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방금 전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한스가 한 말은 누가 봐도 도발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압도적인 무위를 보였다지만 그렇다고 분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도 한스가 속속 갑옷들을 수납하고 있는 터라 상대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도 바로 보였다.
숫자는 힘이자 폭력이다. 게다가 자신들 쪽에도 많은 강자들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상대가 대단한 강자라고 해도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연히 엘프들은 참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표는 당연히 말이 걸린 켄디스였다.
“뭔가… 화낼 만한 일이 었었냐고? 이토록 우리를 우롱하고 대적했으면서 그딴 말이 나오느냐!”
“아…!”
뭔가를 깨달은 듯 한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지크 님의 말과 행동은 대부분 상대를 도발시키기 위한 거지.’
그것도 상대의 흥분을 이끌어내 빈틈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상대를 약 올려 자신의 기쁨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지크를 굉장히 존경하는 한스였지만 역시 그런 성격까지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의 말도 지크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했을 뿐, 도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목숨을 빼앗는 건 서로의 사정상 어쩔 수 없지만 거기서 모욕까지 섞는 건 좀 그렇지.’
“미안, 잠시 말이 잘못 나왔어.”
한스는 순순히 사과를 했다.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생각해보면 너희들이 조용해진 건 이유는 명백한데 말이야. 내가 한 공격에 겁을 먹어서잖아?”
“…뭐?”
한스의 말이 맞다. 그의 찬란하고도 위력적인 공격에 경악하고 겁을 먹었다. 하지만 도발 멘트를 날린 뒤 하는 그 따위 말을 사과랍시고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더한 도발로 받아들일 뿐.
“내가 잘못했어. 고작해야 그 한 방으로 철의 일족의 정예라는 너희들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거든. 그것도 주요 전력은 나 혼자라는 게 밝혀진 지금에서까지 말이야. 너희들의 능력을 잘못 판단한 내 잘못이야. 정말로 사과할게.”
에스텔레이드를 수납하고 깊게 고개를 숙인다. 누가 봐도 정중하고 예의바른 사과다. 아무리 엘프의 관습이 인간과 다르다고 해도 저 행동의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엘프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더 커졌다.
보통 말과 맞지 않는 행동이나 극도로 예를 갖춘 행동은 빈정거림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철의 일족이 본 한스의 행동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스는 지금 진심으로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켄디스의 노호성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사과를 했는데도 화를 내는 거야?”
이 때 한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억울해보였다. 그 표정은 엘프들의 복장을 뒤집어엎기에 무척이나 충분했다.
“철의 일족이 폭급하고 성질이 더럽다는 호수의 일족 전하의 얘기는 정말이었구나. 상대가 적이라고 그냥 깎아내리는 게 아니었어.”
이번 말은 그저 혼자서 하는 중얼거림이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스에게 온통 집중하고 있는 귀 밝은 엘프들이 그 말을 듣지 못 할 리 없었다.
“아, 아냐, 한스.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적이니까 그런 것뿐이야.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한 흥분 상태니까 내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뿐일 거야. 이성과 감성은 다른 법이니까.”
그렇게 또 한 번 중얼거린 한스가 철의 일족을 보며 미소지었다. 무척이나 자애롭고 선량한 미소.
설마 그런 미소가 자신들의 분노와 짜증을 극한까지 올릴 줄은 상상도 못 한 철의 일족의 엘프들이었다.
“그래, 이해해. 너희들은 아직 내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 하겠지. 하지만 기억해 줘. 나는 정말로 진심을 다해 사과를 한 거야.”
이젠 마치 고향집 어머니처럼 전부 이해한다는 표정을 한 한스를 보며 켄디스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 끊어졌다.
“죽…!”
그가 처단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뒤편에서 커다란 폭발 소리가 들렸다.
쿠르르릉!
어찌나 강한 폭발인지 멘티스 자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몇몇 병사들이 균형을 잃으며 넘어졌다.
