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에고소드인가요?”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거의 확실하죠.”
예전 비올루윈에서 길을 안내해준 것도 그렇고, 이번에 문을 열어도 된다는 정보를 준 것도 그렇고, 이 녀석은 확실히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됐다.
‘모습을 바꾸는 것도 제 내킬 때만 하고 말이지.’
그걸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게도 고집 같은 것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대놓고 말을 걸 정도의 자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에 준 정보도 그런 느낌을 받게 한 정도다. 물론 확실한 느낌이었지만.
“화염이 우리를 덮칠 때 보호해준 것도 이 녀석입니다.”
다른 엘프들이 화염에 타죽는 순간에도 지크 일행은 무사했다.
엘프들은 윈두르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이 녀석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이 녀석의 단서에 대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크가 물었다. 하지만 로만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검에 대해선 알고 있는 바가 없어요.”
“그렇습니까.”
기대하던 대답이 돌아오진 않지만 지크는 그닥 아쉬워하지 않았다.
“일단 고대 제국, 클로원이라고 했었죠? 그것과 철의 일족, 그리고 다른 엘프들과의 관계는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 그 ‘힘’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죠.”
“우리도 잘은 몰라요.”
로만느가 말했다.
“그게 어떤 힘인지, 왜 클로원이 그 힘을 멘티스에 뒀는지도 말이에요. 클로원의 행동을 보자면 그 힘을 두기 위해서 멘티스를 점령했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거든요.”
“제가 본 것이 그 ‘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린 문 뒤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무와는 달랐죠. 나무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불꽃을 휘감은 나무가 정상적인 나무라고 할 순 없으니까요.”
“불꽃을 휘감은 나무라고요?”
“가지에 이파리처럼 붙어있던 것도 전부 불꽃이더군요.”
듣기만 해도 무척이나 특별한 나무가 틀림없었다.
로만느가 조금 고민하며 말했다.
“성을 불태운 건 문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었죠. 그걸 생각하면 그게 힘이 맞는 것 같네요.”
“그, 그러고 보니….”
레오나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주로 지크와 무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둘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분위기에 끼어드는 게 주눅드는지 그녀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우, 우리가 비올루윈의 무덤에서도 나무 하나를 봤었잖아. 혹시 그것도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가능성은 있지.”
지크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로만느의 눈빛에 지크는 입을 열었다.
“제가 윈두르를 찾은 유적에 대한 겁니다. 그곳에도 윈두르로 열 수 있는 문이 하나 있었죠.”
“어떤 곳이었나요?”
“거대한 공동묘지였습니다. 지금껏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아마도 클로원의 황실 무덤이 아닌가 생각되더군요.”
“대단한 발견을 하셨네요. 그런데 그곳에도 나무가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마치 공중을 향해 뿌리를 내리고 지면 아래로 자라나는 모습의 나무였죠. 레오나의 말에 따르면, 무녀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중에 비슷한 녀석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거 말이군요.”
로만느는 예전 생각을 떠올렸다.
“아마 옛날이야기일 거예요. 특별한 힘이 있는 다섯 나무들. 그중에는 거꾸로 자라나는 나무에 대해서도 있었죠. 응? 그럼 설마 저것도?”
불꽃에 휩싸인 나무. 누가 봐도 특별한 힘이 있는 나무다.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그 이야기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말입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전설상으로 그런 나무가 있다는 것만 내려오고 있으니까요. 저도 예전에 제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예요.”
‘대단한 정보는 얻지 못하나.’
하지만 그래도 다섯 개의 특별한 나무의 정보를 얻었다. 이제 이 정보에 뭔가 연관되는 것이 있는지 찾아봐야 했다.
“…얘기가 다른 쪽으로 새버렸군요. 철의 일족의 대책을 계속 이야기해보죠.”
지크가 말했다.
“만약 그 불의 나무가 클로원의 힘이 아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문 뒤에 힘이 있는 게 맞다면, 문을 연 녀석들은 확실하게 그 힘을 손에 넣었을 테니까요.”
