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05화 (205/628)

제205화

“힘?”

“네, 힘. 철의 일족의 왕이, 아무리 여러분들을 잡아 놓았다고는 해도 다른 일족 전체와 전쟁을 각오하게 만들어준 힘 말이죠.”

엘프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몇몇은 불타는 성에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혹시 저 성을 태우고 있는 불꽃이….”

“맞습니다. 그 힘이 발현된 겁니다.”

저 거대한 성을 일순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힘이라니. 위협적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아무래도 숲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엘프로서는 불에 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철의 일족의 왕이 살아있을까? 솔직히 난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신기한데.”

라일라가 의문을 표했다.

문이 열리며 튀어나온 거대한 화염은 라일라에게 일순간 죽음의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만약 지크가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죽었을 거라고 라일라는 확신했다.

‘솔직히 우리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어.’

덮쳐오는 화염에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었다.

하지만 곧 느껴지리라 생각했던 거센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만이 느껴졌다.

이윽고 느껴지는 부유감.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지크가 그녀와 로만느를 안고 지하 계단을 내달리고 있었다.

주변을 휩쓰는 화염은 자신들 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크가 달려가는 쪽으로 길을 내주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은 적이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특별 취급은 딱 그들뿐이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불에 타 몸부림치는 엘프들 천지였다. 그 모습은 성을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됐다.

따라서 문 근처에서 화염에 정통으로 맞았을 르누의 생존은 무척 미심쩍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녀의 의문에 단호히 대답했다.

“살아있어.”

지하를 빠져나오기 전, 지크는 르누가 있는 쪽을 확인했다.

지크와 비슷하게 화염은 그를 직격하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도 화염을 막는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멀쩡하진 않을 거야. 화염이 ‘장난’을 치는 것 같긴 했거든.”

지크의 웃음을 보면서 라일라는 깨달았다. 르누가 살아있다 해도 결코 좋은 몰골로 살아있진 못 할 것이란 걸.

* * *

르누는 정신을 차렸다. 사고가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짙게 안개 낀 숲속을 헤매는 것 같다.

옆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드셨다!”

“치료사를 더 데리고 와!”

자신의 주위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 부하들이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에서는 언제나 침착하고 교양 있게 행동하라고 했건만.

물론 본인은 그런 교양 있는 행동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남에게는 엄격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충분히 관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불호령을 내려야겠다. 르누는 인상을 쓰고 큰 소리를 내려 했다.

“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불호령이 아닌, 째지는 비명이었다.

“아악! 아아아악!”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온몸에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고, 그럴수록 더욱 큰 고통이 느껴졌다.

악순환의 역속이었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

“치료사는 뭘 하고 있는 거야!”

“포션! 일단 포션을 뿌려!”

병사들이 르누에게 포션을 뿌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시원함이 느껴지면서 몸을 불태우는 것 같은 고통이 좀 사그라들었다.

“허억! 허억!”

르누는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끔찍한 고통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고 싶은 고통이었다.

‘…물.’

목이 탔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부하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켄디스도 있었다.

하지만 르누는 그것보다 물이 먼저였다.

다행히 바로 옆에 커다란 대야에 담긴 물이 보였다.

르누는 조용히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부하가 급히 대야를 가져왔다.

르누는 대야를 받아 얼굴을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설마 그 물을 먹을 거라고 생각 못 한 주변이 경악에 질린 신음 소리를 냈지만 르누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갈증을 해소하는 게 먼저였다.

“푸핫!”

그가 대야에서 얼굴을 들었다. 물에 잠겼던 앞머리가 휘날리며 주변에 물방울을 뿌렸다.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르누는 점점 정상적인 사고를 찾아갔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자신은 침입자와 대적하고 있었다. 건방지고 짜증나고 열 받는 놈.

‘분명히 그놈이 문을… 열었지….’

그리고 그 문에서 커다란 불꽃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지하실을 뒤덮고 부하들을 태우고… 자신을 덮쳤다.

“헉!”

르누는 급히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 이후 느낀 고통은 정말로 떠올리기도 싫었다. 산 채로 온몸이 타들어가는 기분은 정말로 더러웠다.

‘잠깐.’

한 가지 싫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문에서 뻗어 나온 화염은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한데, 그것에 휩싸인 자신이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을까?

아니, 과연 자신이 멀쩡한 것일까.

방금 전 깨어났을 때의 고통이 떠올랐다.

르누는 들고 있는 대야를 내려다봤다. 얼굴에 남은 물기가 대야 안으로 뚝뚝 떨어져 잔잔한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비추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추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이게…이게 뭐야아아아아아!”

검고 흘러내리고 짓눌리고 엉겨붙었다. 엘프 특유의, 남성임에도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미형이었던 그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건 그가 그토록 원하던 힘에 처절하게 농락당한, 끔찍한 얼굴과 몸뿐이었다.

* * *

인질로 잡혀있던 엘프들은 일단 철수했다. 서로의 나라로 돌아가 일족을 안정시키고 연합군을 꾸려 철의 일족을 상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크 일행도 호수의 일족을 따라 드라우드 수림으로 돌아갔다.

