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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11화 (211/628)

제211화

나무의 주위로 녹색과 검은색의 마력이 스치듯 이지러진다. 그건 의식의 반응이었다.

철의 일족의 장로들이 내뿜는 마력들이 나무를 회전하며 불길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그 영향인지 나무의 불도 마력을 따라 이리저리 넘실거렸다.

순간 성을 뒤덮은 나무의 마력의 흔들림이 있었다. 르누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또 침입자인가.’

얼마 전, 그의 적들이 꼬리 내린 개새끼마냥 도망친 전투가 막 끝났을 시점에 성을 잠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놈이었겠지!’

르누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붕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 너머에는 흉측한 피부가 숨어있다.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빌어먹을 인간.

‘잡았어야 했는데!’

잡아서 자신의 고통을 똑같이 아니, 열 배 스무 배 이상으로 만들어 줘야했다.

온몸을 불태우고 치료하고 다시 온몸을 불태우고 치료한다.

그런 고문을 적어도 수 십 년 동안은 해야 응어리의 일부나마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 성 안에 몰래 숨어 든 전적이 어디 가지 않는지 녀석은 정말로 쥐새끼마냥 요리조리 도망쳤다.

‘차라리 성 깊숙이 유인할걸 그랬어!’

그래서 많은 병력으로 포위해 잡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부상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황이 없었다.

그저 눈이 뒤집혀 병사들에게 놈을 잡으라고 악만 써댔다. 그로 인해 결국 그 인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움직였다. 이미 병사들에게도 놈이 잠입하려 시도하면 어느 정도 성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놓아두라 명령해둔 상태.

하지만 한 병사가 다가와 올린 보고는,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뭐라고?”

“예전의 그 인간이 아닌 듯합니다!”

“그놈이 아니라니. 그럼 어떤 놈이란 말이냐.”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 아니겠지.”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온몸에 끔찍한 화상을 입고 안 그래도 잔혹한 성정이 더욱 잔인해져버린 르누와 장난을 칠 정신 나간 담력 같은 걸 병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얼른 침입자에 대한 설명을 꺼냈다.

“그자는 성에 돌입하자마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전하를 찾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을 맺을 용의가 있으니 전하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계약?”

“네! 전하께 그렇게 전하면 알 거라고 했습니다! 성 안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평범한 침입자는 아닌 듯하여 이렇게 전해드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병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투구 속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제발 침입자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있었던가. 르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생각은 길지 않았다. 바로 생각나는 자들이 있었다.

“…침입자는 어떻게 생겼지?”

“생김새는 보지 못 했습니다. 온몸을 검은 로브로 둘러싸고 있어서….”

역시 그자들이었다.

“데려 와라.”

“네!”

병사는 별다른 의문 없이 강하게 대답하고 르누의 앞을 떠났다. 목숨을 부지하고 왕의 곁을 떠날 수 있어 그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르누는 지하실 한복판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명의 병사에 포위된 채로 한 사람이 내려왔다.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정체불명의 존재. 병사들은 그자가 무척이나 수상한지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자와 병사들이 르누의 앞에 섰다.

“너희들은 물러나라.”

병사들은 절도 있게 르누에게 인사를 하고 지하를 나갔다.

“설마 너희가 다시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르누가 입을 열었다. 로브를 쓴 자는 주변을 훑어 봤다.

“호위는 필요 없나?”

그가 거슬리는 쇳소리로 말했다. 목에 이상이라도 있는 것인지 로브를 쓴 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걸걸했다.

방금 나간 병사를 끝으로 지하에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르누를 죽이는 건 당장이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르누는 태연했다.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역시 저 힘 덕분이겠지?”

로브를 쓴 자의 시선이 지하의 문 너머 불의 나무로 향했다.

“궁금하면 시도해보도록.”

“사양하지. 이쪽은 너와 적대하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런가? 좋아, 그럼 뭘 하러 온 거지?”

“협력을 위해서.”

“하하!”

르누는 짧고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비틀린 조소는 충분히 전달됐다.

“협력이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더 이상 네 놈들의 협력이 필요 없어서 내가 네 동료를 죽인 건 기억나지 않는 거냐? 아니, 얼마 전에 네 동료가 또 너희들에게 복종하라는 웃기지도 않은 제안을 한 적도 있지. 그때 배신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너희 조직은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는 거냐?”

“뭔가 착각하고 있군. 르누 언 트 드라스.”

로브를 쓴 자의 목소리가 일순 낮아졌다.

“너희를 짓밟는 건 이미 결정됐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네놈의 목을 치고 너희 일족의 피로 대지를 물들일 것이다.”

“…….”

르누가 날카롭게 로브를 쓴 자를 노려본다. 그의 말은 르누에게 있어 무척이나 모욕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필요하다면 적과도 협력할 수 있는 게 우리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말이냐.”

“멘티스 바깥의 연합군. 너에게 무척이나 거슬릴 터인데?”

“무슨 소린가 했더니.”

르누는 키득댔다.

“이봐, 거적데기 두른 망상가 놈. 우리가 저 멍청한 놈들에게 밀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르누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인정하지. 전체적인 전력은 우리가 분명 달린다. 하지만 그래서? 시간은 우리 편이고 섬이란 조건은 방어하기 무척 유리하지. 게다가 우리는 모자란 전력을 보충해줄 방법까지 가지고 있다. 이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네 녀석들의 협력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까. 응? 말해보시지.”

