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혹시 다시 성의 힘이란 것이 폭주한 것일까. 그러나 성의 불꽃을 본 지크는 그 생각을 접었다.
‘통제되고 있어.’
예전처럼 성 전체를 통째로 태우려는 듯 불타는 것이 아니다. 불꽃은 분명 성에서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 규칙성이 있었다.
‘벌써 의식이 끝난 건가?’
혹시 로만느에게 알린 정보가 기만이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철의 일족의 왕에 대한 평가를 상향 수정해야겠는데?’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할 일이다.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불꽃이 연합군에게 이득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거 어떻게 생각하냐?”
“적어도 우리한테 이롭진 않을 것 같아.”
라일라도 지크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콰직!
“크억!”
그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지크도 덤벼오는 철의 일족 엘프 한 놈을 더 찍어 죽였다.
그렇게 잠시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퍼엉!
중앙에서 커다란 흙덩이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지크 님! 스녹의 신호입니다!”
한스가 외쳤다. 라일라도 그 흙덩이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뭔가 오긴 오는가봐.”
그건 스녹이 탈출 구멍을 지키지 못할 상황에 빠졌을 때 구멍을 없앤다는 신호였다.
“적의 지원군일까?”
“글쎄. 곧 알게 되겠지.”
“마법으로 확인해 봐?”
“됐어. 어차피 곧 보일 텐데. 그보다는 라일라. 너는 내 옆으로 붙어라.”
지원군이든 정체불명의 고대 제국의 힘이든 이걸로 후방이라는 존재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두는 게 안전했다.
“한스. 너는 뒤에 있는 엘프 놈들을 계속 공격해.”
“네!"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려한 반짝임이 전장을 수놓으며 철의 일족의 목숨을 무참하게 앗아갔다.
지크도 마력을 날려 철의 일족을 계속 공격하면서 뒤쪽을 경계했다.
적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어이, 라일라. 저게 뭔지 알겠냐?”
“글쎄. 나도 모르겠어.”
많은 경험을 한 지크나 다양한 마법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라일라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 했다.
그건 불덩이였다. 크기는 대략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정도.
사람처럼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가 붙어있다. 머리 같은 것도 솟아있긴 했지만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다.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적병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처럼 그것들은 전장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라일라!”
“알고 있어!”
라일라는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팡이에서 엄청난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팡이가 불덩이들에게로 향했다.
쩌억! 쩌억!
순식간에 전면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면이 딱딱해졌고 벽에도 서리가 내렸다. 간간이 서 있는 나무들의 잎이 얼어붙어 깨져 내렸다.
“다행히 약점은 보이는 대로인 모양이군.”
불덩이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걸 보고 지크가 중얼거렸다.
퍼엉! 퍼엉!
결국 극한의 냉기를 버티지 못 했는지 몇 개의 불덩이들이 터져 나갔다.
그 와중에 라일라는 마법 하나를 더 준비했다. 그녀의 뒤로 십 수 개의 물로 만들어진 창이 만들어졌다. 라일라의 의지에 따라 그것들이 전면으로 쏘아졌다.
퍼억! 퍼억!
물의 창들은 정확하게 불덩이들에 꽂혔다. 그중 몇몇 개가 더 터져 나갔다.
그걸 보고 라일라가 말했다.
“그렇게 대단할 건 없는 녀석들 같은데?”
“그래. 나는 무슨 핵 같은 걸 파괴하지 않으면 계속 재생하는 괴물이 아닐까도 생각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야. 상대하는 데 어렵지는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지크는 라일라가 처리한 불덩이들의 뒤쪽을 쳐다봤다.
“저놈의 쪽수만 아니라면.”
라일라가 처리한 뒤쪽으로 더 많은 수의 불덩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지크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지크와 선두에 있던 불덩이가 충돌했다.
불덩이가 팔을 휘둘러 지크를 공격했다. 화륵 타오르는 불꽃의 팔이 일순 쭈욱 늘어나 지크에게 향했다.
지크가 몸을 기울여 피했다.
콰아앙!