드로니안과 레오나는 가족의 귀환을 뛸 듯이 기뻐했다. 특히 레오나는 어머니인 시디아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그렇게 재회가 끝났다. 도착한 시간대가 상당히 늦은 때였기에 앞으로의 구체적인 일에 대한 회의는 다음날로 미뤄졌다.

단,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병력을 구성해야 했기에 레트리는 조금 늦게까지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드로니안이 그런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일족의 일과 관련이 없는 지크 일행은 일찍이 자신들에게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레오나는 없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방으로 돌아온 지크 일행이지만 그들도 바로 잠들지는 않았다. 이번 전투에서 얻은 정보들을 서로 교환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겪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스와 스녹이 지크에게 보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크가 아예 얘기를 해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정보를 엮어 쓸 만한 새로운 정보를 도출해내게 하는 것도 지크가 그들에게 시키는 훈련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끊임없이 농담 따먹기를 해가며 즐기는 분위기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지크도 큰 소리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하!”

배꼽이 떨어져나가라 지크는 배를 잡고 눈물까지 쥐어짜며 웃었다. 그에 비해 라일라는 한스에게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그러니까 그놈이 화를 냈다고?”

“네.”

한스는 멘티스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설명은 한창 전투를 할 때를 지나 갑옷이 인간이 아닌 인형들이었다는 것을 들키고 후퇴를 하기 위해 갑옷을 회수할 때에 다다랐다.

한스가 켄디스와 한 대화를 대충 요약해 말했을 때 지크가 관심을 보였다.

한스는 당시의 상황과 그 때의 대화를 다시 상세하게 말해줬다. 전부 기억할 순 없었지만 대략적인 대화의 흐름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온 상황이 이것이다.

“아무래도 전장에서 사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봐요. 아니면 그 엘프 인성이 좀 안 좋거나.”

지크가 더 크게 웃었다. 등을 크게 젖히고 웃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쿵!’ 소리가 났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아예 바닥을 구르며 웃어댔다.

“웃지 마! 너 때문에 애가 이상하게 됐잖아!”

라일라가 지크를 타박한다. 하지만 지크는 여전히 웃었다. 호흡곤란까지 올 정도로 꺽꺽댔다.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아니,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읍! 읍!”

의자를 다시 세우며 부추기는 지크의 입을 라일라가 막았다.

“네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네 행동은 상대가 도발하기 딱 좋은 행동이었어.”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라일라는 한스에게 그의 말이 어떤 뜻으로 전달이 됐을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종종 옆에서 지크가 낄낄거리며 한 마디씩 끼어들며 훼방을 놓았지만 그 때마다 지크의 정강이를 걷어 차 입을 막았다.

“그렇네요. 새삼 생각해보면 확실히 도발하는 멘트였어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죄책감 갖지 마. 내가 보기엔 원인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하나뿐이니까.”

라일라가 지크를 째려봤다. 지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라일라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체리 하나를 잡아 던졌다.

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체리를 지크는 별 어려움 없이 덥석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과육을 씹어 넘기고는 씨를 툭 뱉어냈다. 그리고 능글능글 웃었다.

결국 라일라는 다시 한번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쨌든, 앞으로는 조심하자. 나쁜 물이 들었다고 해도 충분히 고칠 수 있으니까. 한스 너는 영웅이 되고 싶잖아? 그럼 어투도 조금은 조심해야 된다고 봐. 교양 있는 말투를 사용하라고까지는 안 하지만 욕설이나 빈정거림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원래 능력 있고 성과만 있으면 모르는 놈들은 인성이 어떻든 절로 영웅이라고 띄워 주….”

“너는 입 좀 다물어!”

투닥이는 지크와 라일라를 보며 한스는 말을 할 때 조금 조심하자는 생각을 했다.

* * *

다음 날.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지크 일행은 레트리에게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안내원의 안내를 따라 어떤 방으로 향했다.

방에는 호수의 일족의 왕가 사람이 전부 모여 있었다. 왕인 레트리와 왕비인 시디아, 무녀인 로만느, 왕세자인 드로니안과 공주인 레오나.

“아, 왔구나!”

레오나가 벌떡 일어서 지크 일행을 반겼다. 드로니안이 레오나의 가벼운 행동을 한숨 쉬고 바라봤지만 제지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지크 일행도 방 안에 준비된 의자에 전부 앉았다.

“일단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트리가 예를 표했다. 다른 왕가의 인물들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철부지처럼 웃고 있던 레오나도 진지하게 예를 표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설마 철부지 딸이 가출해서 여러분 같은 분들을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온 레트리의 말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두 번 다시 가출은 안 된다.”

“…네.”

인간, 엘프를 가리지 않고 주눅 든 레오나의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분위기를 정리하고 로만느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이번 일에 대한 정보 교환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예상했던 일인지라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알고 있는 사실부터 알려드리죠. 단, 저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무녀에게서 무녀에게로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졌고, 엘프인 우리로서도 굉장히 오래된 일이라 누락된 사실도 많죠. 그 점을 감안하여 들어주세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옛날에 인간들의 고대 제국이 있었습니다. 그 제국의 이름은 ‘클로원’. 정말로 강성한 세력을 가진 국가였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