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고대 제국. 지크는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존재에 대한 해답이 지금 나올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고대 제국과 로만느가 말하려는 고대 제국이 동일 존재인지는 얘기를 더 들어봐야겠지만.
“얼추 아시는 것 같네요.”
“레오나에게 들었습니다. 무척이나 강대한 인간들의 제국이 있었다고.”
“그렇군요. 엘프들에게는 전설로 알음알음 내려오긴 하지만 레오나에겐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를 해주긴 했죠. 그 아이는 다음 무녀가 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레오나가 무녀인가.’
활발을 넘어서 천방지축인 레오나의 지금 이미지를 보면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크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 무녀란 사람도 온갖 쌍욕을 해대는 판에 천방지축 무녀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지.’
그리고 아무리 레오나라도 평생을 저런 천방지축으로 남진 않을 것이다.
로만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제국, 클로원은 정말로 엄청난 나라였다고 해요. 대대로 배출된 능력 있는 황제를 중심으로 철통 같은 세력을 구축했죠. 하지만 우리 엘프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강대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제국. 우리와 엮일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엮였군요.”
“그래요.”
로만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우리 일족의 이름을 전부 아나요?”
“네, 들었습니다.”
“철의 일족을 제외한 일족의 이름은 전부 그 일족이 사는 지형에서 따온 거예요. 호수의 일족인 우리는 당연히 호수에 살고 있고요.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말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 로만느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내뱉었다.
“사실 우리 일족이 살던 곳은 이곳이 아니에요.”
“네?”
“예?”
레트리와 시디아가 놀라 물었다. 드로니안과 레오나도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잠깐. 호수의 일족?’
지크의 머리가 움직였다. 엘프 일족은 사는 곳의 지형에 따라 이름을 정한다. 당연히 호수의 일족은 호수 옆에 살 것이다.
그러나 로만느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호수의 일족이 원래 사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이름을 바꾼 것일까.
‘그런데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지크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바다라고 착각했을 거대한 호수였다.
“혹시 호수의 일족이 살던 곳이 멘티스입니까?”
로만느가 눈을 크게 떴다.
“굉장하네요. 고작 그 정도 정보로 생각이 거기까지 닿나요?”
“어머니, 그게 사실입니까?”
레트리가 다급하게 묻는다. 왕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비사에 그도 당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맞아. 하지만 그렇게 당혹해하지 마렴.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니까. 우리의 터전은 이 드라우드 수림이란다.”
아들을 달래고 로만느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멘티스에 살고 있던 우리에게 갑자기 클로윈의 군대가 들이닥쳤죠. 아드로원 대수림은 그때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그 정도는 우습다는 듯 대수림을 뚫고 멘티스에 쳐들어왔어요. 그리고 요구했죠. 멘티스를 비우라고.”
“싸움이 있었겠군요.”
“아뇨, 그건 싸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해요. 당시 클로원의 군대는 정말로 신이나 악마의 첨병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압도적으로 강했다고 하거든요. 당연히 승리자는 클로원이었어요. 정말로 놀랄 일은, 클로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호수의 일족의 피해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건 놀랍군요.”
호수의 일족이 싸움을 포기하진 않았을 거다. 적, 그것도 종족이 다른 인간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필사적으로 반항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호수의 일족의 피해가 적었다는 건, 그 클로원이란 제국이 상대의 피해조차 억제할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한 집단이었단 뜻이겠지.’
정말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엘프의 홈그라운드인 숲, 그것도 호수의 일족의 수도에서 적의 피해를 억누르며 제압할 수 있다니.
“우리 일족을 제압하긴 했지만 클로원은 우리 호수의 일족 자체에는 데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들이 원하는 건 멘티스뿐이었으니까요. 그들은 멘티스에 있는 대부분의 나무를 베어내고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완성된 모습이 지금의 멘티스의 모습이랍니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비사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멘티스를 필요로 한 이유를 처음엔 몰랐어요. 하지만 그들이 멘티스에 지은 성 아래에 어떤 힘을 들여놨다는 소문이 퍼졌죠.”
“그 힘이 우리가 본 그것이겠군요.”
지크가 불꽃의 나무를 떠올렸다.
“맞아요. 클로원은 그 힘을 성 아래에 두고 멘티스를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제국이라도 아드로원 대수림 안에 있는 멘티스를 직접 관리하는 건 힘들었던가 봐요. 그들은 엘프 일족 하나를 지배하에 두고 멘티스를 맡겼죠.”
“그게 철의 일족이군요.”
로만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들의 이름은 철의 일족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이름은 전해져 오지 않아요. 그들이 클로원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 인간들의 갑옷과 무기를 들고 멘티스를 관리하자 다른 엘프들은 그들을 철의 일족이라고 불렀고, 그들도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바꿨죠.”
“르누가 인간들의 지배에 상당히 진저리를 치고 있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때의 일 때문이겠죠?”
“그럴 확률이 높죠. 아무튼 그들은 멘티스와 그 주변을 자신들의 땅으로 삼았고 우리는 밀려서 이 수림까지 와서 새로 나라를 세웠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렀어요. 클로원은 멘티스를 빼앗은 후 다른 엘프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철의 일족도 멘티스를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만큼 세력을 확장하지 않았고요. 뭐, 그래도 다른 일족들과 갈등은 많았던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침략자인 인간의 아래에서 일하게 된 그들과 다른 일족들과의 관계가 좋을 순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영원하진 않았어요. 그 강대하던 제국, 클로원도 결국은 멸망의 때가 온 거예요.”