챙!

르누가 차고 있던 검을 빼내 로브를 쓴 자의 목에 겨눴다. 잘 벼린 검에서 나온 예기가 로브를 살짝 찢었다.

“납득할 이유가 없다면 네놈도 여기서 죽는다.”

“…….”

로브를 쓴 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큭큭큭!”

하지만 잠시 후, 로브 안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당장 내 목을 날리면 될 것을.”

“…….”

“아, 너의 심정은 대충 안다. 이미 협력을 깨고 동료를 죽이기까지 한 우리가 이렇게 다시 접촉을 하는 건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네 생각이 맞다. 우리는 이유가 있고, 우리의 이득을 위해 너희에게 이득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있지. 하지만 말이다, 르누 언 트 드라스여.”

로브를 쓴 자는 마치 불쌍한 것을 본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나 같은 놈의 목은 당장 날려버리고 계속 네 갈 길을 가면 된다. 하지만 허세에 찌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러진 못 하고 있어. 네놈의 그릇이 나타난 거지. 절대적인 힘이란 것을 손에 넣고도 겁에 질려있다니. 안쓰럽기까지 하구나, 철의 일족의 왕이여.”

스윽!

르누의 검이 로브를 쓴 자의 목에 더욱 깊숙이 들어섰다.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넌 죽이지 않고 있지.”

두 사람의 대치 속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 좋다.”

침묵을 깬 건 로브를 쓴 자였다.

“말투가 조금 과격했군. 어쨌든 우리는 너희와 잠시 협력 관계를 맺고 싶다. 이 전쟁에서 우리의 병력을 빌려주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호수의 일족에 호수의 눈물이 돌아왔다고 해도?”

순간, 르누가 들고 있던 검이 흔들렸다.

“…뭐?”

“네 녀석이 우리를 배신하고 너희 일족만으로 헛된 꿈을 꾸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그것 아닌가? 호수의 눈물의 소실말이다. 물론 그것만일 리는 없지. 너희들은 호수의 눈물이 사라진 직후에 바로 일을 일으키진 않았으니까. 아니, 혹시 그 기간은 준비 기간이었나? 뭐, 지금 그걸 따져봐야 상관없겠지. 어쨌든, 그 호수의 눈물이 돌아왔다.”

“말도 안 돼! 분명 인간이 훔쳐서 이 숲을 나갔다고 했을 텐데!”

“호수의 일족의 공주님이 찾아왔다고 하더군.”

“레오나가?”

그녀가 호수의 눈물을 찾기 위해 가출했단 소리는 들었었다.

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오거나, 설령 성공한다 해도 계획이 전부 성공한 이후에나 돌아올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돌아왔다고?’

“어쩔 텐가?”

로브를 쓴 자가 말했다.

“호수의 눈물을 사용한다면, 너희의 그 모자란 병력을 보충해준다던 녀석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지 않을까?”

르누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원하는 건?”

“없어.”

“헛소리.”

“헛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없다. 정확히 말하면 너희가 해줄 건 없다. 전쟁통에 우리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말해라!”

“거절하지.”

“그럼 협력도 없다!”

“그럼 목을 쳐라. 내가 오늘 안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협상은 자동으로 결렬이니.”

르누가 검을 꽉 쥐었다.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검까지 흔들렸다. 그의 넘치는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르누는 검을 내렸다.

“…계획을 말해라.”

“환영하마. 일시적인 동맹이여.”

로브 안에서 들려오는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르누는 험상궂게 인상을 썼다.

* * *

첫 번째 전투가 지나고 며칠이 지났다. 연합군은 피해를 추스르고 다시 한 번 공략에 나섰다. 공격 방법은 예전과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저벅!

호숫가에 한 명의 여성 엘프가 나섰다. 푸른 보석을 들고 있는 그녀는 바로 호수의 일족의 무녀인 로만느였다.

그녀는 긴장된 눈으로 호수 너머의 멘티스를 쳐다봤다.

그녀의 곁으로 연합군이 지나갔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철의 일족은 예전과 같이 호숫가에서 연합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예전보다 적었다.

저번 전투 때 입은 피해 탓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예비대를 섬 곳곳에 둔 영향이 컸다. 또, 땅굴 때문에 후방에서 공격받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숫자의 적음은 철의 일족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화륵! 화륵! 화륵!

호숫가로 움직이는 불덩이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팔은 적의 몸에 커다란 불구멍을 낼 것 같았고 얼굴 없는 머리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배를 타고 접근하는 연합군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들의 배는 멈추지 않았다.

투웅!

화살이 쏘아졌다. 저번처럼 최초의 공격은 활이었다. 서로에게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불덩이들은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퍼엉!

다음은 마법이었다. 서로에게 불덩이가 오가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물덩이가 쏘아졌다. 하지만 그때도 불덩이는 가만히 있었다.

두 진영이 조금 더 접근한 순간.

후욱!

불덩이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머리에서 뿜어진 불꽃이 배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을 기다린 건 불덩이들만이 아니었다.

로만느가 들고 있던 호수의 눈물이 청명한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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