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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10화 (210/628)

제210화

연합군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첫 번째 전투에서 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적의 원군인 괴상한 불덩이들의 존재도 그들의 사기를 깎아먹는 요소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엘프들은 조용히 자신을 정비하며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건 지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지크 일행은 앉아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한스는 최전선에서 엘프들과 다퉜고 라일라도 마법을 연거푸 퍼부어댔으며 스녹은 커다란 땅굴을 만들고 유지시켰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셋 중 그 누구도 잠을 청하지 않고 있었다.

후웅!

그들의 근처에서 마력의 파동이 일었다. 한스와 스녹이 벌떡 일어났다.

턱!

마력의 파동 속에서 지크가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그래.”

한스에게 대답해준 지크가 라일라에게 아티팩트를 건넸다. 라일라의 비장의 아티팩트라 할 수 있는 순간이동의 아티팩트였다.

확인할 것이 있어 멘티스에 남은 지크를 위해 그녀가 잠시 빌려준 것이었다.

이제는 귀한 아티팩트를 부담 없이 빌려줄 정도로 그녀가 지크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잘 썼어.”

“어땠어?”

지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전처럼 성에 잠입하는 건 무리다.”

지크는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스와 스녹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감시가 심했어?”

“감시가 심해봤자지. 하지만 내가 성에 잠입하기 무섭게 병력이 달려 왔어. 몇 번을 재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막혔다.”

“투명화나 기척 감소 아티팩트는 사용했지?”

“당연하지.”

“그런데도 불가능했어?”

투명화와 기척감소의 아티팩트, 거기에 지크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정말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

로만느를 구할 때도 감시가 가득 있던 성에서도 제집 드나들듯 움직이며 감시를 무력화하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저 힘이란 게 깨어나면서 몰래 숨어들어가는 게 불가능해진 모양이야.”

“정말로 성가신 힘이네.”

라일라가 투덜거렸다.

“됐어. 어차피 철의 일족의 왕을 암살한다고 해도 저 녀석들이 멈추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아니, 이 정도까지 왔으면 이미 왕의 죽음은 사소한 일일 거야.”

때문에 지크는 르누의 암살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어때?”

“좋지 않습니다.”

지크의 질문에 한스가 대답했다.

“전투에서 졌으니 그렇긴 하겠지.”

하지만 성과 없는 전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르누가 말했다던, 의식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게 할 존재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확인했다.

라일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앞으로는 어쩔 거야?”

“글쎄. 연합군 지휘부가 뭔가 해답을 내놓겠지.”

“그러고 보니 사령부에서 지크 님을 찾았습니다. 앞으로의 상의를 위해 사령부에 들러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스가 전언을 보고했다.

“이거 참, 인기인은 괴롭군.”

지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일어섰다.

“잠깐 갔다 오마. 너희들은 먼저 자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지크가 사령부로 떠나자 한스와 스녹은 바로 모포를 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피곤했는지 둘은 거의 드러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둘과 다르게 라일라는 잠들지 않았다.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모닥불을 응시했다.

* * *

지크가 돌아온 건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안 자고 있었냐?”

깨어있는 라일라를 보고 지크가 물었다. 라일라가 일어섰다.

“잠깐 얘기 좀 해.”

지크는 라일라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라일라는 지크를 끌고 야영지를 벗어났다. 엘프의 민감한 귀를 의식해 그들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갔다.

앞장서 걷던 그녀가 몸을 빙글 돌렸다. 지크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지?”

“물론이지. 내가 마왕처럼 변할 것 같아서 그런 것 아니냐.”

“변할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그녀의 듬성듬성 구멍 나 있는 기억 속에서도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모습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마왕이 얼마만큼 세상에 피해를 끼쳤는지도.

기억은 없지만 그녀는 따지자면 선량한 쪽의 사람이다. 게다가 같이 여행을 다니며 지크에게 정도 들었다.

그녀에게 이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기억이 없어 가족도 친구도 지인의 존재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그녀 자신이 인간이 아닐 가능성조차 있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가장 가까운 존재를 고르자면, 아무래도 지금 여행을 같이 다니는 일행인 지크, 한스, 스녹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한 명을 꼽자면 당연히 지크였다.

한스와 스녹은 지크의 종으로서 그를 깍듯하게 따르고 있다.

그런 둘이었기에 지크와 동등하게 이야기를 하고 계획을 짜는 라일라와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지금 라일라와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바로 지크였다. 한데, 만약 그 지크가 마왕으로 변해버린다면….

라일라는 예전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지크를 적대할 자신이 없었다.

라일라의 심각함에 지크도 진지하게 대답을 내놨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굳이 변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변하지 않고 싶은 생각도 없어.”

어쩌면 정말로 지크다운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변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은 걸 하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가 됐을 뿐이지.”

자기식대로 ‘조금’ 변형시키긴 했지만 착한 일을 한 결과는 분명 힘의 마왕과 멀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다 제쳐놓고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 인정받은 것만 해도 그런 결과니까.’

그건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럼 지금은 하고 싶은 게 바뀌었어? 갑자기 왜?”

“그럴 이유가 흔들리고 있으니까.”

라일라는 이유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지크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미 효용을 다한 그 이유로는 그를 막기 힘들 것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들을 필요는 없다. 듣더라도 소용없을 테니까.