오로지 클로원의 세력에 기대 아드로원 대수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철의 일족이다.
그리고 주변은 전부 그들의 적대적인 엘프 일족. 당연히 철의 일족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협상을 했어요. 철의 일족이 꼴 보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피를 보기는 더 싫었죠.”
그러나 협상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툭 하면 거칠어졌고 언제나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으며 시일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그러나 누구도 피를 보고 싶진 않았기에, 결국 협상은 맺어졌다.
“철의 일족은 멘티스를 비우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하지만 우리도 멘티스로 돌아가진 않았어요. 이미 이 드라우드 수림에 사는 게 익숙해진 데다가 클로원이 자기네식대로 바꾸어 놓은 그 도시는 우리 엘프들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으니까요.”
지크는 멘티스에 가득 들어섰던 석조 건물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멘티스는 중립 지역으로 만들었죠. 성 아래에 있는, 힘으로 통하는 벽도 봉인했고요. 대신 그 성에 있는 보물인 호수의 눈물은 우리가 관리하기로 했어요.”
“호수의 눈물도 제국의 것이었습니까?”
“맞아요. 막대한 정화의 힘과 물의 마력을 가진 보물. 그리고 추측하기로 성 아래에 있는 힘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거라 생각됐죠. 무녀라는 직책이 호수의 일족에게만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호수의 눈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죠.”
“…죄송하지만 어머니. 저는 전부 처음 듣는 일입니다만.”
피곤한 듯 레트리가 눈을 꾹꾹 누르며 말한다. 일족의 왕도 모르는 무거운 진실이 무녀인 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이건 무녀에게서 무녀에게로만 이어져 온 정보니까.”
“그래도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수천, 수만 년 전의 일을 말이니?”
레트리는 입을 닫았다.
“다른 종족보다 훨씬 오래 사는 우리 엘프의 시간으로도 오랜 시간이다. 철의 일족이 이 같은 사건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사건이고. 우리 무녀야 호수의 눈물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이니 계속해서 구전을 이어받았을 뿐이지.”
로만느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철의 일족도 계속해서 그 사건을 전하고 있을지는 몰랐구나.”
“아마도 그들은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겁니다. 성 아래의 힘을 탈취할 기회를 말이죠.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집요하게 그 일을 알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로만느가 지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일을 일으킨 걸까요. 그들이 제국의 힘을 빼앗을 작정이었다면 기회는 계속 있었을 텐데요.”
“그건 저도 의문이에요. 저들이 왜 갑자기 행동에 나섰는지.”
“…호, 혹시….”
지크와 로만느의 의문에 마치 죄를 지은 마냥 레오나가 손을 들었다.
“내, 내가 호수의 눈물을 훔쳐서 그런 게 아닐까? 그, 호수의 눈물이 그 힘을 제어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
레오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로만느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단다. 아니, 오히려 아닐 가능성이 커. 호수의 눈물이 사라졌을 때와 녀석들이 행동을 일으켰을 때까지의 기간이 너무 길어.”
“게다가 부추긴 녀석들도 있으니까요. 그놈들이 원인일 겁니다.”
회귀 전 철의 일족이 아드로원 대수림의 엘프들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 고대 제국의 힘이란 것에 대한 소문은 없었다.
‘그냥 로브 입은 놈들의 지원을 받아 다른 엘프의 일족들을 지배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자그마치 로브 입은 놈들을 배신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추구하고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짓을 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엘프들이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는 그들에게 로브를 입은 놈들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르누를 속여 철의 일족이 그들과 동맹관계였다는 걸 알아냈다는 것도.
“설마 그런 놈들이 있을 줄이야.”
레트리가 중얼거렸다. 로만느도 심각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놈들의 동맹은 끊겼습니다. 적어도 그 로브 놈들이 철의 일족을 지원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하지만 방심을 하면 안 되겠죠.”
“그렇죠.”
“제가 해드릴 이야기는 대부분 끝났네요. 그럼 이제 제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일단 지금 묻고 싶은 건 그거예요.”
로만느가 손가락을 들어 지크가 옆에 세워놓은 것을 가리켰다.
윈두르였다. 엘프 일족의 왕가를 만나러 오는 자리이니만큼 당연히 무기를 갖고 오는 건 실례였지만 이번엔 로만느가 직접 가져와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그건 뭐죠?”
로만느가 물었다.
“분명 그 검을 성의 지하에 있는 방을 열 때 사용했었죠?”
“맞습니다.”
“그 검, 클로원과 연관이 있나요?”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그렇습니다. 저도 우연히 주웠거든요.”
지크는 검을 쥐어 세웠다. 특유의 나뭇가지 같은 검신이 사람들의 눈동자에 박혔다.
“하지만 그 고대 제국, 클로원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이 녀석을 주운 곳이 클로원의 다른 유적이라고 생각되는 곳이니까요.”
로만느가 탄성을 내뱉었다.
“당신은 방을 열 때 어떤 일이 생길지 누군가 가르쳐줬다고 했어요. 혹시 그 누군가가….”
“무녀님도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네요.”
지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녀석이 가르쳐줬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