신 갑옷이 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쓸모없는 골렘을….”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르누가 연합군의 생각을 짐작하려 할 때였다.
“무녀의 호위용 아니겠나.”
로브를 입은 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호위용? 저 허접한 놈들이 무슨 호위를 한다고.”
“그런가? 난 상당히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만. 어차피 무녀는 직접 전투가 일어나는 곳까지 오지는 않을 거다. 후방에 있겠지. 그러면 자연히 위협이 되는 건 화살과 마법이 될 터. 하지만 저 녀석들이 보호한다면 그 위험도는 떨어지겠지. 아무리 성능이 떨어지는 골렘이라도 몸으로 막을 정도의 성능은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멘티스로 상륙하는 갑옷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아마 저번 전투 때 부서지지 않은 골렘을 모두 동원한 모양이었다.
‘저 정도 골렘들이 무녀의 주위를 막고 공격을 몸으로 막아선다면 무녀의 안전은 상당히 지켜질 거야.’
병력으로서는 별로지만 방패로서는 충분히 쓸 만할 것이다.
‘그리고 무녀의 호위로 사용해야 할 병력을 공격으로 돌릴 수도 있을 테지.’
아무래도 로브를 입은 자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무녀가 움직이는군.”
로브를 입은 자의 말에 르누가 전장을 살폈다. 갑옷을 충분히 동원했다는 듯 무녀가 갑옷들을 말 그대로 주변에 잔뜩 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골렘들은 무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어.”
“그렇군. 정말로 호위인 모양이야. 하지만 호위가 조금 과하군. 대체 얼마나 투입할 생각이지?”
무녀가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배들은 계속해서 골렘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뭐, 그만큼 무녀가 중요하단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로브를 입은 자가 르누를 돌아봤다.
“우리 공격은 저 골렘들이 모두 상륙한 다음에 하는 게 어떤가?”
“그럴 필요가 있나?”
르누는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생각을 해 봐라. 무녀가 멘티스 깊은 곳까지 오면 올수록 무녀와 호수의 눈물을 탈취할 확률은 높아진다. 연합군이 계속 지원 병력을 보내고 있다면 빨리 공격을 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보내는 건 방패로밖에 쓸모없는 깡통들뿐이 아닌가. 투입되는 지원이 골렘뿐이라면 무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들이는 게 낫지.”
“음, 그건 그렇군.”
“우리의 목적을 상기해라, 르누 언 트 드라스. 지금 우리가 성공시켜야 할 목표는 연합군의 피해를 키우거나 우리의 피해를 줄이는 게 아니다. 무녀와 호수의 눈물의 확보, 그 두 개다.”
“…좋다. 네 생각대로 하지.”
결국 르누는 갑옷들이 계속해서 멘티스로 들어오는 걸 허용했다. 무녀를 더욱 멘티스 깊은 곳까지 끌어들이기 위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