“그럼 다른 이유를 달면?”

지크의 시선이 라일라의 것과 얽혔다.

“용사를 꿈꾸는 한스와 스녹. 네가 마왕으로 변해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적대하겠지.”

“확신하는구나. 너를 따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 정도로 어설픈 교육을 하진 않았어. 내가 마왕이 된다면 녀석들은 반드시 나를 쓰러뜨리러 올 거다. 심정이야 어찌 됐든 말이야.”

저렇게 딱 잘라 대답하는 것도 대단했다.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아?”

“너도 똑같겠지. 아무리 나와 같이 여행을 했다고 해도 너는 악인은 아니니까. 오히려 선인에 가깝지.”

“맞아. 그것들은 이유가 되지 않아?”

“글쎄….”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색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꺼릴 정도도 아니다. 지크의 대답은 라일라에게 썩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일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임시적인 이유로는?”

“임시적인 이유 말이냐?”

“그래. 우리와의 인연을 이유로 영원히 네 멋대로 살지 말라고는 안 하겠어. 하지만 잠시 동안은 괜찮잖아?”

“그 이후는?”

“지금부터 찾아볼게.”

라일라가 굳게 말했다. 지크가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려는 것일까.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 지크를 향했다.

지크는 웃었다.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이.

“좋아.”

그가 말했다.

“어차피 한스와 스녹의 교육도 안 끝났고. 착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도 나름 나쁘진 않았으니까. 네 말대로 하마.”

라일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저 지금까지처럼 살면 되는 거지? 이보다 더 착하게 살라고는 하지 마라. 아무리 네 조건을 들어준다 해도 한계는 있으니까.”

“물론이야. 오히려 네가 진짜로 선인처럼 살면 오히려 내가 기겁을 할 것 같아. 부탁이니까 그 정도로 착하게는 살지 말아 줘. 지금이 딱 좋으니까.”

“역시 넌 날 잘 알아.”

지크는 낄낄거렸다. 그 웃음은 평소의 지크의 것이었다. 그녀의 지식 속에 있는, 잔혹하고 이기적인 마왕의 것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안도했다. 지크가 저렇게까지 말했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다. 한시라도 빨리 지크의 입맛에 맞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임시적인 기간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어치피 구두약속. 지크가 싫다고 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별 이유 없이 그러진 않겠지만.’

그러나 그 말은 곧 별 이유가 있다면 약속을 무시할 수도 있단 소리다.

‘그래도 그가 마왕이 되게 할 순 없어.’

라일라는 굳게 결심했다.

“자, 얘기 끝났으면 돌아가자. 아무리 놈들이 멘티스에 모여 있다고 해도 전쟁 중에 진영에서 멀리 벗어나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니까. 생각할 거리도 있고.”

“무슨 생각?”

“내가 전쟁에서 그저 사람 쳐 죽이는 건 싫을 거 아니냐.”

지크는 이번엔 마왕 때처럼 작전이나 계략 같은 건 전부 지휘부에 맡기고 순수하게 전쟁을 즐기려 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그럼 빠르게 이 전쟁을 종식시킬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것도 착한 일이긴 하니까.”

“그렇지!”

라일라는 기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에 나온 지크의 말에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내 취미 생활을 병행할 방법도 마련해야지. 이야, 역시 착한 일은 힘든 법이야.”

* * *

철의 일족의 왕인 르누는 성의 지하에 있었다.

활짝 열린 지하의 문. 그 너머로 한창 불타고 있는 듯한 나무가 보였다. 하지만 그 나무는 불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나무를 감싸고 있는 그 불 자체가 그 나무의 일부였다.

강대한 화염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나무. 도저히 믿기 힘든 조합을 가진 나무였지만 그것이야말로 성 아래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 제국 클로원의 힘이었다.

커다란 나무가 들어가기 충분하게 문 너머의 공간은 아주 깊이 파여 있었다.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계단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면까지 아주 길게 뻗어 있었다.

나무의 아래에는 수십 명의 엘프들이 서 있었다. 전부 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탈색된 머리를 갖고 있다.

잘 늙지 않는 엘프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들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정말로 오래 살아온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철의 일족의 과거를 이끌어 온 장로들이었다. 죽음이 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몇 년 내에 죽을 정도까지도 아니다.

육체 능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오히려 과거 쌓은 지식과 지혜로 인해 마법 능력만큼은 무척이나 높았다.

르누는 그들을 정말로 꽁꽁 싸매 숨겨뒀었다. 저들은 클로원의 힘을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의식을 펼칠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장로들만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크윽!”

의식을 바라보던 르누가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아파왔다. 커다란 화상을 입은 그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붕대 너머로 끔찍한 화상 자국이 있는 피부가 흘끗흘끗 보였다.

아무리 포션을 퍼부어도 그저 고통이 가라앉을 뿐, 피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고통은 그에게 있어 지옥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통이 그를 좀먹으면 좀먹을수록 그의 야망은 계속 커졌다. 이제는 야망이 아닌 집착이나 마찬가지였다.

몸을 불태우는 고통과 분노를 넓은 세상에 토해내기 위해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태운 불꽃을 쏟아낸 불의 나무를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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