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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03화 (203/628)

제203화

가증스럽고 뻔뻔하다. 르누의 입장에서 지크는 당연히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를 겪으면 겪을수록 이미지는 최하의 최하를 거듭했다.

“…설마 모든 인간이 너 같은 놈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나처럼 머리 좋고 친절하고 핸섬한데다가 유머 감각까지 갖춘 인재는 인간이 아니라 모든 종족을 통틀어도 얼마 없다고.”

뒤에서 라일라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크는 무시했다. 지금 그녀와의 심미안적 견해 차이에 대해 토론할 시간은 없었다.

“뭐, 좋다.”

르누가 말했다. 더 이상 지크와 말싸움하는 것도 지친 걸까.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엔 모종의 허탈함마저 섞여 있었다.

“네놈의 정신상태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으마.”

더 이상 신경썼다간 수명이 백 년 단위로 깎여 나갈 것 같았다.

“어쨌든 날 공격했다는 건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로 받아들이겠다. 아, 됐어. 더 이상 네놈의 말은 듣지 않는다.”

지크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르누는 그의 말을 막았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너희들은 여기서 그냥 죽어라.”

르누가 손가락으로 지크 일행을 가리켰다. 살기를 뿜고 있던 병력이 지크 일행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저놈을 욕하며 맞장구를 친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은 있겠죠?”

로만느가 물었다. 갑자기 지크가 르누에게 날라차기를 할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게다가 그 결과는 탈출이 더 어려워졌다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그녀로서는 충분히 의문을 표할 만했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건 라일라였다.

“걱정 마세요. 이 녀석,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웬만한 건 다 생각을 하고 움직이니까요.”

“응? 그랬어?”

라일라의 말에 왜 지크 본인이 의문을 표하는 걸까. 로만느의 식은 눈빛을 받은 라일라가 지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뭐,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온 건 아니야.”

지크가 뒤에 있는 벽을 두드렸다.

“이 너머에 있는 게 뭔지 보고 싶었거든.”

“무슨 소린가 했더니….”

르누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건 특수한 열쇠가 없으면 열리지 않는다. 아니, 무엇보다 열어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가능성이 높지. 이건 전부 나와 무녀가 나눈 얘기로 알 수 있는 정보 아니었나? 짜증 나는 놈이긴 해도 능력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더니 마지막에 이해할 수 없는 헛발질을 하는군.”

“뭐야, 내 말은 듣지 않는 것 아니었어? 왕이라는 놈이 말을 내뱉자마자 제 말을 뒤집어버리네? 닭대가리라도 그 정도 기억력은 있을 텐데. 아, 그 말은 너무 모욕적인가? 닭한테 말이야.”

“철의 일족도 이젠 불쌍해질 지경이네. 저런 놈도 왕이랍시고 고개 조아려가며 섬겼겠지? 너희들 어때? 지금이라도 우리 쪽으로 온다면 난민으로 받아줄게.”

정말로 한시도 쉬지 않고 독설을 퍼붓는 둘이었다.

다시 한 번 르누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하지만 지크는 이번엔 추격타를 날리지 않았다.

“헛발질이라고 했냐? 전혀 아냐. 얘기로 얻은 정보? 잘 기억하고 있어.”

지크가 검을 들어 올렸다.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는지 요새는 꽤 말을 잘 듣는 윈두르는 지크의 이미지대로 곧은 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쪽에 네가 모르는 정보가 있을 뿐이야.”

촤르륵!

자랑스럽게 자신의 본모습을 내보이듯 윈두르가 나뭇가지 같은 칼날들을 화려하게 꽃피웠다.

르누도 전진하던 병사들도 로만느도 그의 검을 쳐다봤다.

지크는 윈두르를 떡하니 벽의 균열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르누도 병사들도 지크의 행동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철컥!

벽에서 뭔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뭐, 뭐야!”

엘프의 좋은 귀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다. 그 소리는 마치 잠금쇠에 꼭 맞는 열쇠가 맞물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그긍!

지크가 윈두르를 돌리자 비올루윈에서 그랬던 것처럼 벽의 일부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누가 봐도 지크가 지금 문을 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 돼!”

르누가 소리를 질렀다.

대체 저 인간이 어떻게 열쇠의 대용을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지금 르누에게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 자식! 대화를 기억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그걸 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아니, 알아!”

지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가르쳐 줬거든.”

“가, 가르쳐 줘?”

“그래. 그래서 알 수 있어. 이걸 열면 우리는 괜찮지만….”

지크는 대담하게 웃었다.

“너희는 확실히 엿 될 거라는 걸!”

“막아아아아아!”

르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최소한의 피해조차 없애기 위해 진열을 맞추며 천천히 행군하던 병사들이 오와 열을 흩트리며 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거였지? 두 눈 뜨고 똑똑히 잘 보라고!”

철컥!

다시 한번 울리는 소리. 윈두르가 완전히 반 바퀴를 돌았다.

수많은 세월을 넘어, 조용히 잠들어 있던 벽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등장한 것은 재앙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문에서 거대한 화염이 뿜어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지하를 삼키고 계단을 내달려 성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닿는 것은 모조리 불태우며 그것은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성은 엄청난 화염을 뿜어내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변해버렸다.

* * *

지크가 성의 지하에서 르누와 대치하고 있던 시각. 한스는 스녹이 움직이는 갑옷과 라일라가 만든 골렘들을 데리고 열심히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분전했지만 아무래도 대충 만들어진 골렘들만을 이끌고 철의 일족의 정예들을 계속해서 상대를 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결국 갑옷들은 하나하나 쓰러져갔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속임수는 들켰다.