“…얘기를 들어 보면 그다지 상황이 호전된 건 아닌 것 같군요.”
레트리가 심각하게 말했다. 그리고 지크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인질들을 구하기는 했지만 결국 철의 일족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문이 개방되어버렸으니까요. 철의 일족이 다른 일족들을 배신하게 한 힘입니다. 생각을 해보면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바로 그 힘을 사용할 순 없을 거예요.”
로만느가 끼어들었다.
“녀석이 봉인을 풀라고 윽박지르고 있을 때 몇 가지 정보를 캐냈었거든요. 봉인을 푼다 해도 바로 그 힘을 다루진 못할 거예요. 힘을 다룰 때도 일정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했었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정보를 알음알음 캐낸 모양이다.
“하지만 완전 무방비 상태도 아닐 거예요. 시간을 끌 방법 정도는 있다고 했으니.”
“한 마디로 우리는 지금 최대한 빠르게 병력을 모아 힘을 다루는 의식을 하기 전에 놈들을 쳐야 한다는 소리군요.”
“녀석이 말한 시간을 끄는 방법을 해결하면서 말이죠.”
사람들이 심각해졌다. 인질들이 무사히 빠져나와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던 일이, 파고들어 보니 오히려 악화된 것이다.
“바로 다른 일족에 사자를 보내야겠군요.”
레트리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 *
얼마 뒤, 철의 일족을 제외한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은 연합을 짜고 멘티스 앞에 모여들었다.
군사동원까지는 놀랄 만큼 빨랐다. 최대한 빠르게 멘티스를 함락해야 한다는 호수의 일족의 요청도 한 가지 이유이긴 했지만, 이미 왕과 왕비가 인질로 잡혔을 때 일찌감치 전쟁 준비에 들어간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멘티스를 공격하지 못했다.
오로지 다리 하나로만 이어져 있는 거대한 섬이란 지형적 조건은 방어자에게 압도적인 이점을 부여했다. 게다가 그 유일한 다리마저 불타 끊어져 있었다.
“개자식들! 멘티스의 다리를 끊어놓다니!”
엘프들의 과거 역사야 어쨌든 지금 멘티스는 푸올라를 열만큼 중요한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연히 엘프들을 분개했다.
“정말로 철의 일족이 작정을 했군요.”
드니엘이 말했다.
레오나의 가출 책임 및 인간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변방에 머무르던 드니엘도 이번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워 다시 왕실 호위대로 돌아가겠다면서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멘티스의 다리를 끊는다는 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철의 일족을 욕하고 있었다.
지크는 주변을 둘러 봤다.
엘프 연합군이 멘티스 앞 구역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하지만 역시 엘프인지라 인간과는 달랐다.
인간이라면 주변 나무들을 전부 제거한 후 목책과 야영지를 만들어 전투에 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말 그대로 숲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림에 본의 아니게 튄 물감처럼 어색하게 튀어나와 있는 건 지크 일행뿐이었다.
휘릭! 휘릭! 휘리리릭!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숲을 올렸다. 조용히 멘티스를 노려보던 엘프 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공격을 시작하겠군요.”
“사령관은 평원의 일족의 왕이라고 했죠?”
드니엘에게 지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상당히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지신 분이죠. 일족이 사는 숲이 인간의 세력권과 가까우니 말입니다. 사는 곳도 인간이 탐을 내는 평원이고 말이죠.”
아무래도 인간과의 전쟁으로 경험을 많이 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금 곤란하군요. 유일한 다리마저 끊겼으니 꼼짝없이 상륙전을 해야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만약 시간제한만 없었다면 섬에서 굶어죽게 하면 되는데 말이죠.”
많은 전쟁에서 무수한 병사들이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못하고 보급의 문제 때문에 죽어갔다. 그건 얼마나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았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멘티스에 틀어박혀있는 철의 일족이 아니라 연합군이었다.