땅에 꽂힌 불덩이 때문에 지면에 작은 구덩이가 패였다. 흙이 까맣게 탄 것이 맞는다면 충격과 더불어 몸에 끔찍한 화상 자국이 남을 게 분명했다.
지크는 윈두르를 휘둘러 불덩이의 팔을 베어냈다.
서걱!
퍼엉!
베어진 팔 부분이 통째로 사라졌다. 잘린 단면에서 새로운 불꽃이 튀어나와 재생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고통 같은 건 못 느끼는지 불덩이는 남은 팔로 지크를 껴안아왔다.
아무래도 자신의 강렬한 열로 지크를 태워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윈두르가 불덩이의 가슴에 꽂혔다.
후웅!
머리로 날아오는 불꽃을 피했다.
‘불꽃도 쏠 수 있나.’
머리라 생각되는 곳에서 뻗어나는 화염이 정확히 지크의 얼굴이 있던 쪽을 스쳐 지나갔다.
‘몸통을 찌르는 건 의미 없는가 보군.’
죽음을 선사하기는커녕 상대의 몸에 어떤 장애가 남는 기색도 없다.
지크는 윈두르를 빙글 돌렸다. 몸체에 꽂혀 있는 윈두르가 반 바퀴 회전해, 날이 불덩이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그대로 위로 그어 올렸다.
서걱!
퍼엉!
불덩이가 터졌다. 날아온 잔불을 털어내며 지크는 다른 불덩이에게 달려들었다.
‘머리를 날리면 죽는군.’
몇 체를 더 터뜨린 지크가 불덩이의 죽음의 조건을 확인했다. 놈들이 사라지는 걸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머리를 노려! 그래야 죽는다!”
지크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다른 불덩이들을 베어냈다. 라일라의 말대로 상대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문제는 이게 전쟁이라는 소리였다.
‘밀리는군.’
눈앞의 불덩이와 덤으로 뒤에서 라일라에게 덤벼드는 엘프 하나를 더 베어버린 후 상황을 지켜본 지크는 전황이 여의치 않게 흘러감을 느꼈다.
전장의 후방에서 튀어나와 상륙을 시도하는 아군과 함께 적들을 양면으로 공격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성에서 튀어나온 불덩이들이 문제였다.
철의 일족의 후방을 공격하고 있는 연합군이 반대로 후방을 공격당한 것이다.
철의 일족과 연합군의 일부가 각각 양면 공격을 받는 상황. 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적의 본거지다.
게다가 연합군의 한 축은 호수를 건넌 상륙전이라는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고 있기도 하다.
‘여기까진가.’
지크는 이 전투가 성공하지 못할 걸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후퇴! 후퇴해라!”
연합군 측에서 후퇴명령이 나왔다.
‘결국 버티지 못했군.’
하지만 지금부터도 무척 중요하다. 전쟁은 잘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잘 후퇴하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는 여기는 후퇴하기 최악인 곳이란 말이지.’
아군의 진영은 호수 너머에 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섬은 적의 영역.
호수 위에 떠 있는 섬이란 천혜의 이점은 공격도 무척 까다롭게 했지만 후퇴는 더욱 악몽같이 만들었다.
“어떻게 할까?”
라일라가 물었다. 지크가 윈두르를 들었다.
“일단 눈앞에 있는 놈들을 뚫고 호수에 있을 아군과 만나야지.”
연합군의 지휘관도 지크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후방에서 등장한 불덩이를 상대하는 건 최소의 병력만으로 하고 철의 일족에 대한 공격을 더욱 거세게 퍼부었다.
“한스, 라일라 잘 지켜라.”
“네!”
“라일라. 전면에 큰 거 한 방.”
“알았어.”
다시 한번 라일라가 지팡이를 들었다.
화르르르륵!
라일라의 지팡이 위로 거대한 화염구가 떠올랐다. 그걸 보고 다른 철의 일족들이 지크 일행을 노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라일라의 화염이 범상치 않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지크와 한스는 그 공격들을 모조리 무효화시켰다. 철의 일족의 방해는 성과 없이 끝나고 라일라의 마법은 완성됐다.