“이거 인간이 아냐! 속이 비었다!”

“골렘! 골렘이야! 그냥 꼭두각시라고!”

“인간 도적이 아니야?”

처음 깨달은 건 몇 명뿐이었지만 당연히 그 정보는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부서지는 갑옷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스스로 깨닫는 엘프들도 많아졌다.

‘슬슬 끝인가.’

덤벼드는 또 한 명의 엘프를 베어내며 한스는 전투의 끝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쉽진 않았다.

‘지크 님이 요구한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으니까.’

지크를 믿다 못해, 솔직히 요새는 광신의 경계에 발을 디딜까 말까 하는 상태의 한스인지라 지크가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갑옷들도 많이 부서졌고, 슬슬 후퇴하자.’

그래도 갑옷들은 최대한 회수를 할 생각이었다. 한스는 지면을 몇 번 두드렸다. 스녹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콰앙! 콰앙!

갑자기 일부 갑옷들의 공격이 거칠어졌다.

지금껏 적당히 공세적인 형태를 띠며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라는, 모순적인 움직임을 체현하던 스녹의 갑옷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갑옷에 상처가 나든 말든 스녹이 움직이는 갑옷들은 엘프들을 말 그대로 물고 늘어졌다.

스녹의 움직이는 갑옷이 엘프들을 막고 있을 때, 뒤에서 숫자 채우는 임무를 수행하던 골렘들이 한스에게 달려왔다.

한스는 마법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차례차례 주변에 있는 골렘들을 수납하기 시작했다.

“뭐, 뭐어…!”

켄디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병력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질 수 있었는지.

‘우리가 상당한 수의 병력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어. 애초에 진짜 적은 얼마 없었던 거야!’

갑옷으로 위장한 골렘들에게 감쪽같이 속았다.

‘특출하게 강한 개체가 좀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야!’

그 특출하게 강한 개체들이 직접적으로 자신들과 맞부딪치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뒤에서 단순한 움직임만을 할 수 있는 골렘들조차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 특출하게 강한 개체들도 인간이 아니었고!’

콰앙!

한 엘프가 끈질기게 덤벼드는 갑옷의 투구를 때렸다. 투구가 갑옷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벗겨진 투구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있지도 않았고, 그 아래에는 텅 빈 공간만이 속을 검게 내비치고 있었다.

쿠웅!

그러나 갑옷은 마치 투명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 다시 엘프들에게 덤벼들었다.

‘…아마도 진짜 적은 무척이나 소수. 아니면….’

켄디스의 시선이 적의 진영 한가운데, 느긋하게 골렘들을 마법 상자에 집어넣고 있는 한스에게 쏠렸다.

‘한 명일 수도.’

한스로서도 딱히 느긋하게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켄디스에게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으득!

켄디스는 활을 들고 화살을 빼들었다. 화살을 시위에 걸고 마력을 잔뜩 실었다.

투웅!

화살이 한스를 향해 쏘아졌다.

두꺼운 강철판이라도 우습게 관통할 수 있는 거력이 담긴 화살. 통짜 미스릴 갑옷이라도 입고 있지 않은 이상 갑옷만으로 그 화살을 막을 순 없다.

퍼억!

하지만 켄디스의 화살은 얄미운 적을 꿰뚫지 못했다. 적은 검을 들어 화살을 튕겨냈다.

열불이 터지는 점은, 적은 그 와중에도 골렘들을 수납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단 것이었다.

마치 네 공격을 막는 데는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이이익!”

켄디스는 계속 화살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한스의 에스텔레이드는 모든 화살을 쳐냈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 아슬아슬하게 쳐내는 것도 아니었다.

다리는 지면에 딱 붙어 있고 상체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만 움직여 화살을 쳐냈다.

“빌어처먹으으을!”

콰직!

켄디스가 자신의 활을 집어 던졌다. 여러 가지 나무와 몬스터의 부산물, 약간의 금속까지 섞어 만든 강력한 복합궁이었지만 켄디스가 던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저기서 갑옷들을 처넣고 있는 놈을 활로 집중 공격해!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려!”

질이 안 되면 양. 지금껏 산발적으로 갑옷들을 향하던 화살들이 일제히 한스 한 명을 노리며 날아올랐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만약 날이 밝은 시간대였다면 한 번에 날아오른 화살의 구름은 분명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러고 그 화려한 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우우웅!

한스가 에스텔레이드에 마력을 집중했다. 성검 특유의 빛이 번쩍였다.

마치 태양이 지면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다. 어쩌면 하늘이 미쳐 버려, 갑자기 시간대가 낮으로 바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한스는 그렇게 빛나는 에스텔레이드를 쇄도하는 화살의 무리들을 향해 휘둘렀다.

콰우우우우!

가장 먼저 달려나간 빛들이 주변을 밝힌다. 그리고 따라오는 건 한스의 마력이 가득 섞인 파괴적인 섬광이었다.

소리는 없다. 주변을 가득 메운 빛이 폭발하듯 환해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세상엔 다시 어둠이 뒤덮었다. 하지만 한스를 향해 달려들던 화살의 무리는 흔적조차 없이 빛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엘프들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한스를 쳐다본다. 여지껏 적당하게 인간 침략자 무리를 연기하던 터라 한스가 본 실력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얼어붙어 있든 말든 한스는 그저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어색하기도 했다.

‘음, 그러니까, 지크 님이라면 이런 때에….’

마침 엘프를 이끌고 있는 장군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눈을 크게 뜬 채 한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식지 않은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말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뭔가 화날 만한 일이라도 있었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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