“우리도 준비를 하도록 하죠.”
지크가 윈두르를 꺼내 들었다.
그는 히죽 웃었다. 엘프들끼리의 싸움에 끼는 건 처음이지만 아마 근본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친 긴장감 속에 선명한 선혈과 째지는 비명이 섞일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죽음의 향기.
정말로 오랜만에 전쟁다운 전쟁에 낄 수 있다.
‘아, 기대되는걸.’
그의 등을 라일라가 불안하게 쳐다봤다.
* * *
“출바알!”
사령관인 평원의 일족의 왕이 명령하자 엘프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프들은 급조된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렀다.
동원된 건 호수의 일족과 바다의 일족이었다. 호수와 바다의 근처에 사는 그들은 다른 일족보다 훨씬 물에 친숙했다.
거리가 있는지라 멘티스에서 바로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1진이 출발하자 바로 2진이 배에 올라탔다.
멘티스에 있는 철의 일족도 연합군을 발견했다.
그들은 화살을 메기고 슬금슬금 배들이 향하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연합군도 섣불리 멘티스에 접근하지 않았다.
처음 출발한 배들이 사정거리 바깥에서 계속 멘티스 주위를 맴도는 동안 호숫가에서는 계속해서 배가 출발했다.
전부 주변 나무들을 베어내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낸 배들이었지만 호숫가에서 멘티스까지 가는 데에는 그리 좋은 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기 좋게 숫자가 많은 게 중요했다.
호수를 돌아다니는 배가 점점 많아졌다. 그에 따라 양 진영의 긴장감도 높아져갔다.
쿠웅!
호숫가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신호였다. 호수를 선회하던 배들이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멘티스로 향했다.
긴장감이 폭증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화살을 겨눴다. 배들은 계속해서 멘티스로 향했다.
서로가 서로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쏴라!”
양 진영에서 동시에 화살이 쏘아졌다.
퍽!
콰직!
“크악!”
“아악!”
화살에 맞아 사상자가 속출했다. 강력한 엘프의 활이다. 연약한 육신만으로는 그 화살을 버티지 못 한다.
첨벙!
첨벙!
멘티스로 향하던 배에서 엘프들이 호수로 떨어졌다. 엘프들의 붉은 피가 푸른 호수에 점점이 퍼지기 시작했다.
“커억!”
“켁!”
하지만 피해가 나는 건 연합군만이 아니었다. 철의 일족도 확실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몸 곳곳에 화살을 맞은 엘프들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나마 엄폐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는 멘티스와 엄폐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배라는 차이 때문에 피해는 아무래도 연합군 쪽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희생이 많이 나더라도 배들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선두의 배들과 멘티스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후웅! 후웅!
이제는 마법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콰앙!
“으악!”
“아아악!”
불덩이 하나에 정통으로 명중한 배가 산산조각났다. 배 위에 타고 있던 엘프들이 호수로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마법은 배들에게만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멘티스에도 마법이 떨어져 내려 철의 일족의 피해를 강요했다.
누가 더 상대를 많이 죽이는지 내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세력은 계속해서 상대를 죽여갔다.
그게 바로 전쟁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멘티스라는 방어 이점을 가진 철의 일족이 더 유리해보였다.
연합군 쪽의 병력이 훨씬 더 많지만 계속 이렇게 싸우다가는 최후의 승자는 철의 일족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연합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퍼어엉!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곳과는 조금 떨어진, 멘티스의 중앙부의 지면이 터지듯 솟아올랐다. 그리고 구멍 하나가 생겼다.
주변을 열심히 내달리고 있던 철의 일족 병사 한 명이 그 구멍을 발견했다. 그가 구멍을 확인하기 위해 접근했을 때였다.
서걱!
구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이 그 엘프의 목을 날렸다. 힘없이 스러지는 병사의 몸을 잡아 제끼며 지크가 올라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