불덩이가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이번 건 상당히 공을 들였는지 불덩이는 철의 일족의 진영 일부를 지워버렸다. 물론 피한 엘프도 많았지만 분명 마법에 말려들어 즉사한 엘프도 많았다.
게다가 중요한 건 상대의 피해가 많다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진영이 얇게나마 붕괴했다는 것이었다.
지크가 진영 안으로 뛰어들었다. 윈두르에 마력을 집어넣은 채 사방으로 휘둘렀다.
“크악!”
“카악!”
철의 일족의 피해가 늘어났다. 지크를 막으려 많은 엘프들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피해를 가중시키는 것보다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저 인간을 따라라!”
그 모습을 보고 연합군의 장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지크는 상대의 진영에 말 그대로 균열을 내고 있었다. 얇아진 진영은 당연히 뚫기 쉽다.
지크의 뒤로 연합군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라일라도 전면에 마법공격을 가해 진영을 성기게 했고 한스도 에스텔레이드를 연속으로 휘둘렀다.
균열은 점점 커지고 철의 일족의 진영이 헐거워지며 결국 철의 일족의 진영이 둘로 갈라졌다.
눈앞에 호수가 보였다.
“우와아아아!”
“길이 났다!”
연합군은 철의 일족 사이를 가로지르는 통로를 통해 계속 밀려들었다.
철의 일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통로를 끊고 연합군을 다시 분단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압박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밀리지 않았다. 배를 타고 있던 연합군도 활과 마법으로 아군을 도왔다.
연합군은 그들이 타고 왔던 배들을 다시 호수로 끌어냈다. 그리고 동료들을 태운 뒤, 수가 차면 떠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은 수의 연합군을 모두 후퇴시킬 순 없었다.
지크는 전장에서 조금 떨어져 지면을 일정한 리듬에 맞춰 두드렸다.
후두둑!
순식간에 그의 옆에 구멍 하나가 파였다. 구멍에서 스녹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노웸이 서서 혹시 위험이 없나 주변을 휙휙 둘러 봤다.
“잘 연결됐지?”
“네! 그리고 호수 중앙까지 뚫어 놓은 구멍도 확실하게 매워놨습니다!”
스녹의 자신감 있는 대답에 지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 보내.”
“네!”
다시 한번 허공으로 흙덩이가 솟았다. 전장에 그 모습은 똑똑히 보였다.
“저기다! 저기에 새로운 땅굴이 있다! 가까이 있는 자들은 굴로 피난해라!”
미리 정해둔 후퇴 신호를 알아챈 지휘관이 크게 외쳤다. 가까이 있던 엘프들이 굴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굴 안을 달렸다. 괜히 지체했다가는 입구가 막혀 동료들의 후퇴가 더욱 늦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공적으로 철의 일족의 진영을 뚫고 다른 아군과 합류를 했다 해도, 땅굴이라는 피난로가 생겼다 해도, 이곳이 적의 본거지이고 섬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패주 중이라는 것도.
“크아아악!”
동료들의 후퇴를 지원하기 위해 후방에서 적의 격렬한 공격을 막고 있던 연합군 한 명이 불꽃에 몸이 꿰뚫려 쓰러졌다.
그 옆으로는 철의 일족이 쏜 화살에 미간이 관통한 엘프가 죽었다.
차근차근 후퇴를 하는 와중에도 연합군의 피해는 늘어났다.
그러나 그것에도 끝은 있는 법. 연합군의 마지막 생존자의 배가 호수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그 배는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
콰아앙!
호숫가까지 따라온 불덩이 몇 체가 배를 향해 화염을 뿜어냈다. 지치고 상처 입은 엘프들은 그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배는 침몰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저 멀리 배를 타고 후퇴하는 연합군이 보일 뿐, 섬에 남은 연합군은 없었다. 연합군의 후퇴 통로 중 하나였던 땅굴도 조용히 입구를 닫아 잠갔다.
연합군대 철의 일족의 첫 번째 전투는 철의 일족의 승리로 끝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