하지만 켄디스는 병사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건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넘어진 엘프조차도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먼저 바라봤다.
그들, 철의 일족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인 왕이 머무는 거처. 멘티스의 성이 거센 불덩이에 휩싸여 있었다.
모든 창과 문에서 계속 새어나오고 있는 불꽃은 어둠을 오히려 자신의 무대로 삼아 화려한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전하….”
간신히 켄디스가 입을 뗐다. 하지만 얼어붙어 있던 것도 잠시였다.
“당장 성으로 간다!”
그가 급히 성 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병력들도 일제히 그를 따랐다.
그 누구도 한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보다는 르누의 생사가 더욱 중요했다. 게다가 성에는 그들이 얻어야 할 힘도 있지 않은가.
눈앞의 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한스는 딱히 그들을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끝났고, 이제는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후퇴하는 적들을 굳이 추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마저 남은 갑옷들을 회수하고 땅을 툭툭 두드렸다.
후드득!
그의 옆에 흙무더기가 솟더니 스녹이 나왔다.
“지하에서 라일라 씨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아니었나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지크 님도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으면 가도 좋다고 했잖아.”
“그러시긴 했죠.”
스녹은 저 멀리 불타는 성을 쳐다봤다. 지하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그 불길은 화려했다.
물론 피해 당사자에게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혓바닥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지크 님이 하신 거겠죠?”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성의 불꽃에 대한 의문은 그게 끝이었다. 둘 다 지크가 무사할까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은 반드시 멀쩡한 얼굴로 나타날 테니까.
그들의 믿음은 얼마 안 가 증명됐다.
“내가 말했지? 아직 안 갔을 거라고.”
한스와 스녹의 옆으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라일라와 로만느를 양 손으로 안아 든 지크였다.
* * *
호수의 기슭.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멘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멘티스의 성에 난 화재는 그 곳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그만큼 거대한 화재였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둠을 꿰뚫고 총 다섯 명의 인원이 숲에 내려앉았다.
라일라의 공간 이동으로 멘티스를 탈출한 지크 일행이었다.
“…세상에. 정말 공간 이동했어.”
로만느가 놀라운 얼굴로 라일라를 쳐다봤다.
공간 이동만 따지면 그 정도까지 놀랄 일은 아니다.
인간, 그것도 무척 젊어 보이는 라일라가 공간 이동을 했다는 것에 놀랄 수는 있지만, 인간보다 수명이 길고 마법 친화적 생물인 엘프 중에는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자신을 포함해 사람 한둘 정도를 이동시킬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증가하면 당연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짧아진다.
하지만 라일라는 다섯이란 숫자를 한 번에 이동시켰다. 그것도 멘티스와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호수 기슭으로.
‘절대 평범한 마법사가 아냐.’
아니, 라일라라고 자기를 소개한 여자만이 아니다.
한스라 소개한 남자는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검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실력도 상당할 것이다. 스녹이란 자는 자그마치 대지의 환수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크란 사람.’
성 아래에서 말 그대로 철의 일족을 농락한 자. 게다가 행동을 보면 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희귀하고 강대한 파티의 리더가 틀림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지?’
이름만 주고받았을 뿐, 아직 서로 정식적으로 자기소개를 하진 않았다. 그는 탈출이 먼저라고 했고 로만느도 동의했다.
단, 그는 자신을 레오나의 친구라고 했었다.
‘이 철없는 손녀는 대체 어디서 이런 친구를….’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것과 손녀의 친구라는 소개는 로만느가 지크에게 상당한 신뢰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기 있네.”
라일라가 손을 뻗은 곳에는 먼저 구출된 인질들이 각 일족의 병력에게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이미 멘티스 근처에 숨어 있는 병력들이 어디 있는지 지크가 전부 알고 있었기에 라일라가 인질들을 병사들에게 인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구출된 왕들은 병력이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뭉쳐 있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병력을 한곳으로 모은 후, 아직 구출되지 않은 무녀를 기다리며 멘티스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지크 일행을 발견한 것 같았다.
