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그 구멍은 스녹이 판 땅굴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호수 아래를 파내려 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정하며 엄청나게 길게 파인 땅굴은 대지의 환수를 다루는 스녹이니 가능한 묘기였다. 심지어 넓이도 상당했다.
철의 일족은 오로지 배를 타고 오는 엘프들만 견제하고 있다. 지크 일행이 나온 후방은 거의 병력이 없다시피 했다.
“적, 적이다!”
“적이 후방에 나타났… 컥!”
지크의 검이 큰 소리를 내는 엘프의 목을 갈랐다. 그리고 옆에 있는 다른 엘프의 심장에 꽂혔다.
지크의 뒤를 이어 구멍에서 연합군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한스와 라일라도 있었다.
스녹은 구멍의 유지와 보호를 위해 굴 안에 남았다. 혹시나 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 구멍은 유일한 퇴각로가 될 것이니 무척 중요했다.
“바로 전투지점으로 갈 거지?”
라일라의 질문에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일단 상륙을 도와야하니까.”
전쟁에서 쪽수는 힘이다.
“게다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우리 때문에 적들은 놀라서 사기가 떨어질 거고. 자연스럽게 양면 공격이 되기도 할 테니까.”
당하는 입장으로는 지옥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후방 공격에 대비를 하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어.”
라일라가 말했다.
갑옷들을 동원해 멘티스를 혼란에 빠뜨린 게 얼마 전이다. 하지만 적들은 경험에서 배우는 것도 없었는지 후방을 휑하니 비워뒀다.
“아마 이런 대규모 공격은 예측하지 못했을 거다. 우리 트릭은 마지막에 밝혀졌잖아.”
“설마 그 때문에 ‘역시 후방에서 대규모 공격은 못한다’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건 아니겠지?”
“자기들이 틀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기들이 맞았어. 그러면 믿음이 한층 더 확고해 지지. 아마 녀석들은 후방에 공격이 있어 봤자 소수의 부대에 의한 파괴공작 정도밖에 하지 못 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게 곧 후방에 대한 경계 소홀로 나타났다는 거다.
“예비대를 편성할 만큼 전력이 넉넉한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을 테고. 혹은….”
지크가 뒤를 쳐다봤다. 멘티스의 성이 보인다. 커다랗게 났던 화재 때문에 검게 그을려 있는 성은 지금은 불꽃이 모두 꺼진 상태였다.
“철의 일족의 왕이 말했다는 ‘시간을 끌 만한 것’이 꽤 믿을 만한 것일 수도 있고.”
“뭘까?”
“모르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지기 싫으면 내놔야 할 테니까. 그래도 그전에 상대의 쪽수부터 줄여야지.”
지크는 전투지점으로 달려가는 엘프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한스와 라일라도 지크의 뒤를 따라 달렸다.
전투지점의 상황은 아까와는 정반대였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많은 병력에 철의 일족은 당황했다.
등 뒤를 공격당했다는 현실과 호수 쪽에서 계속 넘어오는 적의 상태 때문에 철의 일족의 움직임이 어지러워졌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켄디스가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며 어떻게든 진형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점점 철의 일족의 숫자는 줄어갔다.
콰아아앙!
라일라의 거대한 마법이 철의 일족이 가득 모인 곳으로 떨어진다.
여러 엘프들이 마법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엘프들도 부상에 신음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건 방어선에 구멍이 났다는 것이었다. 노련한 자들은 그 빈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전쟁 경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지크가 있었다.
“하아아앗!”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윈두르를 휘두른다.
다급하게 검을 들어 막으려는 엘프의 행동이 허무하게도 윈두르는 엘프의 목을 이미 가른 뒤였다.
그것도 한 명만이 아니었다. 총 세 개의 목이 윈두르의 공격 반경에 걸려 떠올랐다.
이번엔 대각선으로 검을 그었다. 옆에서 달려오던 엘프의 몸이 두 동강 났다.
화살이 날아온다. 미친 듯이 날뛰는 지크를 집중 견제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깔끔하게 두 발 움직이는 것으로 화살을 피했다.
철의 일족의 의도와 달리 지크는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움직여 철의 일족을 미친 듯이 도륙했다.
“하아~!”
뺨에 묻은 상대의 피를 훔쳐내며 지크는 한숨 쉬었다. 감정이 쭉 고양되는 기분이다. 자신의 압도적인 힘에 철저하게 놀어나는 상대를 보며 히죽 웃음이 나왔다.
지크는 회귀 전 다른 마인들처럼 재미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긴 했지만. 그래서 결국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크는 그 생활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힘의 마왕.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기른 힘은 쓰고 싶기 마련이다. 때문에 지크는 전장에서 힘을 휘두르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기른 힘에 상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전장 자체가 좋아졌다.
‘그립네.’
덤벼드는 엘프의 다리를 베어내고 목에 칼을 꽂으며 지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느낀 전장의 향에 취해 지크는 미친 듯이 몸을 움직였다.
회귀 전과는 다르다. 산을 무너뜨리고 섬을 깎아내는 압도적인 힘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힘만으로도 전장을 즐기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끄어어억!”
윈두르에 베어 창자를 쏟아내는 엘프를 주먹으로 쳐날린다.
멀찌감치 처박힌 엘프가 급히 자신의 창자를 집어넣으려 하지만 이미 지크는 녀석에게서 관심을 껐다.
“흡!”
검에 마력을 가득 흘려 넣었다. 윈두르가 마력을 더욱 증폭시킨다.