“어머니!”
“어머니!”
당장 레트리와 시디아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로만느를 꽉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지크가 만류했다.
“지금 로만느 님에게 그다지 충격을 주지 않는 게 좋습니다. 피를 많이 흘리셨거든요.”
“피?”
레트리는 로만느의 얼굴을 살폈다. 안력을 돋우자 그녀의 창백한 피부가 보였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입고 있는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괘, 괜찮으신…!”
“됐다.”
기겁을 하는 아들을 밀쳐내고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며느리를 격려하며 그녀는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다른 일족의 왕과 왕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모두 꾀죄죄하고 초췌해 보였지만 모진 고초를 겪은 것 같진 않았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시군요.”
“그렇습니다, 무녀님. 그저 가둬두기만 할 뿐, 별다른 해코지는 당하지 않았거든요. 무녀님은 조금 다르신 것 같습니다만.”
산의 일족의 왕이 로만느의 옷에 묻은 피와 창백한 혈색을 보고 말했다. 다른 왕들과 왕비들도 걱정 섞인 말을 한 마디씩 던졌다.
로만느는 상냥하게 웃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보시는 대로 무사히 구해졌으니까요. 상처도 남지 않았고요. 조금 휴식을 취한다면 평소처럼 돌아갈 겁니다.”
걱정하는 이들을 진정시키는 로만느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냥한 무녀 그 자체였다.
그녀가 르누에게 한 온갖 모욕과 욕설을 기억하는 라일라는 그녀의 모습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크는 신경쓰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대응이 다른 사람은 많다. 게다가 욕설을 날린 상대가 적이지 않던가.
‘적에게는 뭘 하든 용서되지.’
아마도 그건 회귀 전과 가장 바뀌지 않은 지크의 사고일 것이다.
다른 일족의 왕, 왕비들과 대화를 나눈 로만느는 자신의 아들인 레티스의 곁에 섰다.
“이젠 어떻게 할 겁니까.”
바다의 일족의 왕이 질문을 던졌다. 산의 일족의 여왕이 눈을 끔벅였다.
“어떻게 하다뇨? 일단 돌아가서 군세를 이끌고 와 저 녀석들을 짓밟아야 하지 않나요?”
“굳이 지금 돌아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있는 병력만으로도 멘티스는 충분히 점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저 녀석들이 방어하기 좋은 이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저 꼴을 보세요. 아마 방어에만 집중할 수도 없을 겁니다.”
평원의 일족의 왕이 활활 타오르는 멘티스의 성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그는 당장 원수를 갚길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산의 일족의 왕이 반대를 표했다.
“아무리 적들이 혼란한 상태일 수 있다지만 멘티스의 이점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병력도 그리 훌륭하진 않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적들의 동향을 살피고 혹 기회가 된다면 바로 인질 구출 임무를 실행해야 하는 터라 이곳에 파견된 병력은 대부분 척후나 잠입이 특기인 자들이었다.
정면에서 맞붙는 전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좁은 다리를 통해 공격을 해야 할 판이라면 더욱 그랬다.
평원의 일족의 왕도 그 점은 동의하는지 침음을 흘리며 반박하지 않았다.
“…일단 물러나도록 합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병력을 정비해 철의 일족을 치도록 합시다.”
레트리의 말에 엘프들이 하나하나 동의했고 평원의 일족의 왕도 동의했다.
그때 지크가 끼어들었다.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공격을 하려면 최대한 빨리 하셔야 할 겁니다.”
“음?”
“철의 일족이 노리던 힘이 깨어났습니다.”
도망치던 순간 지크는 문 안을 볼 기회가 있었다.
거대한 화염 속에서 그건 우뚝 서 있었다.
선명한 주홍 불빛을 휘감고 생명력 넘치는 녹색 잎들이 아닌, 붉은 불꽃의 이파리들을 가득 품은 커다란 나무.
분명 그것이 철의 일족이 노리던 힘의 정체일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