‘역시 좋은 검이야.’
묵직하게 휘날리는 마력이 검에서 느껴졌다. 지크는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마력이 방출됐다.
콰아아아!
폭풍 같은 검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쏘아져오던 화살이 동강 나고 날아오던 마법이 터진다. 그리고 그 뒤로 서 있는 철의 일족이 무자비하게 도륙됐다.
목, 가슴, 배, 팔, 다리 가릴 것 없이 난도질당한다. 순식간에 지크의 앞에 시체 무더기가 늘어졌다.
“으, 으으으으….”
누군가 신음을 흘린다. 지금의 지크는 정말로 악귀 같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들을 사냥하러 오는 사신 그 자체였다.
‘다음은 어느 놈을….’
지크의 시린 눈이 다음 사냥감을 찾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났다.
후웅!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깔끔하게 윈두르는 상대의 목을 날릴 것 같았다. 그러나 윈두르는 상대의 목 근처에서 우뚝 멈춰섰다.
“…뭐냐, 라일라. 위험하잖아.”
지크는 검을 거두며 자신의 뒤로 접근한 라일라에게 투덜거렸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는 후방에서 마법 지원을 하기로 했잖아. 아무리 너라도 여기는 위험해.”
지크는 날아온 화살 여섯 대를 쳐내며 말했다.
아무리 라일라가 마법사 치고는 갑작스러운 상황이나 근접 전투까지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인재라지만 전장 한복판에 들어오는 건 확실히 위험했다.
지크는 손을 휙휙 저었다.
“빨리 뒤로 빠져. 갈 동안까지는 지켜 줄 테니까. 난 조금 더 날뛰어야….”
꾸욱!
라일라가 지크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지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라일라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무척이나 불안한 표정. 큰 눈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다.
전장에 겁을 먹진 않았을 것이다. 라일라는 상당히 대범한 인물이다.
이런 전쟁터에 남겨진다고 해도 욕설을 하며 다른 놈들을 쳐날리고 빠져나올지언정 아무것도 못 하고 주저앉을 그런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지크는 라일라가 이런 표정을 보일 때를 알고 있었다.
하나는 그녀의 잃어버린 과거와 관련될 때. 또 하나는….
“뭐야. 또 내가 마왕이 될 것 같아?”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더욱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웃으며 농담 몇 개라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지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렌 제너드에 대한 의심과 함께,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도 상당히 희미해졌다.
지크는 인정했다. 지금 자신은, 과거 마왕 때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그런데 굳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할 이유가 있나?’
착한 일이랍시고 했던 것도 자신이 하고 싶어서고, 마왕이라고까지 불리게 만든 일들도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다.
하고 싶어서 하고, 하기 싫어서 안 한다. 아주 간단하고도 확실한 지크의 행동 양식이었다.
라일라가 뭐라고 하든 다시 마왕짓이 하고 싶다면 여기서 라일라의 손을 떼어놓으면 된다.
설령 그녀가 나중에 적으로 돌아설지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그게 지크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크는 그녀의 손을 떼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하게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콰아아아앙!
그들의 옆으로 빛의 참격이 지나갔다. 지크와 라일라의 얼굴이 일제히 참격이 날아온 곳으로 돌아갔다.
한스가 그들의 곁으로 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에스텔레이드가 깜박깜박 빛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두 분!”
죽고 죽이는 전장터에서 갑자기 둘이 대치 아닌 대치를 하니,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온 모양이었다.
지크는 한스를 쳐다봤다.
성검인 에스텔레이드를 들고 영웅을 꿈꾸는 자신의 종. 새삼 생각하지만 백작가에서 자신에게 건방지게 굴던 놈을 참 정성들여 키웠다.
‘만약 내가 다시 마왕으로 불리게 된다면 이 녀석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자신에게 덤비다가 자신의 손에 목이 달아날 가능성이 크다.
‘스녹도 그럴 거고.’
지크는 한스를 보고 스녹을 떠올린 후, 다시 라일라를 쳐다봤다.
“…안 돼.”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변하지 마.”
변한다기보다는 돌아간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하지만 지크 자신처럼 회귀가 아닌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변한다고 생각될 것이었다.
“…후우!”
다시 한숨을 쉰다. 하지만 지금의 한숨은 아까의 전장의 향기에 취해 내뱉은 한숨이 아니었다.
“오냐. 알았다. 당분간은 돌아… 변하지 않아 보마.”
그리고 휙휙 손을 젓는다. 뒤로 빠지라는 표현이었다.
“…정말이지?”
“아, 정말이라니까!”
지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라일라가 뭐라 하든 말든, 한스가 그에게 어떤 존재이든 말든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이다. 지크도 이런 자신이 신기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잖아. 지금은 라일라의 말을 들어주고 싶은 것뿐이니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한다. 넓은 범위에서 지크는 바뀌지 않았다.
“후읍!”
지크는 크게 숨을 들이 쉬고 윈두르를 휘둘렀다. 다시 막대한 마력의 검기가 전면으로 쏘아져 철의 일족을 도륙했다.
별로 바뀐 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 지크는 방금 전과는 변해있었다.
얼굴에 즐기는 표정은 없고 전장의 향에 취한 움직임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전쟁을 끝내기 위해 다른 병사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스, 라일라를 후방으로 데리고 가!”
“네! 가시죠, 라일라 님.”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의 등을 한번 보고 후방으로 빠지려 했다.
콰아앙!
하지만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멘티스의 성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